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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세상에서 평화를 살기 위하여 [복상2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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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로드 안쉰 토마스, 정신세계사 2007

준수야.

작년 가을 이후로 처음으로 네 이름을 이렇게 불러보는구나. 그 때 그렇게 싸우고 널 그냥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취직 준비로 바쁘다.”는 네 소식을 다른 이들을 통해 들을 때마다, 바쁜 것보다도 그 때 그렇게 널 몰아세운 나 때문에 결국 네가 모임에 나오기 힘들어진 것 같아 미안하구나. 씩씩한 너는 어쩌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괜찮아요, 형”하면서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때 우리가 다투었던 그 문제를 살피지 않고선, 너와 내가 겪었던 갈등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 같아 이 편지를 쓴다.

 

 

생각해보면 내가 문제였다. 확실히. 이제 갓 의경 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너에게 “어디 어디 출동했었냐?”,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군 생활 한 거냐?”라고 물었던 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질문 자체가 너에게 얼마나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지. 처음엔 그냥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다가 결국 “시위대한테 맞고, 끌려 다니는 동료를 보고 어떻게 눈이 뒤집히지 않을 수 있어요! 그래놓고도 결국 우리만 살인자들이라고 욕먹죠. 형은 이상주의자에 불과해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수십 명이 피를 흘리고 밟히고 미란다 고지도 없이 연행 당했어. 게다가 니네는 해산하고 돌아가려는 사람들까지 뒤에서 쫓아가서 방패로 찍었잖아!” 식으로 “누가 잘못했냐?” 논쟁을 벌이고 말았었지. 그리고 이내 네가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이에요. 나도 어쩔 수 없었다구! 안 그럼 내가 맞는단 말이야. 날 좀 이해해주면 안돼요?”라고 소리치며 뛰쳐나간 게 마지막으로 너와 나눈 대화가 되어 버렸구나.  

 

어떻게 이 폭력의 세계에서 구원을...
그래. 나는 너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었던 것 같아. 일부 최전방 부대를 제외하면 ‘실전’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군대에 비해 의경들은 매일같이 ‘실전’을 치루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로 인해 너와 너의 동료들이 엄청난 신체적, 심리적 부담과 이후에도 잘 아물지 않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는 걸 말이야.

 

그 동안 많은 고민을 했었어. 머릿속으로 수없이 너와 다시 대화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어떻게 말할까를 고민했다. 그냥 ‘젊은이들을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는 정부의 신자유주의젹 경찰국가 정책이 문제인 걸까. 그래 의경들도 불쌍한 피해자지…’ 라고 생각해보기도 했었어.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하고 마음을 회복하기엔 시위 현장에서 만나는 전/의경 개개인들의 마치 그 악마와도 같은 표정과 비무장한 할아버지들과 아주머니들에게까지 방패를 들고 달려드는 모습이 계속 떠올라 분노가 치밀어 오르곤 했단다. 그래서 나는 물을 수밖에 없었어. 도대체 이 문제는 어디서 출발한 것일까? 어떻게 해야 너와 나, 혹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런 폭력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걸까?

 

베트남 참전 군인이 성직자가 되기까지
그 때 읽게 된 책이 클로드 안쉰 토머스라는 이름의 미국인 스님이 쓴 <풀 한 포기 다치지 않기를>이라는 책이었어. 이 책을 읽으면서 네 생각이 나서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르겠다. 전쟁과 폭력의 세상 한 가운데 던져진 한 인간이, 평화를 향해 길고 긴 구도의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을 통해서 나는 드디어 나와 너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담과, 그 담을 허물 수 있는 길을 조금 알게 된 것 같아.

 

저자는 이 책의 첫 장서부터 담담하게 자신이 수백 명을 사살한 살인자라고 고백하고 있어. 그 살인자의 다른 이름은 바로 “참전 용사”야.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참전 용사”와 살인자. 우리에게는 너무나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름들이지만 저자는 다르지 않다고 말해. 더 나아가 저자는 마음에 분노와 복수, 폭력의 씨앗을 키우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살인자라고 말해. 마치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자는 살인하는 자다.”라고 하신 예수님처럼 말야.

 

저자는 베트남 참전 군인이었어. 그가 헬리콥터 부대의 기관총 사수가 되어 베트남에 배치되었을 때 그는 겨우 열아홉 살에 불과했다고 해. 거기서 그는 수많은 동료의 죽음과,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살인을 경험했어. 게릴라전을 벌이던 적군은 도저히 군인과 민간인이 구분이 가지 않았고, 때로는 합장하고 길을 가던 스님들(로 가장한 게릴라)이 갑자기 돌아서서 AK-47s 소총을 난사하기도 하던 그 전쟁은 그야말로 지옥과 다를 바 없었지. 그러나 그 속에서도 그는 살아남았고, 625회의 전투비행경력과, 수십 개의 훈장, 그리고 전투 중에 얻은 부상을 가지고 돌아오게 돼.

 

그러나 그가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이한 건 애국자들에 대한 감사와 환영이 아니었어. “공항대기실에서 한 아름다운 소녀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들어 숨을 내쉬었고, 내 여신의 환영 인사를 받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눈이 서로 마주쳤을 때, 그녀는 능숙한 솜씨로 내게 침을 뱉었다.” 당시는 반전운동이 미국을 휩쓸고 있던 시기였던 거야. 참전용사를 맞이한 미국인들 중 일부는 그들을 국가의 영웅으로 치켜세웠고, 일부는 그들을 살인자요, 전범으로 비난했어. 그리고 대다수는 자신들을 불편하게 하는 그들의 존재를 잊고 싶어 했어. 누구도 그들이 그 폭력의 현장에서 겪은 아픔과 상처를 이해하고 치유하려 하지 않았던 거야.

 

저자는 당시에 밤이면 트라우마로 인해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며 낮에는 술과 마약, 연애를 통해 그 악몽을 잊는 생활을 반복했다고 고백해. 때로 반전운동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그는 여기에서도 이용당하고 있다는 느낌과 “전쟁”과 다를 바 없는 평화운동에 대한 환멸을 느꼈어. 그 이후로도 그는 계속해서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을 찾아 헤맸지만 어디서도 평화를 얻을 수 없었다고 해. 어느 날 애인이 임신을 하게 되자 그는 가정과 아이가 자신을 구원해주리라 생각하여 결혼을 선택했어. 하지만 거기서도 결코 평화는 없었어. 그는 아이가 울 때마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자신을 덮쳤다고 해. 결국 그는 3년 만에 가정을 버리고 떠나게 돼. 그에게는 가정조차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었던 거야.

 

1983년이 되어서야 저자는 마약과 술을 끊게 돼. 그리고 열심히 베트남을 잊으려고 노력하며, 한 사람의 정상적인 시민으로 살아가려고 했지. 하지만 베트남은 그를 떠나가지 않았고, 굳게 억압되어 있던 전쟁에 대한 감정들은 갈수록 더 강렬하게 표면으로 새나왔어. 1990년 그의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그는 베트남 출신의 고승인 틱낫한 스님의 참전 용사들을 위한 수련회 프로그램을 소개받게 돼. 그러나 그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어. 그들은 그의 “적”이었기 때문이야. 그러나 그가 수련회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 사람의 한 마디가 그를 움직였다고 해. “우리는 누구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그가 목숨 걸고 지켰다고 생각한 동포들은 그를 거부했지만 그가 적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그를 받아들였던 거야. 불교 수행자이자, 평화운동가인 클로드 안쉰 토마스의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어.

 

정념, 혹은 하느님의 임재 의식
“우리는 누구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을 읽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 그렇구나. 나는 준수를 거절하고 있었구나. 나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약자를 향한 국가의 억압에 대한 분노가 마땅히 용납하고 받아들여야 할 한 사람을 거절하게 만들었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단다. 내가 두려워하고 분노하는 만큼이나 너도 그런 마음을 누군가에게 갖고 있었을 테고, 그 마음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대화를 시작했어야 하는데, 나는 그만 옳고 그름이라는 문제부터 꺼내버렸던 거야. 그제서야 내가 너에게 얼마나 미안한 일을 했는지 알 수 있었어.

 

수련회와 그 이후 이어진 틱낫한 스님과의 교류를 통해 저자는 온 마음을 다해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정념(正念) 수행”에 매진하게 돼. 이 수행을 통해 그는 그동안 피하기만 했거나, 혹은 그것 아래에 지배당하기만 했던 베트남전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 고통으로부터 조금씩 놓일 수 있게 되었어. 저자는 “정념”수행을 다른 말로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에 온전히 있는 것이라고 말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과거로부터 조건화된 행동이나 생각에 파묻혀 산다고 저자는 말해. 그래서 특히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들을 만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폭력적인 대응이나 거절, 혹은 마음을 닫아버리는 방식으로 대응한다는 거야. 하지만 정념이란 그런 과거의 습관을 떠나서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마음이야.

 

불교에서는 이 정념에 다가가는 방식으로 “호흡을 의식하기”를 가르친다고 해. 지금 내가 숨을 쉬고 있는 것에 집중함으로써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잡념들, 고통이 현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뀌고 변하며, 또 이미 지나간 것이라는 것을 명상하는 거야. 저자는 때로 깊은 명상 중에도 전쟁의 기억들이 존재할 때가 있지만, 그 기억에 집착하지도, 그것을 거부하지도 않음으로써 그 기억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말해. 그 기억 역시도 지나가고 있는 그의 모습이라는 걸, 없애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보며 받아들임으로써만 그 고통은 치유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거야.

 

나는 이런 정념과 마음의 치유에 대한 가르침에 불교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그 때는 무미건조하고 시시한 가르침이라 생각하고 덮어버렸던) “하느님의 임재 의식”에 대한 가르침이 생각났어. “나는 오늘도 프라이팬을 뒤집으며 하느님의 임재를 느꼈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때는 웃기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정념 수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매 순간 나의 과거와 죄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를 먹이시고, 또 내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 그래서 나의 일상의 모든 순간에 내가 나로써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호흡(성령)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닐까.  

 

생각해보면 나는 마치 예수님을 향하여서도 ‘옳고 그름’이라는 잣대만을 들이대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닮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옳고 그름 혹은 ‘기독교적인 것,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나누고 그런 분별의식 속에서 나온 어떤 법을 따라 사는 것을 참된 삶으로 여겼던 것 같아. 그런 나에게 예수님은 “법 제정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내가 순종하고 복종해야 할 어떤 존재로 다가왔었어.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기독교로 가장한 바리새 종교를 믿었던 거지.

 

예수님은 물론 정의를 말씀하시고, 사랑하라는 계명도 우리에게 주셨어.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법을 지킴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영을 자각함으로, 즉 내 안에 계신 성령님과 동행함으로써만 가능해지는 거겠지. 이것을 위해 ‘호흡’을 주시하는 건 그리스도인들이 불교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무엇보다 “성령”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나 헬라어 프뉴마는 둘다 ‘숨’이라는 뜻이 있거든. 불교인들이 매 순간을 지금 현재로서 살기 위하여 정념 수행을 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매 순간을 하느님의 임재 의식 속에서 고통과 폭력을 지켜봄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놓여나 매 순간을 진실된 평화의 삶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해.


 
누구나 자신의 베트남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그가 다녔던 순례 여행에 대해 쓰고 있어. 그는 정념 수행은 앉아서도 할 수 있지만 걸어가면서 할 수도 있다고 말해. 그는 미국과, 또 세계의 분쟁지역을 걸어가면서 수행을 하며 평화의 메시지를 나누었다고 해. 그가 군인으로 참전했던 베트남으로 돌아가 걷기 수행을 하던 모습과,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도처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미국을 가로질러 걸으며 평화를 전하는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야. 그가 이 순례여행을 통해서 깨달았던 건 바로 “누구나가 자신의 베트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어. 가정에서의 갈등 같은 것으로부터 넓게는 국가 간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그 고통과 폭력의 크기가 크고 작을 수 있겠지만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폭력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거야.

 

저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이야기하면서 안타깝게도 고통 역시 그러하다고 말해. 내가 고통 받고 있다면 남도 고통 받고 있다는 거야. 더 나아가 폭력과 고통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없다고 말해. 가해자도 사실은 고통 받고 있는 인간이라는 거지. 마치 그리스도교에서 원죄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저자는 우리가 고통의 연대성 속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해.

 

나는 여전히 약자들의 의견이 제대로 대표되지 않는 사회에서 그들이 거리로 나올 때 그것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경찰력에, 약자들의 폭력은 가혹하게 짓밟으면서 자본가와 그들의 하수인들이 약자들을 향하는 폭력에는 눈을 감는 그들에게 분노하고 있어. 그건 옳지 않아. 하지만 지금은 그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그렇게 행동하는 경찰들 역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걸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여전히 시위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전의경들의 악마 같은 얼굴이 떠올라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얼굴 역시 그들에게 조건화된 폭력의 드러남일 뿐이라는 걸, 그들도 참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걸 조금씩 받아들려고 해. 그리고 내가 그들의 악마와 같은 얼굴을 떠올릴 때 나도 역시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하느님의 임재 의식 속에서 알아가고 있어.

 

준수야.
아마도 다시 너와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면, 아마도 나는 여전히 같은 입장을 갖고 있을 거야. 하지만 이제는 그 ‘입장’보다 먼저 너와 내가 안고 있는 “베트남”과 조건화된 폭력의 문제를 먼저 꺼내놓고 서로의 안타까움을 받아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사실은 이 폭력의 세계 속에서 가해자이고 피해자라는 걸. 그리고 그것을 이겨나가는 힘이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호흡 안에 있다는 걸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라는 성서의 권면은 아마도 바로 이런 태도를 말하는 걸 거야. 우리 이제 다시 만나서 평화를 이야기해보자꾸나. 이제는 너와 함께 이 폭력의 세상에서 평화를 살고 싶어. 많이 미안하고, 사랑한다.

 

너의 책 읽어주는 친구, 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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