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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를 믿숩니까! [복상 211호]

더글러스 러미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녹색평론사 2002



이명박 대통령님께.


늦게나마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더불어 여당의 총선 압승을 축하드립니다. 한나라당뿐만 아니라 보수주의 정당인 자유선진당과 제게는 코미디언 집단으로만 보이던 친박연대와 무소속 보수정치인들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독재도 가능한 보수의 시대가 열린 듯합니다.


그러나 대통령님께는 축하할 일이 제게는 어째 좀 부담스럽게 느껴지네요. 당선 이후부터 지금까지 인수위와 새 정부를 거쳐 발표되는 정책을 접할 때마다 저는 꼭 누군가가 무거운 돌덩이를 올려놓고 누르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지곤 합니다. 한반도 대운하나 의료의 산업화, 영어몰입교육 같은 잘 알려지고 커다란 정책에서부터 파업권 제한, 집회 시 체포전담조 투입, 법인세 인하, 공공부문 구조조정, 일제고사 부활 등을 비롯한 새 정부의 거의 모든 정책이 제가 원하는 세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방향으로 대한민국을 끌고 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제가 원하는 세상의 모습을 대통령님께 강요할 순 없을 겁니다. 어찌 되었든 대통령님은 바로 그런 정책들을 공약으로 내걸고 선거에 나서서 “국민의 지지”를 받으신 거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이 지면을 빌어서 대통령님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통령님의 가장 큰 구호였던 “실용주의”라는 말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책을 “실용주의”로 표방하면서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이념”이나 한갓 “이상주의”로 몰아붙이는 대통령님과 새 정부의 인식과 주장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오늘 대통령님께 소개해드릴 이 책,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를 읽으면서 대통령님의 “실용주의”야 말로 참으로 “이념”이나 한갓 “이상주의”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타이타닉 현실주의, 혹은 ‘실용주의’

어떤 정책을 “실용주의”라고 할 땐 그것이 현실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즉, 실용주의는 현실에 대한 적합한 판단을 기초로 하는 “현실주의”이기도 한 것입니다.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고, 실용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님이 바라보는 현실과 이 책의 저자가 바라보는 ‘현실’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저자는 대통령님과 같은 현실인식을 “타이타닉 현실주의”라고 부릅니다.(이걸 타이타닉 실용주의라 불러도 우리의 이야기에서 어긋남은 없을 듯합니다.)


저자는 타이타닉 호는 빙산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고, 그 빙산은 현실로 존재했고, 마침내 그 배가 침몰한 것도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배를 멈추어야 한다.”는 경고를 “비현실주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이타닉호는 전진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 멈추면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 각자의 일거리가 없어질 것이며,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황이 올 것이라는 것, 그것이 저자가 말하는 “타이타닉 현실주의”입니다. 갑자기 웬 배 이야기냐구요? 대통령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지구와, 지구상의 국가들이 “닥치고 계속 성장”을 하다가는 언젠가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는 “명백한 현실”에서는 눈을 돌리고 “계속 경제는 성장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라고 주장하며 지구라는 타이타닉의 속도를 올리고 있는 가짜 현실주의를 비판하려는 비유가 아닐는지요.


경제 성장, 혹은 발전이라는 허상

편집자와의 대담을 기초로 쓰인 이 책은 그래서인지 매우 친절한 강의의 형태로 이 “타이타닉 현실주의”에 대한 비판과, “진짜 현실주의”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타이타닉 현실주의의 이유를 타이타닉 호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는 착각에 기인한 것이라 말합니다. 이 배가 세계이며, 배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곧 “현실주의” 경제학자들의 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이타닉 호 바깥에는 바다와 빙산이 있고, 세계 경제의 바깥에는 경제적 합리성만으론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정치”의 세계와 자연환경이 있습니다. 더구나 세계경제 시스템의 “빙산”은 장래에 기다리고 있는 일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일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이 책이 써진 지 1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온난화”로 대표되는 지구환경의 악화를 눈으로 목도하고 있습니다.


대체 사람들은 언제부터 이런 “타이타닉 현실주의”를 “현실”로 착각하면서 국가와 세계를 움직여 왔을까요? 흥미롭게도 저자는 이런 식의 발전 이데올로기가 분명하게 태어난 순간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1949년 1월 20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의 연설이 그 순간입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미국의 새로운 정책”을 이야기하면서 “미개발의 나라들에 대해 경제 원조를 행하고 투자를 하여 발전시킨다.”는, 오늘날에는 너무나 익숙해진 정책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연설이 “미개발 국가”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공식문서라고 이야기합니다. 더불어 이 연설에서 본디 자동사인 develop(발전하다)라는 단어가 타동사(발전시키다)로 문법에 맞지 않게 쓰였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저자는 본래 발전이라는 건, 하나의 틀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각 개체(여기서는 나라들)의 내재적인 가능성이 개화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의 이 연설과, 이어지는 미국의 세계정책은 발전을 누군가(특히 미국)에 의해 주어지는 것으로, 하나의 동일한 기준과 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시점 이후로 우리가 아는 “경제 규모가 커지는 것이 바로 발전”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전 세기의 식민주의, 제국주의가 파국을 맞은 지점에서 새롭게 세계를 지배하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한국은 이러한 정책의 즉각적인 수혜자였습니다. 대통령님이라면 잘 기억하시겠지만, 50년대~60년대를 이어가며 우리는 “원조경제”의 시대를 살았고, 뒤 이은 장면과 박정희 정부의 “경제 개발 계획”에 의해 끊임없는 성장 정책을 취해왔습니다. 물론 이 “개발”과 “성장”은 국민의 다양성과 자율, 복지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척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것이었지요. 그러한 성장 정책의 최신판이 대통령님이 “실용주의”라고 부르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일 것입니다. 즉 정치와 경제와 사회 등 모든 삶을 민주주의원리가 아닌 시장원리에 따라 재편하자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실용주의는 바로 “가난을 벗어나려면 경제가 성장해야 하며, 성장을 멈추지 말고 가속해야 한다.”는 타이타닉 현실주의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실상은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대표적인 ‘실상’의 예는 바로 “슬럼”입니다. 우리는 높은 빌딩, 비행장등 콘크리트와 유리, 철근으로 된 건물들을 보면서 그것을 “발전”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달동네와 쪽방 등을 보면서는 아직 청산되지 못한 과거의 유물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슬럼”에서 우리는 가장 근대적인 건축재료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블록, 플라스틱, 베니어판 등, 그것이 주워온 것일지는 몰라도 슬럼은 결코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초현대적인 현상이라는 것이죠. 저자는 근대건축을 보기 위해서는 고층빌딩과 슬럼을 동시에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슬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곧 고층빌딩의 청소부, 창문 닦기, 부자들의 하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경제발전이란 ‘슬럼세계’를 ‘고층빌딩 세계’로 조금씩 변신시키는 과정이라고 하는 건 착각에 불과합니다. 반대로 경제발전이라는 획일적인 과정을 따라 예전의 ‘다양한’ 사회가 ‘고층빌딩과 슬럼의 세계’로 바뀐 것이 20세기의 역사적 사실인 것입니다.


이런 고층빌딩과 슬럼의 세계로 모든 나라들이 나아갈수록 가난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재생산됩니다. 제3세계에서는 절대적 빈곤이 더욱 늘어나고, 1세계에서도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이는 자본주의에서는 필연적입니다.)이 계속해서 늘어납니다. 아마 이명박 정부 하에서 우리가 “양극화”라고 부르는, 이 상대적 빈곤의 증가는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계속될 것입니다. 부자들이 늘어나는 속도 만큼이나요.


그러나 저자는 이것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경제 체제 혹은 사회 바깥의 “자연”입니다. 왜냐하면 경제체제라는 파이는 계속 커질지 모르지만 자연은 결코 커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경제규모가 엄청나게 큰 나라 중 하나이지만 환경과 생태에 대한 인식은 너무나도 낮은 수준입니다.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이산화탄소를 뿜어대는 지금의 경제를 유지하다가는, 게다가 여기에 더하여 재앙이 불 보듯 뻔한 새만금 매립과 대운하 건설을 진행한다면 자연은 거대한 빙산이 되어 대한민국이라는 타이타닉호에 부딪혀 올 것입니다. 결국 이런 점에서 대통령님의 “실용주의”는 하나도 “실용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신비적이고 비현실적인 이데올로기에 불과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 즉 빈곤의 증가가 가속화되고, 빈곤하지 않은 사람들도 야근에 시달리고, 지구는 갈수록 온난화되고, 그래서 재앙이 멀지 않은 미래에 있을 거라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 현실로부터 우리의 삶을 “실용적으로” 계획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경제 관료의 지배에서 대중의 민주주의적 자치로

그렇다면 저자가 보는 ‘실용주의’란 무얼까요. 빈곤의 세계화와 임박한 자연재앙이라는 현실을 ‘실용적으로’ 극복하는 길은 무얼까요. 저자는 그 길이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합니다. 너무도 식상한 말이라구요? 아닙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민주주의”는 4년에 한 번씩 투표해서 “훌륭한 일꾼”을 뽑는 그런 ‘대의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더불어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시장원리에 입각해서 움직이는 “경제”와, 권위주의에 의해 움직이는 “군대”조차도 민주주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게 하자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민주주의란 무얼까요? 저자는 “선거”는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선거를 통해서는 보통 가진 사람, 잘난 사람, 많이 배운 사람들만이 정치가와 관료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시초라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민주주의란 선거가 아니라 “제비뽑기”였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일정 기간 동안 공직에 오를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누구나가 공직에 올라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수양을 쉬지 않고, 민주주의적 역량을 몸에 익힘으로써 대중의 수준 자체가 높은 사회가 곧 민주주의 사회의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 시기의 “민주주의자”들은 이내 선거를 도입하고, 민주주의를 대의민주주의로 바꾸어버립니다. 그리하여 대중은 그저 유권자로서 선거에 참여하고, 선거에서 뽑힌 엘리트들이 관료들을 통해 국가를 운영하는 제도가 민주주의인 것처럼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경제원리가 모든 삶을 지배하게 된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지금의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도 철저하게 비민주적으로 운용되는 부문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경제와 군대입니다. 이 둘은 다른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특히 회사와 군대라는 양 조직을 비교할 때 매우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곧 상명하복과 관료제라는 것이지요. 민주주의는 개인과 공동체의 자율, 자치에 의해 움직이는 것임에도 시민들이 일상의 대부분을 보내는 회사는 자율과 자치가 아닌 상명하복과 관료제가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시간보다 경제원리와 권위주의를 살아가는 시간이 더 많은 이런 삶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통령님이 아직 대권주자 중 한 명이던 시절에 저는 대통령님의 한 마디를 듣고서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 사람에게 투표할 수는 없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한 마디는 이런 거였습니다. “투표율이 낮고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 없는 것이 선진국이라는 증표이다. 국민이 정치에 관심이 많으면 갈등만 생기고 나라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국민들은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고 정치는 전문가들이 맡아야 나라가 제대로 움직인다.” 세상에 이런 주장을 백주대낮에 자랑스럽게 하는 사람이 대통령 후보로 나설 수 있는가 싶을 만큼 반민주적인 발언이었다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로 대통령님과 같은 그런 인식이 타이타닉 현실주의를 낳는 요인입니다. 정치인들이 “정치는 우리가 한다. 나머지는 시장원리에 따른다.”고 책임을 방기할 때, 대중들이 “우리는 그저 먹고 살기 바빠. 국가 운영은 전문가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라고 하면서 그 책임을 방기할 때 타이타닉 현실주의가 빙산을 향해 바다를 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항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가장 “실용적”인 것은 바로 경제가 시장원리에 따라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군대가 권위주의에 따라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율과 자치, 협동이라는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대중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삶을 기획하고, 미래를 준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자는 지금 곧바로 대의민주주의에서 직접민주주의로 제도를 전환하자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 아래에서부터, 대중들로부터 이러한 자율과 자치, 협동의 문화와 제도들을 만들어갈 수는 있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지면상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저자는 여러 가지 예를 통해 위기로 보이는 지금이 민주주의의 기회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대통령님이 집권하는 앞으로의 5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국회와 청와대를 보수주의 정치인들이 장악했다고 그저 우울해하고, 실망만 하는 바보가 되진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즐거운 일들이 제게는 많이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이제 대통령님과 싸울 것입니다. 대통령님이 주장하는 경제의 논리, 죽음의 논리에 맞서 저는 끈질기고 즐겁고 행복하게 제 삶을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렵니다. 당장 이번 주에라도 생활협동조합에 가입하고, 공정무역으로 들어온 커피를 마시며, 시시때때로 거리의 친구들과 연대하면서 민주주의를 살아보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실용주의를 믿쑵니까? 저는 참으로 믿쑵니다. 그 실용주의를 저는 민주주의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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