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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평화와 용서가 승리하기를! [복상 212호]

달라이 라마․빅터 챈, <용서>, 오래된미래 2004



달라이 라마께.


한국어를 사용하는 서울 주민으로써 저는 지금 약간의 난감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건 2인칭 호칭에 관한 것입니다. 고민 끝에 저는 그냥 “당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한국어 어법에서 이 말이 존경의 의미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게 사실이지만, 제가 이 말을 할 때에 최대한의 존경을 담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달라이 라마와, 또 이 글을 읽는 독자 모두가 헤아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무엇보다 당신의 건강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전자의 것은 잘 모르겠지만, 후자의 것에 관한 한 당신은 지구상의 어떤 지도자들보다도, 또한 대다수의 종교인들보다도 더 높은 성취에 다다라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 상황은 안타깝게도 ‘평화’와는 거리가 많이 먼 것처럼 보입니다. 올해 초에 시작된 티베트에서의 봉기와 잔인한 진압, 그리고 뒤를 이은 세계 각지에서의 올림픽 성화 갈등들 속에서 몇 번이나 당신께서 망명정부 지도자의 자리를 내놓으려 하셨다는 것을 외신보도를 통해 들었습니다. 멀리에서도 갈등과 관련된 이들 모두를 향한 당신의 안타까움과, 그것을 넘어서는 자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긋난 만남

안타깝게도 저와 티베트, 그리고 티베트 불교와의 만남은 결코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고등부 때 근본주의 단체가 주관한 연합수련회 따위에서 만나는 티베트 불교는 부패와 무능으로 점철된 그런 집단일 뿐이었습니다. “티베트나 몽골, 중국 서북부는 왜 가난한가? 불교 때문이다. 그들은 부패하고 기득권을 놓지 않으며 미신을 조장한다. 우리는 그들을 복음으로 정복하고 그들에게 문명의 혜택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저에게 티베트를 알려준 선교사들의 설교 내용이었습니다.


2000년 경에 중국 서북부의 청해성에 단기 선교를 갔을 때 저는 처음으로 직접 티베트 불교의 승려들과 티베트족 사람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만남을 통해서도 제 생각이 변할 수는 없었습니다. “단기선교여행”이라는 배치 속에서 순박한 티베트족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이고, 라싸까지 오체투지를 하며 걸어가는 신실한 불자들은 “미신에 빠진 죄인들”이고, 오고가며 마주치던 스님들은 “사단의 종”일 뿐이었습니다. 그에 대해 우리는 가난과 미신의 땅에 복음을 들고 온 위대한 사역자인 것처럼 생각했었지요.


아마도 그 때 저의 인식이 전적으로 잘못되기만 한 건 아닐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 안에도 수많은 문제들이 존재하듯이 티베트 불교 안에도 문제점들이나 본래의 종교의 모습에서 일탈된 모습이 없을 수 없겠지요. 그러나 근본주의와 소제국주의가 결합된 제 인식은 티베트와 티베트불교의 장점과 선량함 까지도 폄훼하도록 하며, 티베트를 그들 자신의 관점에서, 즉 ‘내재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코 티베트의 신실한 불교도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들의 종교행위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우상숭배라고 편협하게 이해했을 뿐이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 세계 종교의 여러 모습들과, 또 불교에 대해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저의 지난날의 사고방식을 참 많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편협한 인식이 얼마나 많은 세계의 갈등과 폭력을 낳고 있는지!


상업적 기획의 한 복판에서 “진리”를 만나다.

당신의 친구인 중국계 미국인 빅터 챈이 쓴 이 책은 제가 그런 반성의 발걸음을 내딛게 해준 책 중 하나입니다. 저자와 당신과의 대화와 만남의 내밀한 기록을 담은 이 책을 저는 두 번 읽었습니다. 처음은 티베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근본주의자에서 막 벗어나려는 그 시점이었고, 그리고 이번에 티베트 민중의 항쟁을 보면서 다른 여러 자료들과 함께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읽었을 때도 많은 감동을 받았었지만 이번에 중국과 티베트와의 관계, 그 권력의 폭력성, 당신과 티베트 민중의 고통의 현대사를 어느 정도라도 공부하면서 읽었을 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이 사람은 이런 역사의 경험 속에서도 용서와 자비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장이 넘어갈 때마다 박혀 있는 아름다운 티베트 사람들의 사진이며, 상당히 내밀히 들여다본 당신의 사생활(?)의 모습들이며, 또 속도감 있고 맛깔난 문체 등은 이 책이 세심하게 기획된 상업적 작품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특히 한국에도 여러 권 번역된 바 있는 당신의 깊이 있고, 때론 난해한 강론들과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고백하건데 저는 정말 이런 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마 이 책이 무언가 읽을거리가 간절했던 그 때에 20% 할인 딱지를 붙이고 제 눈앞에 있지 않았다면 결코 사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을 통해서도 마음의 충격과 깊은 돌이킴의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건, 상업성을 뛰어넘는 당신의 인격과 삶의 모습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도저히 냉소할 수 없는 진리의 무게가 상업성의 껍질을 뚫고 제게 전해져 왔던 것이지요.


그 진리란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며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말 뿐이라면 그게 제게 감동을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께서 그 진리를 몸소 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실 때 마침내 그 진리는 ‘진리’가 되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삶에 다가가는 것일 테지요.


민족을 넘어 세계로

이 책에는 당신의 상당히 내밀한 수행 경험담이며, 병마로 쓰러졌던 몇 년 전의 모습, 또 많은 ‘인간적인’ 풍모 등이 가까운 거리에서 그려지고 있습니다만, 그런 것보다도 제게 상호의존과 용서의 가르침과 더불어 의미있게 다가왔던 것은 “세계인”으로서의 당신의 모습이었습니다. 망명 이후 당신께서 세계를 다닐 때마다 티베트 민중의 문제를 중심에 놓으셨다면 오히려 세계는 당신을 그토록 주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곳곳의 수많은 강론처에서 당신은 티베트라는 한 민족공동체의 지도자를 넘어 대중의 영적 스승의 역할을 감당하셨습니다. 전쟁과 폭력, 가난과 고통의 소식을 접할 때 마다, 그 일이 티베트의 일인지 아닌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슬픔과 자비의 마음을 보이시는 당신의 모습에서 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의 주된 관심은 티베트라는 국가나 티베트 민족에 있지 않습니다...... 티베트의 영적 전통을 보호하는 것은 단지 티베트 인들을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더 넓은 인류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형제 자매인 중국인들을 위해 필요합니다.”(114쪽)


안타깝게도 최근 중국은 더욱 더 그 반대의 길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전 정권에서 이어진 민족주의 교육을 받고 자라난 많은 젊은이들이 중화주의의 온/오프라인 폭력으로 정부의 티베트 탄압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중국의 젊은 세대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 높은 인권의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가진 것도 사실입니다. 당신께서 설파하시는 “공(空)”의 가르침의 위대함은 바로 무한한 변화를 긍정한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래적으로 폭력적이거나 평화로운 이들은 없다는 것을 저는 당신의 가르침을 통해 배웁니다. 지금 저렇게 폭력으로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이 언젠가는 다른 변화의 조건 속에서 평화를 옹호하는 이들로 변화될 수 있음을 기대합니다.


비폭력과 평화

저는 한편으로 이 책을 “기독교 정치”를 한답시고 총선에 나온 목사님들께 읽혀드리고 싶었습니다. “좌파정권의 뿌리를 뽑자.”, “동성애자들을 차별할 수 없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믿는다는 이들이 쏟아내는 증오와 폭력의 구호들을 들을 때마다 “중국인들의 존재 속엔 티베트인들이 있고, 티베트인들의 존재 속에 중국인들이 있습니다.”라는 당신의 말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50년대 후반에 벌어진 무수한 티베트 민중에 대한 학살과, 그 뒤로 계속된 식민정책을 바깥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당신께서 먼저 용서를 말하며 중국과의 공존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힘든 만큼 당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세계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지도 말입니다. 그 진정성의 무게만큼이나 “기독교 정치”를 한다는 목사님들의 가벼움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종교의 정치 참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신정(神政)조차도 특별한 맥락 속에서 긍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특별한 맥락이란, 그런 정치의 지도자들과, 함께 하는 민중들이 당신만큼의 영성의 무게를 가지고 있을 때란 생각이 듭니다. 종교인들이 세속의 사람들보다도 더 편협하고, 더 반인권적인 인식과 영성을 지니고 있다면 그들은 결코 그들에게 주어진 권력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그리고 무너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민중이 고통을 받아야 할지는 가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례를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너무도 많이 봐 왔습니다.


당신과 또 티베트 민중의 비폭력 저항은 그런 수천 년의 역사도 교정될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물론 모두가 당신의 비폭력과 상호공존 정책을 찬성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올해 초 결국 폭력적으로 터져 나온 봉기와 또 그것에 대한 더 큰 폭력적 진압은 우리에게 많은 슬픔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여전히 많은 티베트 민중들은 용서와 비폭력으로 중국의 제국주의적 폭력에 저항하고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중국 측에서 대화를 재개하기도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길 기대합니다. 당신의 평화와 용서가 폭력에 승리하기를!


이 책을 읽으며 한편으로 감동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아파옵니다. 그건 아마도 현재 한국 교회의 천박한 영적 수준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저 또한 그 꼴을 빚어가는 데에 일조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디 한국 교회가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를 치유할 희망의 메시지를 몸으로 살아낼 수 있는 영성을 갖추기를 간절히 고대합니다. 언젠가 꼭 한국에 방문하셔서 우리에게도 귀한 가르침을 나누어 주실 수 있게 되길 희망합니다.


평화를 기원하며, 당신의 책읽어주는 친구 김강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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