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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15
    [다지원강의안] "대중이 운동권을 구원하리라" 1
    김강

[다지원강의안] "대중이 운동권을 구원하리라" 1

1. 바둑과 장기의 싸움


지난 8월 15일에 수유+너머에 손님으로 오신 일본의 사카이 다카시1) 선생님을 모시고 집회에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도 경찰은 체포전담조에 페인트를 동원하여 진압작전을 펼쳤고, 시위대는 게릴라 시위를 전개했었습니다. 다음날 세미나 때 사카이 선생님이 촛불 집회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며 “마치 바둑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얀 우비를 입은 시위대와 까만 진압복을 입은 전경이 바둑의 흑과 백의 돌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게릴라 시위의 모습이 전선이 분명하지 않은 바둑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에 나오는 개념, “바둑의 매끄러운 공간”과 “장기의 홈 파인 공간”을 염두에 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아, 왜 이 좋은 예를 생각하지 못했을까?”하는 생각에 무릅을 쳤었습니다. 이번 촛불봉기에서의 대중과 운동권, 그리고 국가를 이야기함에 있어 “바둑”과 “장기”만큼 적절한 비유가 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말하자면, “바둑”처럼 펼쳐지는 대중의 봉기를 범국민대책위를 비롯한 운동권은 장기의 형태로 바꾸려 했다는 것, 그리고 본래는 국가의 것인 장기의 모습으로 운동이 변해감으로써 대중의 생성하는 힘이 봉쇄되었다는 것, 그것이 오늘 제가 하려는 이야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 개의 고원》에서 장기와 바둑에 대한 이야기는 국가장치와 전쟁기계를 비교하는 12장 <1227년-유목론 또는 전쟁기계>의 전반부에 나옵니다. 장기와 바둑은 먼저 말(또는 알)의 측면에서, 그리고 공간의 형태의 측면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기의 말들은 모두 코드화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마는 마이고, 졸은 졸이고, 포는 포입니다. 이에 비해서 바둑의 돌들은 그저 작은 낱알들일 뿐입니다. 그 자체로는 어떤 코드도 갖지 않은 주체화되어 있지 않은 기계적 배치물의 요소일 뿐입니다. 장기의 말들이 내부성의 환경 속에서 자기 진영의 말들끼리, 또 상대방 진영의 말들끼리 일대일 대응 관계를 맺는다면 바둑은 오직 외부성의 환경들만을 갖습니다. 즉 관계들에 의해서만 집을 짓거나 포위하거나 깨어버리는 등의 기능을 갖는 것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장기가 제도화되고 규칙화되어 있는 코드화된 전쟁이라면, 바둑은 전선도 없고 후방도 없는 전쟁이라고 이야기합니다.2) 


공간론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장기는 닫힌 공간을 분배하는 것이 문제가 되며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하며 최소한의 말로 최대한의 장소를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바둑은 열린 공간에 바둑알이 분배되어 공간을 확보하고 어떠한 지점에서도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바둑알은 판 위에서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목적도 목적지도 없고, 출발점과 도착지도 없는 끝없는 “되기”를 할 뿐입니다. “바둑의 매끈한 공간 대 장기의 홈이 패인 공간, 바둑의 노모스 대 장기의 국가, 노모스폴리스3)


물론 이 대비는 뚜렷하고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홈 패인 공간에서도 매끄러운 공간이 출현하며, 국가장치에서도 전쟁기계가 작동하기도 합니다. 들뢰즈/가타리는 노모스 대 폴리스를 “유목”과 “도시”로 이분해선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도시는 분명 하나의 홈 패인 공간이지만 도시 한 가운데에서도 낯선 여행이 존재합니다. “거대 빈민가, 임시 거주자, 유목민과 혈거민, 금속과 천 찌꺼기, 패치워크 등. 이것들은 화폐, 노동, 또는 주거의 홈 파기와는 전혀 무관하다…… 도시에서조차 매끄럽게 살 수 있고, 도시의 유목민이 될 수 있다.”4)


폴리스 속에서 폴리스를 중단하며 매끄러운 공간을 창조하는 전쟁 기계, 혹은 바둑알들. 저는 촛불봉기에 나타난 대중의 모습을, 특히 그들의 힘이 지속적으로 고양되던 초기의 촛불의 모습이 바로 이 바둑알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고 봅니다. 이 바둑이 어떻게 장기와 맞섰는지, 또 어떻게 이 바둑의 공간이 장기의 공간으로 바뀌어 갔는지, 그것을 통해 무엇을 잃었는지를 몇 가지 주제를 검토하면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1) 오사카 여대 사회학과 교수, 《폭력의 철학》,《자유론》 등을 집필

 

2)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역,《천 개의 고원》, 새물결, p674

 

3) 같은 책, p675

 

4) 같은 책, pp919~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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