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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윤장호 형제의 생명을 앗아갔는가? [복상199호]

지난 4월부터 월간 <복음과 상황>에 서평(?)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서평'을 가장한 기독교 비평이랄까요. 아무튼 7월호까지 하루에 한편씩 일단 올리려 합니다. 그러고 보니 왜 블로그에 올릴 생각을 못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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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엄 촘스키, 까치, 2004

故 윤장호 형제님께.

 

두 달 전, 당신의 죽음이 TV속보를 통해 전해졌을 때 저는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었습니다. 언젠간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 우려했던, 그러나 결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2003년 김선일 씨의 죽음 앞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원하나이다.” 기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우리는 또다시 당신의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당신의 죽음 앞에서 저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밝은 미래를 꿈꾸며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왔을 당신은 왜 그날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요. 폭탄을 안고 아그람 부대를 향했던 한 사람의 테러리스트가 당신을 죽인 걸까요, 아니면 태초부터 정해진 어떤 운명이 이루어진 것일까요,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당신을 죽게 만든 것일까요.

 

문득, 예전에 읽었던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괴물> 평론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거기서 현서(고아성 분)의 죽음의 이유를 묻고 있었습니다. 마치 제가 윤장호 님의 죽음의 이유를 물었던 것 처럼요. 그리고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그들의 가난은 현서가 매일, 학교가 끝나면, 한강에 와야만 하는 운명을 안겨준다. 이게 이 영화의 납치를 끔찍하게 만든다. 여의도 매점에서 살고 있는 현서는 한강 원효대교 북단에 살고 있는 괴물이 나타났을 때 마주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매일 살고 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맞다. 만일 현서가 잡혀가지 않았다면 그녀는 운이 좋은 것이다. (‘노골적이고 단호한 정치적 커밍아웃, 괴물’, <씨네21> 565호)’

 

현서를 죽인 것은 그녀를 잡아간 괴물도 아니요, 그녀를 구조하는데 너무도 굼떴던 그의 가족들도 아니요, 바로 사회가 만들어 낸 계급구조와 빈곤이라는 게 정성일의 주장이었습니다. 저도 묻고 싶었습니다. 자살폭탄을 안은 테러리스트는 왜 바로 그 시간에 그곳으로 향했던 것일까요? 왜 그 자리에 다른 사람도 아닌 한국군 윤장호 형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 왜 그곳에는 군사기지가 서 있었던 것일까요. 단순히 테러를 저지른 이들을 비난하기 전에, 역사 너머의 초월적 숙명이나 운명을 말하기 전에, 정말 물어야 하고 파헤쳐야 하는 당신의 죽음의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때 한 권의 책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UN회의장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맹비난하면서 추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떤 책인지 궁금해서 구입해 두었던, 노엄 촘스키의 <패권인가 생존인가 - 미국은 지금 어디로 가는가>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책을 읽고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바로 미국의 패권적 세계전략과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한 노무현 정부의 외교정책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윤장호 님이 운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 그날 그곳에 있던 다른 이들이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고 말입니다.

 

이 책의 원래 부제는 ‘세계지배를 위한 미국의 탐험’입니다. 촘스키는 이 부제가 말해주는 것처럼 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이 어떤 식으로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해왔고, 그 주 전략과 그것을 포장하는 레토릭이 어떤 것인지를 방대한 양의 자료와 구체적인 증거를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촘스키에 따르면, 미국 지도자들은 세계의 지배를 위하여 이중의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국내적으로 미국은 다양한 레토릭을 사용하여 여론을 조작하고, 미국의 세계지배 정책을 홍보합니다. 악의 축, 정의로운 전쟁, 보편주의, 인도주의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그 말들입니다. 우리에게 ‘민족자결주의’로 잘 알려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20세기 미국의 여론조작과 홍보정책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촘스키에 따르면 그가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는 실상 그 민족의 ‘소수의 선량한 엘리트’가 그 민족을 안정적으로 지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또한 국내적으로도 윌슨 대통령은 철저히 과두제적인 정치가 미국의 정치제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민중의 투쟁이 상당한 자유와 실력을 갖춘 곳에서는 이러한 과두지배가 불가능하기에 ‘짐승(민중)을 길들이는’ 다양한 여론조작과 홍보산업의 발달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촘스키는 이러한 국내전략은 지금의 부시 정부에 이르기까지 계속 발달해 왔으며 그 결과 오늘날 세계에서 미국이 정말로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아는 미국 시민들이 거의 없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이 저지르는 세계 각 나라에 대한 전쟁이나 테러, 독재정부에 대한 지원 등은 ‘민주주의’와 ‘국익’, ‘평화’의 이름으로 포장되었고, 미국의 대중은 그것에 대해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왔다는 것입니다.

 

또 한편의 지배 전략은 국외적인 것으로서 무력의 사용, 국가테러, 군비증강, 독재정권에 대한 지원을 포괄합니다. 촘스키는 미국이 세계 각지에서 민중이 민주정부를 자립적으로 수립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안정적인 세계 지배를 위해서는 그 나라의 엘리트 혹은 독재자가 권력을 갖고, 미국과의 협조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카라과와 파나마, 기타 남미 각 지역에서, 아프리카와 중동, 아시아에서 미국은 독재정부를 지원하고, 그들에게 저항적인 민중을 학살할 수 있는 무기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민중반란이 일어나 독재정권이 전복될 때에는 미국은 잔인한 국가테러로서 그 민중봉기를 억눌러왔습니다. 한편으로 미국의 하수인들이 미국의 말을 잘 듣지 않을 때 미국은 그들을 ‘민주주의를 위하여’라든지, ‘테러리스트를 지원했다’는 명목으로 몰아내기도 합니다. 밀로셰비치, 후세인, 탈레반 정권 등이 그러한 예입니다. 그들을 키웠던 것도 미국이요, 그들을 몰아낸 것도 미국이었던 것이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인 미국의 전쟁은 바로 이러한 세계 전략의 연장선 속에 있는 것입니다. 촘스키는 이미 후세인 정권은 항구적으로 민중들에 의해서 권력이 전복될지 모르는 위기 속에 놓여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이제는 많은 이들이 알게 되었습니다.-이라크에는 알카에다도, 대량학살무기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미국이 침공하지 않았더라면, 수하트로(인도네시아), 마르코스(필리핀), 차우셰스쿠(루마니아)처럼 민중에 의해 물러날 가능성이 높았던 후세인을 왜 미국은 무력을 동원해 몰아낸 것일까요? 그것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미국의 아랍에 대한 안정적인 지배와 석유에너지의 지속적 공급 때문이었죠.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나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역시 ‘일어나지 않았어도 될 전쟁’이었습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면서, 9․11 테러의 주범들을 보호하고, 잔인한 인권탄압을 행사하는 탈레반 정권을 전복시키는 것을 이 전쟁의 목적으로 선포하였습니다. 9․11의 비극이 벌어지자 탈레반 정부는 범인인도를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미국 측은 이상하게도 증거제시를 거부하며 탈레반 정부의 제안을 일축하였습니다. 또한 탈레반을 반대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제 정치집단들도 단호하고도 애절한 목소리로 폭격을 그만둘 것을 미국과 세계여론에 호소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탈레반 정권을 전복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명확한 증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하고, 그 곳에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의 패권정책에 맹목적으로 순종하여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우리 군인들을 보냈던 것입니다.

 

촘스키는 이러한 미국과 미국의 우방(대표적으로는 영국, 그리고 한국도 포함될 것입니다)들의 정책이 오히려 제 3세계 민중의 불만을 야기하며, 극단주의와 테러리즘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한다고 하는 미국의 패권정책으로 말미암아 세계는 오히려 더욱 위험하게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윤장호 형제님, 당신은 분명 세계평화와 아프가니스탄의 ‘불쌍한’ 민중들을 위해 그곳으로 향했을 것입니다. 남을 돕기를 좋아하고, 진지하게 인생의 길을 생각하는 기독교인이라는, 형제님의 가족과 친구들의 증언을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신의 생각과 달리 당신을 그곳에서 맞

이한 건 미국의 패권적 점령정책과 그것이 나은 비참한 생활 속에서 미국과 그 하수인들을 향해 바득바득 이를 갈고 있는 그 땅의 민중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대표적인 네오콘 정치인인-딕 체니 부통령이 당신이 근무하던 부대를 방문한 그 날, 그들 중 한 사람이 당신이 있는 초소로 폭탄을 안고 뛰어들었습니다. 당신의 죽음은 우연도 아니요, 숙명도 아닌, 미국의 잘못된 세계전략이 낳은 필연적인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은 있을까요. 형제님과 같은 이들이 다시는 죽임당하지 않는 세계는 우리에게 가능한 걸까요. 촘스키는 “그렇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도대체 어떤 근거로 저 강력한 미국의 세계지배를 넘어설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그 근거는 바로 ‘세계 여론’입니다. 촘스키는 지금 세계에는 두 개의 초강대국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미국이고, 하나는 ‘세계 여론’입니다. 촘스키는 미국 정부가 세계의 패권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미국의 세계지배에 반대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의 여론 또한 커져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와 이러한 세계의 반전, 반세계화 여론은 결속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세계사회포럼’과 지난 2003년부터 수차례 이루어진 ‘국제반전행동’은 이러한 세계 여론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촘스키는 이 책의 마지막에서 이 두 편 중 어느 편이 이기는가에 따라 인류의 생존이 걸려 있다고 말합니다. 누가 이기는가에 대해서 촘스키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결국 그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의지만 있다면 기회는 있다.” 저 역시도 촘스키의 그 희망에 우리의 미래를 걸어보고 싶습니다.

 

윤장호 형제님, 당신은 그곳 아프가니스탄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남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시는 당신 같은 이가 죽임당하지 않는 세계를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 당신이 있는 그곳에서 지켜봐주십시오.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보지 못했던 세계의 진실과, 다른 세계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의 사람들을요.

 

윤장호 형제님의 평화를 기원하며, 당신의 책 읽어주는 친구 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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