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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능하지 않습니다. [복상2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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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 박권일, 88만원 세대

 일우 형.

지난 추석 마지막 날에 만났던 형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축 쳐진 어깨와 힘을 잃은 눈매는 활력에 넘치는 청년부 리더였던 형의 모습을 기억하는 저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습니다. 마치 선교단체처럼 조직된 그 교회 청년부에서 학부 1학년 때부터 군대를 다녀와 복학해서 3학년을 마칠 때까지 형은 가장 충성된 회원이자 리더였습니다. 단 두 명뿐이던 캠퍼스 모임을 열배로 성장시킨 이야기는(양만이 아니라 질로서도 성장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도 신화처럼 전해 내려온다고 합니다. 제가 그 교회를 나온 이후에 형이 4학년이 되면서 갑자기 모든 사역을 그만두고 취업 준비를 하겠다고 선언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도 저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직장 선교사로 쓰임 받고 싶다.”던 형의 진정성을 믿었기 때문이었죠. 그동안 취업준비를 완전히 미루어 놓았던 형이니 적어도 1년은 죽어라고 해야겠지 생각도 했구요.

 

하지만 4학년 때 1년간, 졸업하고 또 1년간 수백 장의 이력서를 넣었지만 줄줄이 퇴짜를 맞고 결국 간간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게 2년.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거니? 요즘은 자꾸만 청년부 사역을 하느라 내가 시간을 헛되게 써버렸다는 후회가 들더라. 그리고 그런 후회를 하는 내가 또 하나님 앞에서 너무 죄스럽더라.” 3년 만에 만난 형이 토로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형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실업이라는 고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직장선교사를 꿈꾼다.”던 형이 지금은 “부모님 용돈 받아 사는 것도 못할 일이고, 결혼도 해야 하고, 어찌되었건 살긴 해야겠기에” 대학시절엔 형이 그토록 무시하던 공무원 시험 준비에 매달리는 걸 보면서 적잖이 안타까웠습니다. 어쩌면 도피라고도 할 수 있는 대학원 진학을 택했던 저로선, 형의 모습을 통해서야 우리 세대를 짓누르고 있는 청년 실업의 실상을 목도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하고 싶다!
전에 어떤 신문기사에서 “영혼을 팔아서라도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다.”던 한 취업준비생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어 이제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갔다는 한국에서 우리 20대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된 걸까요. 왜 우리 세대는 어떤 소설 속 주인공의 대사처럼 “후진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로 자라나 선진국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직업이 없을까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의자에 앉아 공부만 했는데, 부모나 선생이 하라는 거는 얌전히 다 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야? 세상은 죽이는 스터프들, 머스트해브(MustHave) 아이템으로 가득 차 있는데 왜 우리 주머니에는 그걸 살 돈이 없는 거야?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라더니, 다 어디로 간 거야?”라고 한숨을 쉬어야 할까요.(김영하, <퀴즈쇼> 中)

 

우리가 무능력하기 때문일까요. 명절 때마다 듣는 우리 어머니 잔소리처럼 “능력도 없이 지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다니면서 부모 등골이나 빼 먹고” 살기 때문일까요.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영어 한 마디 못해도, 휴교령이다 민주화운동이다 해서 성적표에 F가 가득해도 대학만 졸업하면 어디든 취직하여 적어도 IMF가 오기 전까진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며 사회의 주류가 된 4,50대에 비하면 우리는 그야말로 ‘글로벌 인재’들이 아니던가요. 그런 우리에게 왜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불안정한 삶과 재테크로 대표되는 헛된 희망 말고는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요.  

“88만원 세대”를 낳은 한국 사회
그런 고민을 하던 중에 이 책 <88만원 세대>를 읽게 되었습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시작된 “시민독서프로젝트: 우리의 불안정한 삶, 비정규직을 읽는다”라는 전국적인 독서운동을 통해서였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어렴풋이만 느끼고 있었던 진실을, 형과 저의 문제와 고민이 비단 우리 개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20대 전체의 문제이며, 한국의 경제, 문화,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인 “88만원 세대”란 상위 5%만이 대기업이나 한전 등의 공기업 직원, 5급 사무관 이상의 고위 공무원이 될 수 있고, 나머지는 월평균 88만원(세전소득)의 급여를 받는 비정규직의 삶을 살아야 하는 지금의 20대를 지칭한 신조어입니다. 이 책의 저자들의 문제의식은 이들 88만원 세대가 30대가 되고, 4,50대가 되어도 이러한 처지에서 더 나아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경제의 성장은 바로 우리들 20대를 볼모로 잡고 이루어지는 ‘세대 간 착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첫 장은 “첫 섹스의 경제학”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으로 10대, 20대가 놓인 특수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럽국가의 청소년들과는 달리 한국의 청소년, 청년들은 어린 나이부터 ‘동거’와 ‘결혼’, ‘섹스’로 대표되는 독립적인 삶을 구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문화적인 이유보다도 그들에게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저자들은 유럽사회와 달리, 한국 사회는 새롭게 출발하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주거권과 생활지원을 보장해주는 사회적 합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들의 성장을 무한히 지체되도록 만듭니다.

 

한국사회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소년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대학 진학을 포기, 2) 등록금 융자와 같은 개인융자를 받아 대학에 가는 방법, 3) 부모의 재정에 기대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3)의 길을 가게 되고, 부모로부터의 독립이나 동거와 같은 자신의 의지에 대한 선택은 취업 이후로 무한히 연기됩니다. 2)의 길은 졸업 후 빚더미에 앉게 되어 고소득의 직장에 입사하지 않으면 평생을 빚과 싸우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1)은 이른바 ‘알바 인생’의 길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알바’들은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어떤 나라들의 알바들보다도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시급과 가혹한 노동조건 속에서 국가도, 노동조합도 이들을 전혀 보호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자들은 지금의 20대가 만나게 된 이 비참한 현실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국제적 독과점화”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노무현 정부의 “선택과 집중” 전략 때문이라 설명합니다. “파이를 먼저 키워야 한다”는 발상 속에서 독과점화에 대한 어떤 규제도 없는 승자 독식의 경제 정책은 결국 ‘제대로 된 안정된 직장’을 갈수록 줄어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승자독식 게임 속에서 대기업 정규직은 한정되어 있고, 경제의 중추를 이루는 중소기업들은 위기 속에서 비정규직을 돌려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수십만의 20대가 오로지 ‘공무원 시험’과 각종 ‘고시’에 목을 매달고 있습니다.

 

저자들의 중요한 통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승자 독식 게임이 근본적으로는 20대의 ‘세대 내의 경쟁’이 아니라 ‘세대 간 경쟁’이라는 것을 밝힌 데에 있습니다. 즉 한국 경제의 성장기, 연공서열제와 정규직 체제가 있는 조건에서 사회진출을 한 유신세대, 386세대 등과 지금의 20대가 경쟁을 해야 하는 구조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저자들은 2장에서 공무원, 정부출연기관, 대기업, 민간협회, 시민단체, 자영업 심지어는 조직폭력단과 다단계조직 등을 분석하면서 각 조직들 속에서 세대 간 경쟁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20대가 어떤 식으로 밀려나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압도적인 재력과 생존능력으로 무장한 지금의 4,50나 민주화 투쟁 속에서 능력을 키웠고, 2002년 대선을 통해 주류 세력으로 등장한 386세대와 지금의 20대의 경쟁은 애초부터 불공정한 싸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세대 간 경쟁’에서 밀려난 우리 세대는 한편으론 윗세대의 마케팅 전략에 완전히 포섭되어 착취당하고, 한편으론 “88만원 인생”을 벗어나기 위해 동년배들끼리의 무한 경쟁을 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이 싸움은 마치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들이 죽지 않기 위해 서로를 밟고 올라가는 - 그리고 그럼에도 대부분이 희생되고 마는 - 비참하고 처절한 싸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 개미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걸까요? 소수 5%만이 승리자가 되는 이 게임을 우리는 죽을 때 까지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저자들은 이 승자독식 게임을 그대로 놔 둘 경우 한국 사회는 전후 최초로 파시즘 세대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먹고 살기가 팍팍해지고, 사회적 박탈감이 심화될수록 사람들은 외부의 적을 찾다가 그게 수월치 않으면 내부의 적을 찾게 된다는 것이지요.

 

386세대, 너희들의 ‘하느님 나라’
이런 비극적 상황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 저자들은 몇 가지 제언을 하고 있습니다. 약간은 혼란스럽게 제안들이 흩어져 있지만 크게 정리하면 386세대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에 대한 주문과, 20대에 대한 제안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저자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민주화를 쟁취한” 386 세대에게 보는 시각은 매우 서늘합니다. 386세대야 말로 한국 사회의 세대 간 착취를 고착화시킨 주범이라는 것이지요. 프랑스의 68세대와 달리 386세대는 혁명적 변화 이후 너무나도 쉽게 기존 체제에 흡수되어버렸습니다. “이 세대가 아이들을 낳게 되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원정출산이 나타났고, 그 아이들이 자랐을 때는 조기유학 붐이 일어났다. 유럽의 68세대가 사회에 진출하면서 사회적 민주주의가 발전되고 직접 민주주의가 심화된 것과 달리 우리나라 386의 경우는 부모 세대가 되면서 자신들의 경험과는 전혀 상반되게 사교육에 매달리거나 교육을 매개로 한 무한 경쟁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현재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다음 세대’의 문제의 절반 정도는 지금의 386세대가 부모가 되면서 생겨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들은 이 386 세대가 20대에 대한 시각을 빨리 바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른바 “꼰대”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저자들은 자본의 구매력에 근거한 회유가 강할 것인가, 미디어의 쇼비니즘에 의한 동원력이 강할 것인가, 아니면 노동조합을 비롯한 대척점에 서 있는 힘이 내미는 협조의 손이 더 강할 것인가가 지금부터의 흐름의 분기점을 형성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386세대의 이 “대척점에 서 있는 힘”들이 20대를 향해서 “너희들은 민주주의를 몰라” “이기적이야”라고 비판만 해서는, 집회를 할 때마다 여전히 “민중의 노래”같은 군가식 노래 틀어놓고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의 연설만 늘어놓는 식으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는 복음주의 교회나 운동판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교회 내에서도 이 책의 내용과 비슷한 세대 갈등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부분 교회 청년부의 교역자들은 386들일 테니까요. 그들은 매일같이 청년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줍니다.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목회자들은 “여러분이 주께 하듯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선 여러분에게 비전을 이룰 기회를 주시지 않는 겁니다.”라는 식으로, 그리고 진보적인 목회자들은 “언제까지 학점이나, 패션 같은 개인적인 문제에 몰두하며 살 겁니까? 개인의 취업보다 훨씬 중요한 ‘민족 통일’의 문제에는 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까?”라는 식으로요. 어쩌면 형이 가지고 있는 죄책감이나 열패감은 저런 식의 선동 때문은 아닐까요? 설교말씀대로 살자니 도저히 살 길이 안 보이고, 살 길을 찾자니 하느님 나라를 버리는 것 같은 그런…….

 

올해 “성서한국” 대회 - 형이 “이제는 그런 거 별로 관심도 안 간다.”고 손사래 치는 바람에 이야기해보지 못했었죠. - 의 주제는 “통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좋은 이야기이고, 한국사회가 반드시 넘어야 할 주제이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 모임에 대한 기사들을 읽으면서 무언가 불편함을 느꼈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야 그 불편함의 실체를 알았는데, 그건 386 목회자들의 운동에 어쩌면 우리 청년들이 그저 동원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청년들을 “하느님 나라”운동에 헌신케 한다면서 정작 “청년들의 하느님 나라”가 아닌 “386 목회자들의 하느님 나라”를 청년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그런 물음입니다. 그래서 살 길을 찾아 분주히 헤매는 다른 많은 청년들은 자신의 이슈를 찾지 못해 동참하지 못하고, 한편으론 ‘헌신되지 못한 죄인’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요. 물론 저의 괜한 과대망상일 수도 있겠지만요.
 
88만원 세대의 하느님 나라
그러면, 우리 세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과연 개미지옥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무한 경쟁이 아니라, ‘무한 연대’를 이루어 88만원 세대 우리 자신의 삶을 바꾸고, 한국 사회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 있을까요? 88만원 세대가 벌여야 할 ‘하느님 나라 운동’은 무엇일까요?

 

이 책 표지에는 “20대여, 토플 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라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나가서 데모라도 하라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책을 읽어보면 상징적인 의미로 “바리케이드”와 “짱돌”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 세대를 보호할 장치들(바리케이드)을 만들고 세대 간 경쟁에 공세적으로 나설 수 있는 무기(짱돌)를 마련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저자들은 하나의 예로 20대 1만 명 정도가 스타벅스에 가기를 거부하고 20대 사장이 직접 내려주는 커피와 차를 마시겠다는 선언을 한다는 상상을 해보자고 제안합니다. 1만 명이 이런 운동을 벌이면 100명의 20대가 자기 카페를 가지고 경제적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보다 큰 사회적 파격을 낳는다는 것이죠. 또 더 나아가 ‘생활협동조합’의 방식으로 직접 서로를 먹여 살릴 수 있는 20대들 간의 경제적 연합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이것만 있는 건 아닐 것입니다. 사실은 이 책 자체가 하나의 “짱돌”이기도 할 겁니다. 제 주변에 이 책을 읽은 친구들은 하나같이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실상을 깨닫는 것, 우리가 얼마나 - 특히 마케팅 전략에 의해 - 우리 윗세대들에게 농락당하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무기가 될 것입니다.

 

일우 형.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이 개미지옥을 벗어나려면 어떤 종류의 “바리케이드”든 치고, “짱돌”을 들어 의미 있는 사회세력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사회선교를 하겠다는 청년들이 먼저 88만원 세대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한 번 싸우고, 연대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그것을 윗세대의 목회자들이 믿고 후원해주면 좋겠습니다. 개미지옥 속의 삶 말고 다른 삶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내년 시험에 형이 붙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열심히 준비했으니 그리 될 거라 봅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운이 없어서 떨어지거나(미안해요.ㅜㅜ) 마음이 바뀐다면, 그때는 저랑 같이 무엇이 되었든 바리케이드 한 번 같이 쳐 보아요. 우리만 말고 “함께 살아가기”를 “경쟁”보다 원하는 다른 88만원 세대 친구들을 모아서요. 형, 우리는 무능력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은 혼자라서 힘겨울 뿐입니다.
 
다시금 형의 활기찬 모습을 보고 싶은, 일우 형의 책 읽어주는 친구 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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