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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18
    크리스마스의 한 기억
    김강

크리스마스의 한 기억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듣는 목소리들 속에는 이제는 침묵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가 울리고 있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과거 세대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은밀한 약속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와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고,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커플 천국, 솔로 지옥"이라는 말조차 이제는 먼 옛날의 경구가 되어버린 지금. '크리스마스'에 대해 다시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여기, 엄숙한 기독교인의 의고주의가 있다. "크리스마스는 너무나 세속적이고 상업적인 축제로 변했다. 다시금 아기 예수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자." 그러나 교회라는 '산업'의 구조를 생각하면 아기 예수 탄생이라는 '시즌'에 '종교재화'의 대물량공세를 펼치는 기독교야말로 이미 세속적이고 상업적이 된지 오래다. 크리스마스라는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사실은 교회 밖에서만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태초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크리스마스라는 절기 자체가 기독교의 탄생기에는 있지도 않았던 후대의 창작물일 뿐더러, 그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채우는 복음서의 예수 탄생 이야기도 그것을 전해주는 유일한 두 문서 -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 의 차이가 너무나도 크다. 이래서 어릴 적 예수 탄생 이야기를 교회에서 공연할 때 마다 언제나 헷갈렸던 거다. 도대체 동방박사가 먼저 등장해야 하는가, 아니면 목동들이 먼저 등장해야 하는가. 요셉과 마리아는 본래 베들레헴 사람이었다가 나사렛으로 이주하는가, 아니면 원래 나사렛 사람인가. 태어난 뒤 예수 가족은 헤롯왕의 추격을 피해 이집트로 도망치는가, 반대로 수도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안전하게 예배를 드렸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날조된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크리스마스'라는 절기의 의례를 반복하고, 그걸 통해 종교재화를 팔아먹고, 또 거기에 기생해 모텔과 카페와 식당과 백화점이 한철 대박을 내고 있는 것일까? 원본 없는 복사물들(시뮬라크르)의 연쇄?

하지만 태초에 이런 일은 있었다. 우리는 이 '이런 일'과 성서 이야기 사이에서만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학살이다. 서로 모순되는 두 예수 탄생 이야기에도 일치하는 이야기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났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는 '아비 없는 자식'이었던 것이다. 당시 나사렛에 아비 없는 아이는 매우 흔했다. 예수가 태어났으리라 추정되는 BC 4년 경, 나사렛에서 고작 5~6km 떨어진 세포리스에서 봉기가 일어났던 것이다. 로마는 잔인하게 그들을 짓밟았다. 세포리스와 주변 지역 전체가 초토화되고, 그 후 몇 년간 지역민들은 '재건'을 명목으로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학살의 절망 속에서 그 절망을 상기시키는 아이들이 계속 태어났을 것이다. 그 중에 '예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절망의 기억' 속에만 두지 않았다. 두 복음서가 일치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는 아이. 그 아이는 팔레스타인에서 전통적으로 '언젠가 올 메시아'를 상징했다. 도저히 끝이 날 것 같지 않는 지배와 폭력의 세상 속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언젠가 야훼의 통치를 실현할 메시아가 예언에 따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예수가 바로 '그'였다고, 학살의 절망 속에서 태어난 '아비 없는 자식' 예수가 곧 그들의 '구원자'라고, 그를 기억해달라고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학살의 절망 속에서도 아이는 태어난다. 성서 이야기 속에 흔적처럼 남아 있는 이 기억이 오늘날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이미지'를 구성한다. 올 한 해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무차별 학살을 겪었다. 처음에는 철거민들이 불태워 죽임당하고, 다음에는 전직 대통령이 사법 살인을 당하고, 마지막으로 민주노조운동이 절망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스산한 올 해의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조용히 학살의 절망 속에서 태어난 메시야를 기억한다. 이 조용함이 시끄러움으로, 그래서 '커플 천국'과 '소망 교회'의 모든 소란스러움을 압도하는 요란함으로 전환될 때 우리는 메시야의 도래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메시아는 구원자로서만 오지 않는다. 그는 '적그리스도'를 극복하는 자로서 온다……"(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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