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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8/17
- 구 좌파와의 논쟁, 그리고 기독교...(1)
1.
때때로 구좌파와 논쟁을 벌여야 할 때가 있다. 최근엔 촛불집회와 관련해서 쓴 몇 편의 글 덕에 그럴 기회가 전보다 자주 있었다. 그들과 논쟁을 할 때면 그 내용보다 그네들의 논쟁 방식에 많은 관심이 가곤 한다. 그들의 논쟁 방식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1) 상대방의 이야기 자체를 반박하기보다는 상대방을 카테고리화 한다. 이를테면 “그런 주장은 아나키즘이다.”, “자율주의다.” 식으로 상대방에게 범주를 부과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상대방의 주장이 아니라 “아나키즘”과 “자율주의”를 비판한다.
2) 그러면 그게 그 사람에 대한 비판이 된다고 믿는다. 즉, “당신의 주장은 아나키즘이다. 아나키즘은 이러이러해서 틀렸다. 그러므로 당신의 주장도 틀렸다.” 라는 식이다.
3) 이들이 이런 식으로 논쟁을 하는 이유는 안으로는 자신들의 교조를 사수하기 위해서 -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 이며 밖으로는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이다. 즉, 상대방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듣지 않고 어떤 “주의”의 교조로 환원한 후, 자신의 프레임에 집어넣고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방식으로 그 “주의”를 비판한다. 자신의 프레임 속에 있는 한 그 논쟁은 이길 수밖에 없는 논쟁이 된다. 그들은 이김으로써 자신의 교조와 자신(의 공동체)을 지키려 한다. 가장 황당하고 안타까운 경우는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논쟁을 하게 될 경우인데, 이들은 자신들이 스탈린주의자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 역시 그런 식의 논쟁을 멈추지 않는다.
고백하건데, 사실 나도 이런 방식의 논쟁에 꽤나 익숙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전에 근본주의적인(혹은 복음주의적인) 기독교인이었고, 통상적인 기독교의 “변증”(혹은 그에 이어지는 전도, 선교)은 바로 구좌파의 논쟁과 똑같은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전도에 있어 자신들이 상대방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위한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비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느끼는 건(최근 이에 대한 흥미로운 책이 출간된바 있다.)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조차도 그들을 이기고, 자신들의 교조와 공동체에서 한 치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것이다.
2.
대화란, 혹은 논쟁이란 무엇일까? 난 어느 시점에서 내가 해오던 논쟁이 나를 정말로 피폐하게 고갈시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엇보다 그건 내가 계속해서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고, 그래서 하나도 성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논쟁을 하면 할수록 반짝거리는 “승리감”과, 내가 “진리” 속에 있다는, 또 그 진리를 공유하는 “공동체” 속에 있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이내 그 안도감은 권태와 피로로 바뀌어갔던 것이다.
한동안 무력감 속에 빠져있던 나는 근본주의적 기독교 대학을 졸업한 이후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논쟁의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화되기 위해” 논쟁을 한다는 것이었다. 즉, 그곳에선 상대방을 논파하고 내가 가진 교조(혹은 진리, 혹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논쟁을 통해 즉 상대방 주장과의 “마주침”을 통해 이전의 나와는 다른 나를 생산해내는 것이야말로 “논쟁의 이유”였던 것이다. 이후로 나의 논쟁방식에 있어 가장 크게 바뀐 것은 상대방의 논리를 교조로 환원하지 않고, 그 사람의 주장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의 주장 속엔 지금의 나와는 다른 나를 만들어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어디에서 반짝이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물론 근본주의자들과 그런 논쟁을 벌이기는 여전히 참 힘들다. 좋은 논쟁 상대방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
이전과 끊임없이 다른 나를 창조해가며 살아가는 것! 그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많은 이들이 사람을 이렇게 성장시키는 것을 내용(“진리”같은...)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형식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사실 “근본주의자”란 “근본주의 교리”라는 내용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주의 교리를 “지키려고만 하는” 그래서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이다.
3.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까닭은 최근에 SBS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 방송 이후 기독교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한기총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자유주의적” 신학을 가진 교회나 신학자에 대한 이단사냥이 시작될 것이란 흉흉한 소문도 떠돌고 있다. 어쩌면 교회보다도 더욱 더 바깥 세계와의 마주침을 피하고만 있는 강단 신학계는 별다른 저항 없이 동료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사냥하라는 교회의 명령에 굴복할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동일성을 지키려고만 하는 사람이나 공동체는 결코 성장할 수 없다.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노화한다는 것이고, 결국은 죽음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는 매우 다의적인 의미의 선언을 했을 때 그 의미들 중 하나는 바로 이런 “동일성 속에서 죽어가는 기독교 서구 사회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국 교회도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으리라.
한편 니체는 “역사상 오직 한 사람의 기독교인만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에게 예수는 바로 기존의 동일성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유대교 공동체의 “타자”였다.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의 선언은 어쩌면 “내용”(진리)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마주침”이라는 “형식” 속으로 들어가라는, 그리하여 너의 기존의 모습에, 교조라는 동일성에, 너를 붙들고 있는 공동체에 안주하지 말고 그 바깥으로 나오라는 선언일 지도 모른다.
4.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성서는 말한다. 나는 근본주의자들이(그리고 구좌파들도) 자신의 삶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자신의 과거의 삶이 아니라 미래의 삶을 말이다. 자신의 교조와 공동체와 동일성 속에 안주하며 죽어가기보다, 두려움을 물리치고 자신의 바깥과의 마주침을 통해 새로운 삶 속으로 들어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자신의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과의 대화, 혹은 논쟁은 바로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다. 논쟁을 하는 이유는 상대방을 이겨서 나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상대방도 변화하고, 나도 변화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 약간의 공간적 비약을 하자면 -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함이다. 사실 “바깥”은 혹은 “세상”은 그들의 생각보다 별로 무서운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적보다는 친구가 많은 편이 한세상 살아가기에는 더 즐겁고 좋은 법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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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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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함께를 트로츠키주의자로 부르는 것을 알면 트로츠키는 정말 화낼듯. -_-;;외부와의 첫 마주침을 어떻게 시작할까요... 정말 어려운 문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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