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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2/11
- “로마서, 또는 바울을 읽기 위하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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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4/07
- 해방의 소식 - Q & A로 보는 신약성서이야기(3)
*이글은 "로마서, 또는 바울을 읽기 위하여"(손기태, 수유너머N 2010.2.9 화요토론회발표문)에 대한 논평입니다. 올라가 있던 발표문은 허락을 받지 않은 것이어서, 다시 미공개 상태로 돌려두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 우리는 왜 ‘바울’을 읽어야 할까? 아무리 ‘좋게’ 읽는다 해도 그는 1세기에 로마 제국의 한 하위문화를 구성하고 있던 소집단의 이데올로그일 뿐이다. 더욱이 발표자가 취한 서술방식인 사회사적 비평(성서의 사회사를 분석함으로써 텍스트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은 철저히 바울을 그가 처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고려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그를 21세기의 우리가 읽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 질문은 잘못 던져진 질문이다. 사실 “우리”라는 어떤 ‘주체’가 바울을 읽어야 할 당위나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저 논평자에게, 그리고 오늘 이 자리의 청중들에게 던져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던져졌기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으로 우리는 들어가게 된 것이다. 사실은 모든 바울 읽기는 (그리고 모든 텍스트 읽기는) 이렇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런 ‘읽기’는 또한 ‘주체’에게는 경험될 수 없는 읽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주체이기 위하여(혹은 주체이기 때문에) 텍스트는 목적론 속으로 타락한다. 그리고 통상 바울은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기 위해” 읽혀져야 했을 텍스트가 된다. 여기에서 바울이 만든 하나의 세계가 구축된다. 그것을 우리는 ‘기독교’라고 부른다.
따라서 발제자의 바울 독해는 그것이 바울을 철저히 하나의 사회적 상황 속에서 읽는다 할지라도 단지 그 상황 속에 있는 “바울”을 단지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바울 기억’에 대한 해체를 수행하는 것이 된다. 이 때 사회사적 비평의 방법은 단지 ‘역사적(진정한) 바울’의 모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역사를 넘어갈 수 없는) 바울’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바울은 이제 어떤 ‘교조’나 ‘교의’로서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역사 속의 인물’로서 우리에게 던져지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던져진 ‘바울 읽기’는 결국 오늘날의 교회, 혹은 비단 교회 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어떤 ‘조직’을 탈신비화하도록 이끈다. 알고 보니 우리가 자랑스럽게 내새우던 교리, 혹은 윤리는 하늘로부터 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역사적 갈등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생산물이었으며, 그리고 가만 들여다보면 사람 사는 데는 어디나 비슷한 법이라는 것. 바울의 ‘역사화’는, 곧 우리교회 목사님과 장로님의 ‘역사화’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발표문의 서술 속에서 이 해체는 다시금 위기 속에 처하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바울은 다시 역사 밖으로 나온다. 이번에는 ‘사도’로서가 아니라 ‘진보적 사상가’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는 유대교의 구별의 논리와 비유대인들(헬라인)의 차별의 논리를 벗어난 평등의 사상가이며, 로마의 지배 대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을 기대하며, 그 씨앗을 평등공동체인 기독교회에서 찾았던 혁명가로 등장한다. 이 서술 속에서 바울은 재신비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도 바울’은 ‘혁명가 바울’이 되어 다시금 규범적 위치를 점하는 듯 보인다. 바울은 당시 교회의 갈등 상황 한 복판에 있는 등장인물임에도, 마치 그 갈등상황의 외부에서 그것을 해결할 사상적 과제를 제시하는 사상가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과제는 역사적 갈등 상황 속에서 바울이 무엇을 주장했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바울이 그런 ‘주장’을 하게 만든 바울의 역사적 위치, 그리고 그의 주장과 실천이 또 어떤 상황을 낳았는지에 대해서까지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조금 더 역사적(상황 속의) 바울이라는 주제를 밀고 나가면서 그의 서신들을 다시 뜯어보면 그것은 매우 정세적인, 즉 교회 내의 정치 문제에 개입하기 위한 글로 나타나게 된다.
이를테면 “하느님은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바울의 말은 단지 평등주의와 전복의 선언이기만 한 것일까? 이것은 바울의 집요한 사도권 주장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저 문장이 들어가 있는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 “내가 여러분에게로 갔을 때에, 나는 약하였고, 두려워하였고, 무척 떨었습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이 바로 교회 내의 ‘약한 자’들의 대변자임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요즘도 자주 볼 수 있다. 주로 선거철에. 이명박도 리어카를 끌던 ‘서민’이라서 서민의 아픔을 아주 잘 아신다고 주장하지 않으셨던가. 또한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핍박당하고 예루살렘 교회로부터도 버려진 것은 불의한 주류가 반-시대적 사상가인 바울을 핍박한 것일까? 바울도 엄청난 교인들과 지지자들을 거느린 교회의 지도자가 아니었던가. 그것은 어쩌면 여야대립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바울이 주로 그의 ‘말의 내용’을 통해 재현될 때 우리는 얼마든지 안락하게 그의 말을 소비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진보적인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이런 일은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목사님은 평등과 사회정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해 소리 높여 설교하고, 성도들은 자신들이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공동체 속에 있음을 확인하며, 주중에 자신이 그다지 진보적으로 살지 못했던 것에 대한 꺼림칙함을 씻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설교’가 지금 한참 목사님과 장로님이 두 패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는 와중에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소비’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설교에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가가 그 공동체 안에서의 그의 실존을 결정하게 될 테니까.(그리고 이런 예는 단지 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바울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렇게 - 말하자면 ‘유물론적으로’ - 던져지고 읽혀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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