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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복상2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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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승준에게.

우선 축하의 인사를 전해야겠지? 고등학교 졸업 축하하고, 또 신학대학 입학 축하해. 그 고된 수년간의 입시지옥에서 드디어 탈출했구나. 중학교 때 소위 ‘좀 놀던’ 네가 고등학교 들어와서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를 아는 나로선 더욱 감격이 크다. 여하간 이제 잠시 대입을 위해 삶의 여러 모습을 돌아보지 못했던 시간으로부터는 안녕이니까 당분간은 그 기쁨을 만끽하면서 살길 바란다.

 

그런데 어쩌지? 삶의 기쁨을 만끽하라고 해 놓고 난 이 편지에서 승준이한테 또 ‘공부’ 이야기를 하려고 해. 제목부터 무시무시하게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라고 뽑아놓고 말이야. 제목에 놀랐다면 미안해. 저 충격적인 구호(?)는 나 역시도 처음 들었을 때 무척 놀란 말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과 대학생이 되는 너한텐 꼭 “공부 안 할 거면 죽어!”라는 학원선생님의 목소리로 들릴 것 같아 추가로 미안^^ 하지만 내가 말하는 ‘공부’는 네가 지금껏 해오던 ‘공부’와는 사뭇 다른 공부란다. 오히려 “삶의 기쁨을 가장 잘 만끽하는 방법”이랄까. 그러니까 공부하라는 말에 꼭 ‘낙담’이라는 연쇄반응을 보이진 말기 바래.

 

기독교 철학? 철학적 신학?
하지만 그 전에, 앞으로 네가 ‘주로’ 공부할 분야의 이야기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뭐, 신학교 간다 하니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 열심히 읽어라, 하루에 두 시간씩 기도해라, 편협하게 공부하지 말고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해라 등등.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주었을 거라 생각하고 난 어쩌면 남들은 거의 하지 않았을 그런 이야기를 네게 해 주려고 해.

 

너도 알다시피 난 두 개의 학교를 거치며 신학을 공부하고 있어. 내가 다닌 두 학교는 사실 그 색깔이 무척 다르단다.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지만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기독교 바깥 혹은 교회 바깥의 학문이나 세상을 대하는 학문적 태도의 차이였어. 학부 때에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는 아마도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걸 거야. 그리고 학교에 개설된 과목 중에 전통적인 신학이 아닌 다른 분야를 다루는 용어를 이야기할 때 “기독교 사회이론”, “기독교 철학”, “기독교 정치”, “기독교 음악”, “기독교 미술” 같은 이름을 붙였어. 뭐, 이런 용어들은 승준이한테도 꽤나 익숙한 표현들일 거야. 그런데 졸업 후 진학한 대학원에서는 비슷한 내용을 공부하면서도 사뭇 다른 이름을 붙이더라구. “사회학과 신학”, “철학적 신학”, “과학과 신학”, “미학적 신학” 이런 식으로 말이야.

 

네가 보기엔 두 학교가 어떤 점에서 다른 것 같니? 일단 “기독교”(혹은 신학)와 다른 것의 순서가 다르지?^^ 왜 이렇게 다른 이름으로 사회학이나 철학이나 과학을 다룰까? 내 생각엔 두 학교에서 “기독교” 혹은 “신학”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인 것 같아. 편의상 전자를 A대학, 후자를 B대학이라고 할게. A대학에서 “기독교”란 일종의 고정불변하는 실체와 같아. 그래서 “신학”이란 그 기독교를 충실히 재현하는 학문이고, 또 신앙인이란 이미 정해져있는 기독교와 신학의 입장에 서서 세상과 학문을 바라봐야 한다는 게 A대학의 이념이야.

 

반면에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B대학에서 “기독교”는 고정불변한 어떤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무수히 많은 외부적인 것들과 교류하기도 하고 또 투쟁하기도 하는 변화하고 움직이는 거야. 그래서 “기독교적 00”라는 개념보다는 “00과 신학”이나 “00적 신학”같은 식으로 신학과 여타 학문(혹은 세상)의 독립성과 함께 대화와 소통을 강조하는 거지. 신학이란, 또 신앙인이란 언제나 그러한 학문과 세상과의 교류 속에서 만들어 온, 또 앞으로 만들어 갈 열린 존재라는 거야.


공부는 삶의 가능성들을 열어젖힌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느냐면, 승준이의 공부는 이제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라거나,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서라거나, 혹은 좋은 신학대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같은, ‘목적을 위한’ 공부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야. 목적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는 건, 기독교나 신학 자체에도 해당되는 말이야. 기독교가 고정불변하는 실체라면 신학을 한다는 건 그저 그 기독교를 목표로 해서 그것을 재현하는 것, 혹은 주석달기에 불과한 공부일 거야. 그리고 학문이란 이 기독교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세상 학문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일이 될 거야. 난 근본적으로 이런 공부란 고등학교 때 답이 정해져 있는 걸 외워서 시험을 치루던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이런 공부는 아무리 해도 “삶의 기쁨을 만끽하는 방법”은 될 수 없겠지.

 

그러나 반대로 기독교도, 신학도, 그래서 우리의 삶도 열려 있는 것이라면 공부는 바로 그렇게 우리의 삶을 새롭게 빚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거야. 오늘 소개할 이 책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의 부제인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라는 말의 뜻은 바로 이러한 공부를 하라는 뜻이야. 정해진 교리나 삶의 방식 속에서만 존재함으로써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지 말고, 공부를 통해 항상 새롭게 삶을 창조하는 공부의 달인 혹은 호모 쿵푸스(‘공부하는 인간’이란 뜻의 신조어)가 되라고!

 

삶의 달인은 공부의 달인이다
이 책의 저자는 실제로 인문학, 사회학, 철학, 과학, 고전, 예술 등을 가로지르며 공부하는, 또 그 공부가 삶과 분리되지 않는 공동체를 실험하고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이야. 저자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공부에 대한 ‘통념’ - 공부와 학교를 동일시하고, 좋은 학교가 실력을 보장해주고, 공부에는 정해진 나이가 있다는 등의... - 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해. 그런 통념들은 근대의 교육제도가 만들어낸 거짓말이라고, 그런 공부로는 삶이 바뀌지 않는다고 말이야. 또 저자는 그러한 근대 교육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진 대안교육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야. 자율성이나 창의성을 강조하지만 정작 그것을 채울 내용과 삶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거야.

 

그래서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바로 “고전으로 돌아가자”라는 거야. 저자에게 고전은 단순히 옛날 책이 아니야. “고전이란 시대의 통념과 억압을 뚫고 삶과 사유의 눈부신 비전을 탐색한 전위적 텍스트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은 항상 미-래적인, 늘 새로운 얼굴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책이라고 말해. 신학도인 너와 나에겐 성서 역시 바로 이런 책일 거야. 물론 우리의 성서 읽기가 제도 종교 속에 구속당하지 않는다는 걸 전제로 할 때 말야.

 

그런데 이런 고전을 읽고 끊임없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 삶과 사유의 비전을 탐색하고, 삶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야. 많은 고전들이 또 어렵기까지 하거든. 그렇기에 저자는 앎의 공동체성을 강조해. 학교가 만들어 낸 나이의 환상을 넘어, 또 계급이나 성별 등의 구별의 논리를 넘어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고전을 읽고 토론해야 한다는 거야. 그것을 저자는 앏의 꼬뮌(commune)이라고 불러. 서로가 서로의 스승과 벗이 되어주는 공부의 공동체!

 

저자가 공부의 방법으로 특히 강조하는 ‘암송’과 ‘구술’도 바로 이 공부가 공동체적인 공부이기 때문에 그럴 거야. 저자는 암기가 지독히 개인적인 공부이며 하면 할수록 몸을 상하게 하는 방법인 반면에 암송은 공동체적이며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공부라고 말해. 소리를 통해 몸의 안팎이 연결된다는 점에서 항상 외부와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는 거지. 구술 역시 마찬가지야. 자신이 알고 있는 걸 이야기로 전달하는 구술의 능력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적이고, 하면 할수록 모두가 행복해지는 공부 방법일 거야.     

 

저자는 이렇듯, 책과 몸과 공동체와 세상이 하나의 차원에서 펼쳐지는 공부를 우리에게 제안하고 있어. 그리고 이런 공부에선 결국 책마저도 넘어서서 세상의 모든 것이 ‘공부’의 주제가 된다고 저자는 말해. 연애, 질병, 죽음, 먹고 마시는 것 등등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 공부를 통해 그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삶을 확장시키는 사람이 바로 호모 쿵푸스라는 거야.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있으니 꼭 책을 한 번 읽어보길 바래.

 

학교를 넘어 벗들과 함께
승준아. 사실 네가 들어가는 신학대학은 학교의 이념에 반하는 글을 쓰거나 이야기를 하면 징계한다는 내용의 학칙이 있을 만큼 좀 완고한 면이 있는 곳이야. 하지만, 너의 삶과 공부를 네가 다닐 학교와 교단에, 혹은 “기독교”라는 제도 종교에 그저 맡기고 살진 않았으면 좋겠어. 삶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니까.

 

앞으로 네 주변의 많은 분들이 너에게 대학졸업 - 신학대학원 3년 - 군목 갔다 와서 서울의 큰 교회에서 부목사를 하다가 개척하거나 청빙을 받는 “목회자 코스”나 중간에 해외 유학이 낀 “신학자 코스”를 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코스’들은 결코 네 삶을 매순간 창조하는 것으로서, 기쁨을 만끽하며 사는 것으로 만들어 주지는 못할 거야. 난 네가 몸과 마음을 열고 “천지에 가득한 책의 정기”(연암 박지원)를 호흡하며 살았으면 좋겠어. 대학에 진학하면 꼭 학교의 강의실 바깥에서 함께 책을 읽고, 더불어 삶의 길을 걸어갈 벗들과 스승들을 많이 만들길 바래. 그들과 함께 네 인생을, 너의 기독교를, 그리고 너의 세상을 한 번 멋지게 만들어가 보렴.

 

다시 한번 졸업과 입학을 축하하며. 승준이의 책 읽어주는 친구, 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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