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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21
    디나 이야기(1)
    김강

디나 이야기

"이 땅에서 남자들이 한다는 짓(창세기 34장)"의 관련글

 

중고등부 시절 교회에서 처음 들었던 “디나 이야기”는 “여자들이 몸조심하고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녀가 허영에 들떠서 “이방 여자”들을 보러 다닌 것이 성폭행의 원인이며, 결국 형제들로 하여금 살인의 죄까지 짓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 어디에도 이러한 가치판단은 나오지 않는다. 그 지방에 살면서, 동네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문제란 말인가?


그러나 디나는 본문에서도, 그리고 지금까지의 이 어처구니없는 해석사 앞에서도 침묵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이 본문을 여성신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디나의 침묵이라 할 수 있다. 디나가 강간당하고, 겁먹은 세겜과 그 아버지가 결혼을 통한 화해를 모색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야곱의 아들들이 히위사람들을 몰살하고, 야곱은 그 모든 것을 보면서도 말리지도 못하고, 끝에서야 “너희가 지나쳤다”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는 이 이야기에서 디나는 끝까지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디나만이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에는 창세기의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이 또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는 바로 야훼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남자들이 벌이는 짓거리들에 대해 어떤 가치판단도 내리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우리는 여기서 디나의 침묵에 연대하는 하느님의 침묵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디나는 침묵한다. 성폭행 당하고, 결혼이 결정되고, 또 결혼하려 했던 사람과 그 지방 사람들 모두가 자기의 원수를 갚아준다는 명분으로 도륙당하는 것을 그녀는 침묵으로 응시한다. 이것은 어쩌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서 나타난 실어증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녀의 실어증을 함께 앓는다. 하느님은 바로 그 침묵으로서 남자들의 ‘역사’에 가려진 여성억압의 기억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과, 그들과 연대했던 이들이 마음과 돈을 모아 서대문 독립운동기념공원 한편에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짓고 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기념한다는 광복회의 반발이 거세다. 그들은 신성한 독립운동의 성지에 수치스러운 역사가 들어온다고 주장한다. 마치 디나의 강간을 수치스러운 일로 느끼며 복수심을 불태우는 야곱의 형제들처럼 말이다. 그들에게 민족독립운동은 남자들의 역사일 뿐이다. 민족 대 민족이라는 구도 속에서 고통당하는 여성의 목소리는 들릴 수도 없고, 들려서도 안 되는 것이다. 오직 상대민족의 남성에 의해 피해를 입은 “민족의 누이”로서만 그녀들은 표상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녀들의 말할 수 없음에 연대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할머니들이 마침내 자신의 경험을 증언할 때, 남자들의 역사에 가려진 삶을 이야기할 때 하느님의 심판은 그 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진정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그녀들의 목소리를 배제해버린 남자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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