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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주의의 무능력을 넘어 [복상2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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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구 김병수 한재각, <침묵과 열광>, 2006

이 교수님.

 

이른바 <황우석 사태>가 한국 사회를 휩쓸고 지나간 지도 2년여가 흘렀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여전히 간간히 "원천기술"을 들먹이며 연구 재개를 노리고 있고, 그 주변에서 알짱대던 많은 이들은 입을 다문 채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몇몇 언론인들과 칼럼니스트들만이 반성을 했을 뿐, 정작 책임져야 할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 테크노크라트들, 지식인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냥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년이 지난 지금, 노무현 대통령만큼이나 황우석 박사를 사랑했던 정치인 이명박 씨가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있습니다. 저는 요즘 "~~하면 뭐하나, 경제만 살리면 되지"라는 유머로 상징되는 작금의 대중의 정서가 황우석 사태 때와 참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대학을 자율화시켜 수천만원의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는 가난한 학생들이 진학을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 되던, 자사고와 특목고를 늘려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지옥에 시달리게 만들던, 영어 몰입교육이니 해서 전국민을 영어 능력자와 무능력자로 일치감치 갈라놓던, 건강보험을 무력화시켜 수술 한 번에 한 집안이 박살나는 상황이 일반화되건, "경제만 살린다면", "국가 경쟁력만 키운다면" 괜찮다는 게 여전히 이명박 당선자를 80%가까이 지지하는 대중의 정서인 것 같습니다.

 

황우석 사태 때도 그랬습니다. 증거를 찾아가며 조목조목 황우석 박사 연구의 문제점을 지적한 PD수첩이 네티즌들과 광고주들의 폭격을 맞고 프로그램 자체가 없어질 뻔 했던 걸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이미 황우석 박사의 연구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투성이고, 원천기술도 없었다는 발표가 났음에도 "그에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주자"는 여론이 60%를 넘나들던 것도 기업납니다. 황우석이나, 이명박이나 대중들이 바라는 건 그들 자신이라기보다는 그들을 통해서 자신들이 누리고 싶은 '환상'인 것 같습니다. 대중이 대면해야 할 실재란 건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끊임없이 환상을 갖지 않고서는 더 이상 살아가기 힘든 세상, 그게 작금의 한국 사회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 도덕주의의 무능력
이 교수님, 제가 이 교수님께 이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것은 바로 그 이명박 당선자를 지지한 모 기독교 단체에 교수님의 이름이 올라가 있어서였습니다. 저는 그걸 뒤늦게야 알았지요. 학부 시절에 누구보다도 생명 윤리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쏟아내던 교수님, 황우석 사태 때도 일관되게 "배아는 사람이다. 실험의 도구로 삼아선 안 된다."는 근본주의 기독교의 생명윤리를 고수하던 교수님이 어떻게 황우석 사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이명박 신드롬에는 그토록 쉽게 합류할 수 있었는지 저는 의문이었습니다.

 

황우석에 대한 비판과 이명박에 대한 지지. 교수님뿐만 아니라 많은 보수주의 기독교의 오피니언들이 택한 이 모순되어 보이는 길 속에서 저는 기독교 보수주의(혹은 복음주의)의 무능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도덕주의"의 무능력입니다. 저는 윤리를 사람 사는 사회의 한 복판, 그러니까 "정치"와 "경제"의 차원과 함께 생각하지 못하고, 추상적이고 규범적인 "도덕"수준에서밖에 사유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오늘날 이 교수님과 같은 "선한 마음을 가진 이명박 지지자"들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윤리와 같이 규범적 수준에서 다루기 쉬워 보이는 부분에 관해서는 비판을 해 낼 수 있었지만, 복잡한 수준으로 얽힌 사회적 관계를 읽어내야 할 대선이라는 장에서는 비판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이명박 정부의 결과는 앞서 언급했듯이 대중의 삶이 총체적으로 어그러지고, 일단의 환상들이 진통제 역할을 하며 전면화되는 상황일 것입니다.(아마 그 최악의 경우는 파시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상황에서 다시금 황우석 사태를 되짚어보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소개할 이 책 <침묵과 열광-황우석 사태 7년의 기록>을 통해 저는 황우석 사태를 도덕이 아닌 정치의 관점에서 볼 수 있었던, 그래서 지금의 상황 속에서도 유의미한 문제제기를 던질 수 있을 저자들의 작업을, 결국 당시에도 의미 있는 실천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지금에 와서는 주류적 삶을 재생산(그 결과로 대중의 피폐한 삶을 재생산)하는데 빠져버린 기독교의 도덕주의와 비교해보고자 합니다.

 

과학기술동맹의 "침묵", 대중의 "열광"
이 책이 처음 구상되고 집필에 들어갔던 건 PD수첩의 보도로 말미암아 황우석 사태가 전면화되기 몇 달 전이라고 합니다. 저자들이 오랜 기간 황우석과 그 주변의 권력관계 - 저자들은 이것에 "과학기술동맹"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 를 감시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과학을 전공하고 각각 언론과 시민단체, 정당에서 과학 분야의 정책과 비평을 생산하던 이들입니다. 이 책이 나오기 이전, 아니 황우석 사태가 터지기 이전부터 이들은 지속적으로 황우석 연구의 문제점들을 지적해 왔습니다.

 

황우석 사태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를 통해 저자들이 내린 결론은 "침묵"과 "열광"이었습니다. 즉, 대중의 "열광적 지지" 뒷면에서 과학기술의 자본화와 권력화를 "조용히" 진행시켰던 황우석과 과학기술동맹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이 책의 주된 내용입니다. 기독교 도덕주의자들의 개입이 "배아도 인간이며, 인간을 죽이는 건 살인이다."라는 추상적인 규범윤리의 수준에서 황우석 연구에 개입할 때, 이들은 처음부터 그 연구의 정치성을 묻고 있습니다.

 

이 책은 황우석 박사의 연구실 내에서의 권력관계, 황우석과 관련된 언론과 정치인들의 태도, 생명공학과 의료시장화의 관계에 대한 연구, 연구비 지원의 불평등성, 대중의 열광과 민주주의의 후퇴 등의 문제를 구체적 자료와 함께 독자들에게 보여줍니다. 거짓말 등으로 나타난 연구 윤리 문제나, 배아 사용의 문제점 등도 지적하고 있지만 이 역시도 추상적인 수준이 아니라 여성과 환자의 인권, 거짓을 재생산하는 정치적 구조의 문제와 함께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7년간에 걸친 황우석 박사 연구의 부침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현상을 읽어나가면서 황우석 문제가 추상적인 생명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모종의 방법으로 통제하는 권력과 자본의 작동원리에 대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연구와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엘리트들에게 생명에 대한 규범을 가르친다고 될 일이 아니라, 엘리트들의 과학기술 독점 자체를 근본적으로 반성하고 대중들이 과학기술에 대한 접근권을 영유함으로써 아래로부터 윤리적 과학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인 대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위가 아니라 아래에 계십니다.
저자들의 작업과 비교할 때 기독교계 전반의 대응은 철저히 무능했습니다. 보수주의자들은 배아도 인간이라는 견해를 확산시키지도 못했고, 황우석 연구의 문제점을 폭로하는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해내지도 못했습니다.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KNCC의 상층부 또한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배아도 사람이라는 교리 대신에 '약자인 환자 옹호'라는 도덕관념을 근거로 황우석 박사의 연구를 제한적으로 지지하기까지 했습니다. 아주 소수의 기독교 그룹만이 황우석 신드롬에 대한 정치적이고 포괄적인 담론을 생산해냈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습니다.

 

도덕주의는 왜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을까요. 도덕주의는 근본적으로 위로부터의 윤리적 접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경우라면 하느님의 명령, 세속적으로는 정언 명령에 입각한 복종적 행위가 바로 도덕주의자들의 삶의 길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위로부터의 사유는 정치적 문제를 사유함에 있어 빈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권력자들이, 정책결정자들이, 엘리트들이 하느님의 명령 혹은 도덕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도덕주의의 정치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입니다. 위에 계신 하느님이 의로운 명령을 내리는 분이시듯이, 세속에서도 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 의로운 명령에 따라 아랫사람들을 잘 이끄는 것이 도덕주의 정치의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배아도 인간"이라는 규범에 따라 황우석을 비판했던 교수님과 보수 기독교의 지식인들이 이명박으로 대표되는 한국사회 주류의 흐름에 동참하게 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교수님들께선 이명박과 주류세력이 "도덕적으로 행하는 것"(교수님이 그 단체에 참여할 당시엔 BBK의혹 등이 터져나오기 전이었죠.)이 대한민국이 긍정적으로 나아가는 길이라 생각하고 그 길로 나아가셨을 거라 추측해 봅니다. 또 이명박 당선자가 교회 장로라는 것도 교수님의 희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게 아닐런지요.(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주류도, 혹은 어떤 '위'도 자기 자신의 도덕적 결단에 의해 의로워지거나, 하느님과의 개인적 만남을 통해 "올바른 정치"를 하진 않습니다. 신실한 종교개혁자인 루터와 칼빈도 농민에 대한 잔혹한 진압과 정적의 숙청과 공포정치라는 권력의 길을 걸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가까이로는 매일 기도하며 살아간다는 미국의 부시대통령이 인가한 수만 명의 죽음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위"의 회개와 도덕적 각성을 기대하는 도덕주의자들의 실천은 현실에서는 무능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이 추상적인 도덕의 수준에서 실천을 논하지 말고, 대중의 구체적인 삶과 정치의 장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하느님 자신이 그런 분이 아닙니까? 제가 아는 하느님은 위에서 명령만 내리고 계신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역사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역사하시며, 심지어는 "사람"이 되어서 역사의 장, 정치의 장 안에서 직접 살아가기도 하신 그런 분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 예수는 바리새인들처럼 도덕을 설하는 지도자로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 촌사람으로 태어난 예수는 끝까지 갈릴리와 이스라엘의 민중들과 함께 행하셨으며, 그 결과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도덕주의를 넘어서 정치로
저는 교수님께서도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인 성서의 사회적 비전을 가지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사회는 "위"의 회개와 반성으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비전은 "헬라인과 종과 여자"들, 그리고 그들의 하느님의 끈덕진 정치적 저항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 인권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실천이란 스스로 "헬라인과 종과 여자"가 되어 "유대인들과 자유인, 남자만의 세상"을 만들려 하는 "위"에 대한 저항의 삶이 아닐까요.

 

황우석 신화는 2년 전에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신화는 주인공을 바꿔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신화에 대응하기에 도덕주의는 너무나 무능력합니다. 저는 지금이야말로 저와 교수님을 비롯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에서 정치로" 실천에 대한 견해를 대폭 수정해야 될 때라고 생각합니다. <침묵과 열광>의 저자들은 황우석 사태를 추상적인 도덕의 관점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태의 여러 구체적인 측면들을 제대로 분석하고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을 나름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총선이 멀지 않았습니다. 교수님과 같이 실력을 갖춘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주의를 넘어서 민중들 속에서 민중의 삶을 위한 정치적 대안을 제시해주시길 기대해봅니다.

평화를 기원하며, 교수님의 책 읽어주는 친구, 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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