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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23
    다크나이트: 선악의 저편 (쓰다 만...ㅡㅡ;)(2)
    김강

다크나이트: 선악의 저편 (쓰다 만...ㅡㅡ;)

 

배트맨이 설정한 선/악의 구도 속에서 <다크나이트>를 보는 건, 그래서 영웅이지만 영웅으로 살 수 없는 배트맨을 안타까워 하면서 영화를 보는 건 8000원 중 절반을 그냥 날리는 일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배트맨이 설정한 선/악의 구도를 뒤집는 이면의 <다크나이트>를 사실상의 중심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면의 <다크나이트>만을 볼 때 이 영화는 사실 노골적인 네오콘 찬가라 할 수 있다. 고담시의 평화와 질서(=선)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악)의 위협에 맞서 굴복하지 않고 묵묵히 노력하는 배트맨의 모습은 911 이후 미국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는 시민들로부터 미움을 받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라는 좌절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분연히 테러와 맞선다. 그의 극단에선 테러리스트는 곧 원초적 혼돈의 이미지, 바빌론 신화의 티아마트처럼 보이는 조커다. 그는 어떤 요구나 욕심에 입각하지 않은 "악" 그 자체로 표상된다. 알프레드의 회상에 나오는 버마의 강도들처럼 그는 "그저 재미로" 테러를 저지르는 존재다. 사실 이러한 인상은 네오콘이 주장하는 테러리스트 표상과 흡사하다. 그들은 단지 미국이 싫어서, 혹은 '악'이라서 테러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이 필요하다. 때로는 희생이 있을 지라도 - 민간인이 죽거나, 일상적인 도/감청이 행해지거나 하는 - 악과 싸울 누군가가 필요하다. 너희는 우리를 욕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할 일을 해야만 한다. <다크나이트>로서.


그러나 이러한 표면의 <다크나이트>를 "이면의 <다크나이트>"가 끊임없이 침식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이면에 있다. 이 이면의 스토리를 읽어 내기 위해서는 세심한 시선이 필요하다. 베트맨이 말하는 것의 이면, 알프레드가 말하는 것의 이면, 고든이 말하는 것의 이면을 읽어 내는 능력, 조커의 말을 "선/악의 저편"(니체?)에서 있는 그대로 읽어내는 능력, 그리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 것을 화면 속에서 읽어내는 능력. 그것이 요청된다.


이 이면의 <다크나이트> 속에서 배트맨은 선/악의 구도 속에 사로잡힌 강박증 환자다. 배트맨 뿐만 아니라 고담의 지배자들(왜 그들이 "지배자들"이라는 것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가? 시장, 경찰, 검사, 그리고 재벌 - 우리가 아는 그들은 이명박, 어청수, 이건희 등등이 아닌가!) 모두가 강박증 환자다.(물론, 이들 개인보다는 집단적인 차원에서 그렇다.) 그들은 "선"에 집착하는데, 사실 그 "선"이란 결국 고담시의 "(위계)질서"인 것이다. "질서=선"의 이 논리에 계급과 인종이 끼어들 여지란 없다. 즉 고담시의 '범죄자들'이 할렘과 게토에서 비참한 삶을 영위하는 흑인-이탈리안-스패니쉬 등을, 그리고 무엇보다 "가난한 자"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질서를 교란하는=선을 무력화시키는 악일뿐이다.


(판사와 경찰총장이 흑인인데 인종주의라고 말할 수 있느냐 물을 수 있겠는데, 탈근대의 신-인종주의는 "피"가 아니라 "문화"에 기반한 인종주의라는 점에서 근대의 인종주의와는 구분된다는 점을 말해야 하겠다. 즉 "피가 더러운 흑인"이 아니라 "미국의 문화와 질서에 동화되지 않는 이질적인 그/녀"가 인종차별의 대상인 것이다.)


-완성 하지 못할 가능성 90%라 그냥 올림

-여하간 조커가 창조적으로 파괴한 "선/악의 구도" 혹은 "(위계)질서"의 저 편에서 "선"이 아닌 "삶"(선상의 시민들과 죄수들이 보여준)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게 "이면의 <다크나이트>라고 본다는 글을 쓰려는데 잘 안써지는군요.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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