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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23
    [복음의 (비)본질] 연재를 시작하며...(2)
    김강

[복음의 (비)본질] 연재를 시작하며...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만드는 잡지 <나름>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NaarM 연재 - 복음의 (비)본질


복음의 (비)본질


김강기명_blog.jinbo.net/minjung



“……마치 이방인이란 우선 제일 먼저 질문을 하는 사람, 또는 사람들로부터 첫 질문을 받는 대상이 되기라도 하듯이. 마치 이방인이란 물음으로-된-존재, (혹은) 물음으로-된-존재의 물음 자체, 물음-존재 또는 문제의 물음으로-된-존재이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방인은 또한 첫 물음을 제기하면서 나를 문제선상에 올려놓는 사람이다.”

  -자크 데리다, 『환대에 대하여』, 강조는 필자



1.

『나쁜 그리스도인』이란 책이 있다. 기독교 전문 리서치 그룹인 “바나 그룹”이 미국 사람, 특히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인식에 대해 심층적으로 조사한 책이라고 한다. 서점에서 책을 집어 들고 몇 부분을 훑어가며 읽는 중에 다음의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젊은 외부인들은 보통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의도로 그들에게 ‘전도’하려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타인을 한 인간으로서 바라보고 진심어린 관심을 가질 줄 모른다는 것이 외부인들의 생각이다…… 젊은 외부인들 중 3분의 1만이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에게 진심으로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다(34%).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 중 64%가 자신들의 노력을 진심으로 여겨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놀라웠다. 솔직히 말하면, “젊은 외부인들” 쪽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쪽이 놀라웠다. 무려 64%가 자신의 행위를 진실한 노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니!



2. 

나는 이 글과, 이후 이어지는 글에서 “복음의 (비)본질”에 대해 와구와구 떠들어볼 생각이다. “(비)본질”이라는, 아마도 글로써만 말해질 수 있을 이 단어를 굳이 풀어 써 보자면, “복음의 본질은 그것의 비-본질에 있다.”, 혹은 “복음의 본질 따위는 없다.” 정도가 될 듯하다. 이것은 통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복음에 대한 생각과는 정반대의 생각이다. “복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 아닌가? 아니, 세상의 모든 것들이 본질이 아닌 허상이라 할지라도 복음만큼은 가장 본질적인 것이어야 하지 않은가? “상황”은 변해도 변하지 않는 본질로서의 “복음”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 나는 지금 그런 생각에 반기를 들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기독교가 겪고 있는 커다란 소통의 문제, 말하자면 “우리는 진심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데 저들은 우리의 진심을 몰라주고 우리를 핍박한다.”와 “저들은 저들의 교리와 신념으로 나의 삶을 공격하고 있다.”가 부딪히는 이 상황의 근본에는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주의”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라는 철학자가 말했다. 이방인은 “물음-존재”라고. 그리고 이방인은 ‘나’에게 “질문을 제기하면서 나를 문제선상에 올려놓는 자”라고. 그는 ‘만남’이라는 문제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진정한 만남은 언제나 지금의 나를 문제시하지 않고서는, 즉 만남을 통해 내가 바뀌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이방인”은 공히 공포를 느끼고 있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신념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면서 나를 바꾸려고 한다.”는 공포를 느낀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는 것 외에 다른 만남을 가진다면 그들은 내 복음의 본질마저 훼손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후자가 훨씬 더 문제인데, 왜냐하면 “이방인”들의 경우, 그들은 정말로 ‘사실’을 느끼고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본질”이라는 ‘허상’으로 인해 그러한 공포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3.

“복음의 본질”이 ‘허상’이라구?!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복음은 아무런 문제가 없고, 그 복음을 제대로 ‘상황’ 속에서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욕을 먹는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문제는 “복음”에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으면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갖게 되고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내용이 대표적일 것이다. 조금 더 ‘진보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느님 나라의 교훈을 실천함으로써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을 ”복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복음은 이런 “내용적 규정”으로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것일까? 진정 복음의 복음됨은, 즉 복음의 ‘본질’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 권위주의, 본질주의로 상징되는 “위에서 아래로”의 형식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돌파하는 “아래에서 위로”의, 혹은 “바깥으로!”의 형식이야말로 ‘복음’인 것은 아닐까.


나는 ‘개혁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근본주의를 가르치는 신학대학을 다녔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 탈출하다시피 졸업한 후, 나는 에큐메니컬 쪽의 학교로 진학했다. 교회도 옮겼다. 그런데 놀랍게도 둘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양자 모두 엄숙하고 진지했다! 그리고 양자 모두 목사님과 ‘어른들’이 언제나 공동체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양자 사이에는 단지 세련됨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전자는 “영혼구원”의 복음으로 성도들을 위에서 아래로 누르고 있었고,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으로 성도들을 위에서 아래로 누르고 있었다. 게다가 한국교회 전체로 보면 진보적인 교회가 소수여서 그런지, 연고주의, 학벌주의, 텃세 따위가 보수교회보다 오히려 더 심하기까지 했다. 이런 경험 속에서 나는 복음이 ‘내용’이 아님을, 그것은 하나의 ‘형식’임을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4.

이것은 결코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말한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예수에게 있어 하느님 나라를 보는 것은 어떤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거듭남”이라는 형식의 문제였다. 하느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 니고데모는 바리새주의라는 교조에서 기독교라는 다른 교조로 넘어갈 것이 아니라 ‘교조 자체’로부터 벗어나야(거듭나야) 했다. 복음이란 바로 이런 것 - 다른 내용을 가진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되는 것 - 이다.


구약은 다를까? 그렇지 않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일찍이 구약성서의 주제를 “탈-향(脫-向, aus-auf)”으로 제시한 바 있다. 그것은 구약사상의 근원이 출애굽의 정신에 있다는 데에 착안한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구약성서의 정신은 무엇보다 기존 질서로부터의 탈출이다. 구약성서 전체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탈-향을 멈출 때마다, 안락한 삶 속으로 들어가려 할 때마다 그들은 타락하며, 그 때마다 예언자들의 가혹한 비판이 그들을 새로운 탈-향으로 끌고 가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복음을 어떤 정해진 ‘내용’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그 ‘내용’을 해석해줄 권위를 항상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해석과 결론에 입각해서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 때에 우리는 탈-향을 멈추고, 거듭남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든, “성서한국”이든 마찬가지이다. 복음의 ‘본질’은 그 모든 ‘본질(주의)로부터의 탈주’에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존재로 빚어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복음이다. 복음의 ‘내용’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러한 탈주와 거듭남의 도정 속에서 잠시 머무는 거처에 불과한 것이다.


복음을 이렇게 사유할 때, 세상의 ‘이방인’들은 우리에게 목사님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일 수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며 우리의 “기존 질서”를 문제시하는 존재가 아닌가?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교조와 공동체의 논리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존재로서 거듭나게 할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아닌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이야말로 거듭남의, 탈-향의 ‘형식’ 속에서 끊임없이 기존 질서를 문제시하는 “이방인”이 아닌가?


이후의 글에서 나는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역사, 그리고 오늘의 현실을 좀 더 검토해가면서 복음이 (비)본질임을, 그리하여 구원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도,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도 아닌, 매 순간 ‘이방인들’과 함께 새로운 존재로 빚어져 가는 것임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어떤 이들에겐 이 연재가 매우 불편한 것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예수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어찌하여 너희는 옳은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눅 12:57)고 말이다. 이 글을 읽고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는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인 것이다. 부디, 이 글이 하나의 “이방인”이 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빚어내는 마주침들이 끊이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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