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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들어가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복상2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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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지글러, 갈라파고스, 2007

철수 형제님께......

형제님,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이던 때에 저는 형제님이 인도하는 찬양예배에 종종 참석하곤 했습니다. 그 당시 서울에서는 이미 경배와 찬양이 주류를 이루고, 많은 젊은이들이 찬양이 주는 감격에 빠져 지냈었지만 대도시에 편입된 지 얼마 안 된 그 작은 소도시에서는 형제님이 인도하는 소박한 찬양예배 말고는 제 목마름을 해결해 줄 곳이 없었더랬지요. 그 예배들을 통해 경험한 것들을 저는 지금껏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회심’을 했고, ‘방언’을 하게 되었고, 심지어 작은 병들이 낫는 체험까지 하게 되었지요.

 

 

그러한 경험은 저로 하여금 성서를 탐독하게 해 주었고, 그리고 지금껏 신학공부를 할 수 있었던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아, 물론 지금의 저를 만나신다면 형제님은 저를 “잃어버린 양”이라고, 혹 형제님이 그 때보다 더욱 근본주의자가 되셨다면 저를 “사탄의 종”이라고 부를지 모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나름대로 진리와 하느님에 대한 구도(求道)를 끈질기게 이어가고 있지만 그 당시 형제님이 저에게 가르쳐주신 길과는 너무도 먼 길을 가고 있으니까요.

 

뭐, 여기서 굳이 형제님의 “지옥에 가게 될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열심히 전도하자”라든지, “방언을 받지 않으면 성령이 임하지 않은 것이다”라는 주장들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 형제님은 위대한 영적 지도자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형제님도 고등학교 3학년에 불과한 미성숙한 인간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형제님의 미성숙함에도 불구하고 제게 주신 삶의 유익이 훨씬 컸기에 제게는 감사한 마음이 안타까운 마음을 덮고도 남는답니다.


그 때 그 기도
그렇지만, 오늘 새삼 형제님을 추억하게 된 건 안타깝게도 감사한 마음 때문이 아니라 불편한 마음 때문이라는 게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오늘 소개할 이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다가 형제님과 형제님이 인도하던 예배의 한 장면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날 형제님은 유독 ‘선교’에 대한 찬양을 많이 인도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도의 시간에는 아프리카의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길고 깊은 기도를 드렸었지요. 오늘 이 책을 읽다가 그 날 형제님이 나누었던 기도의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아프리카의 굶주린 영혼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들이 지금 굶주림에 빠진 것은 그들에게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복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민족과 나라는 하나같이 가난합니다. 그리고 죄가 만연합니다. 아프리카에 퍼지고 있는 에이즈와 전쟁과 기아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없으면 이렇게 비참합니다. 이제 기도합시다. 저 어둠의 땅에 복음의 손길이 닿게 해 주시옵소서! 선교사들이 순교자의 각오로 그 땅을 정복하게 하옵소서!”

 

여기서 굳이 당시(그리고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부유하고 강한 나라가 복음화 율이 2%도 안 된다는 것을 상기하지는 않겠습니다. 또 형제님께서 어둠의 땅이라고 부른 아프리카의 몇 나라에는 초대 교회 시절부터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기독교가 지금도 큰 세를 이루고 있다는 것도 굳이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어쨌거나 그 때는 형제님도 고등학교 3학년에 불과한 미성숙한 인간이었으니까요. 다만 저는 그 때 형제님께서 나누었던 기도제목이 얼마나 제게 강한 영향을 주었던지 사회학과 선교학을 나름대로 공부한 지금까지도 기아에 대한 저의 ‘감정’이 여전히 그 때 그 시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깨닫고 상당히 슬펐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책은 그런 저의 감정이나 일천한 인식이 얼마나 거짓된 정보나 이념, 무지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밝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아도는 식량, 굶어죽는 사람들
이 책은 ‘기아’라는 주제의 무거움에 비하면 전혀 어렵게 읽힐 책은 아닙니다. 저자 장 지글러는 제네바 대학의 사회학 교수이자 UN 인권위원회의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세계의 기아현장을 다니며 활동하고 있는 학문과 활동이 겸비된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입니다. 그렇지만 이 책은 결코 학문적이거나 전문적인 지식으로 뒤덮여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과 나눈 대화의 형식으로 이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이 소중한 이유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고급의 정보를 누구나 쉽게-아이들까지도!-세계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나누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현재 세계 인구는 60억인 반면에 인류의 농업생산력은 120억 명을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99년 현재 3,000만 명 이상이 ‘심각한 기아상태’(삶과 죽음의 경계선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에 있으며, 8억 2,800만 명 정도가 ‘만성적인 영양실조’(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는 상황)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런 기아는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 한정되는 현상이 아닙니다. 세계 2위의 군사력을 가진 러시아에서도, 또 지구상에서 곡물을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인 브라질에서도 기아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저자는 소말리아, 북한, 에티오피아, 필리핀, 르완다, 그루지야, 세르비아 등 기아가 퍼져 있는 여러 곳을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기아를 심화시키는 원인으로 그 나라의 지도층과 엘리트들을 들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소말리아에서는 서로 정권을 잡겠다고 전쟁을 벌이고 있는 군벌과 정부가, 북한에서는 주민들이 기아상태에 있음에도 군비를 확장하는 김정일 정권이 원활한 구호를 가로막고 기아를 심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말한다면 형제님의 주장도 어느 정도는 들어맞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후진적이고 야만적인 정치체제나 엘리트들의 비리가 민족의 가난과 기아를 불러들이고 있는 것은 맞으니까요.


기아의 근본적 원인
그렇지만 저자는 기아의 근본적인 원인을 여기에서 찾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는 좀 더 근본적인 곳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복음이 없는 죄악 된 민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긴 세월동안 복음의 세례를 받은 강대국들과 그 나라들에서 기인한 세계경제체제의 ‘죄악’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러한 ‘근본적 원인’이 극명하게 나타난 사례로 칠레의 피노체트 쿠데타를 꼽고 있습니다. 흔히 사회주의 정권을 군부와 CIA가 몰아낸 것으로 기억하는 이 사건을 저자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1970년, 칠레의 대통령 아옌데는 칠레의 모든 아이들에게 분유를 무상으로 배급하겠다는 것을 공약으로 걸고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칠레의 분유시장은 네슬레라는 다국적 기업이 독점하고 있었지요. 아옌데는 (‘사회주의자’에 대한 일반의 통념과는 달리) 네슬레의 분유를 몰수하는 대신 제 값을 주고 사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네슬레 본사는 칠레 정부와의 어떤 협력도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 정부가 칠레의 사회주의적 개혁이 미국의 국제기업이 누려온 특권과 이익을 침해할 것을 우려해 개입하기 시작했고, 많은 다국적 기업들 역시 미국의 길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결국 피노체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 대통령을 비롯한 수백 명을 죽이고 권좌에 오르게 되었지요. 그리고 칠레의 아이들은 다시 아옌데 이전의 영양실조 상태로 되돌아가고 말았고요.

 

저자는 이러한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바로 세계 금융자본의 과두제적인 세계 지배와 그것을 가능하게 한 ‘워싱턴 합의’에서 찾고 있습니다. 워싱턴 합의란 미국과 IMF, 세계은행 등과 국제금융자본이 미국식 시장경제를 개발도상국 발전모델로 삼도록 한 합의를 말합니다. 워싱턴 합의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어느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는 네 가지 원칙 -민영화, 규제철폐, 거시경제안정, 예산감축-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원칙 하에서 지금 제 3세계 국가들의 민중들과 (심지어) 선진국 내부의 가난한 이들의 삶은 보호조치가 없는 삶의 한계지대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저자가 기아의 원인으로 들고 있는 것은 19~20세기의 식민주의와 그것을 이어받은 지금까지의 신식민주의입니다. 서구 ‘기독교 세계’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아프리카와 남미, 아시아 등지의 식민지에 단일 경작, 즉 자국에 필요한 한 가지 산물만을 집중적으로 제배하게 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결국 식민지의 민중들은 자신들이 먹을 것들은 생산하지 못하고 넓은 농지를 식민 모국을 위해 사용해야 했던 것이죠. 그리고 이런 관행은 지금도 옛 식민모국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옛 식민지의 엘리트들의 정책을 통해 지속되고 있습니다.

 

결국 미국과 유럽의 ‘기독교 세계’야말로 이 대량 기아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는 장본인들인 것입니다.


워싱턴 합의의 세상이냐, 굶주림 없는 새 세상이냐
그렇다면 세계는 어떻게 이러한 기아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만성적으로 기아에 허덕이던 사람들이 그 상태에서 해방될 가능성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요. 저자는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는 아프리카의 최빈국 부르키나파소의 젊은 혁명가 토마스 상카라를 그런 희망의 한 예로 제시합니다. 젊은 군인이었던 토마스 상카라는 혁명을 통해 부르키나파소의 대통령이 됩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아프리카의 ‘혁명 독재자’들과는 달리 부르키나파소의 인민들을 사랑하고, 인민에게 권력을 준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자주관리정책을 통해 주민들 자신이 각 지역을 다스리게 했고,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했습니다. 그리고 편중된 토지소유를 바로잡아 각 가정에 토지를 분배 했습니다. 그러한 정책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4년 만에 식량을 자급하게 되고, 남은 국가 재정을 각종 국가사업에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던 것이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카라는 혁명을 일으킨 지 4년 만에 미국과 식민모국 프랑스, 그리고 아프리카의 다른 독재자들의 지원을 받은 변절한 혁명 동지에게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워싱턴 합의체제’는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평등하게 기아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차마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저자는 토마스 상카라의 경험에서 실패만을 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계에는 수많은 토마스 상카라가 있으니까요. 저자는 세계의 기아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으로 구호가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개혁을 이야기합니다. 기아의 희생자들이 단순히 구호의 대상으로 머물지 않고 혁명적 행동을 통해 자율적이고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자가 되어야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세계에는 워싱턴합의가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자는 바로 그들에게서 세계의 희망을 찾고 있습니다.

 

철수 형제님. 형제님 말대로 기아를 겪고 있는 나라들은 ‘복음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복음은 결단코 “믿고 죽으면 지옥에 안 가는” 그런 복음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은 공중의 나는 새와 들의 풀도 먹이시는 분임을 우리는 자주 고백하곤 했지요. 그렇다면 그분의 그 뜻이 하늘에서만 아니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복음일 것입니다. 지금 세계에 필요한 건 죽어서 천국 가는 복음이 아니라 바로 이 복음이 아닐까요. 저는 기도합니다. 이 복음이 세계 곳곳에 들어가게 해 주시기를요. 그리고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내시는지 모를 형제님의 발을 이 복음이 인도하시기를요.

 

형제님의 평화를 기원하며, 당신의 책 읽어주는 친구 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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