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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08
    이전과 결코 같지 않으리!(2)(1)
    김강

이전과 결코 같지 않으리!(2)

혁명을 망각하기
더 큰 문제는 열심히 촛불봉기에 참여했던 사람들, 특히 인권활동가들을 비롯하여 봉기의 전위적 기획을 옹호했던 사람들이 지난 5일의 집회 이후 상당한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6.10에 이어 또 다시 50여 만 명이 모였으나 사실상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는, 더 이상 새로운 힘을 생성하는 사건을 만들지 못했다는 패배감이 만연하고 있다. 그 모든 저항에도 불구하고 미국산 쇠고기가 이미 유통까지 되고 있는 지금, 나 자신이 바로 이 거리의 주인이며, 누구도 나를 지배할 수 없다는 초창기 봉기의 그 충만함을 찾기란 매우 힘들어졌다. 대신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인의 입을 쳐다본다. 사제단 신부님의 입, 대책위 활동가의 입, 또 누군가의 입. 그리고 이제 누군가 “우리 국민”의 저항이 나아갈 길을 밝혀주길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게 대책위 때문이다.”라고 쉽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정서를 극복하도록 이끌기보다는 더욱 더 큰 무력함으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구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과감한 망각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혁명’을 망각하는 것이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너무도 빠르게 ‘혁명’이라는 단어에서 정권탈취를 떠올린다. 응집된 인민권력이 단번에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우리 기억 속의 혁명의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가 패배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우리의 봉기가 우리 기억 속의 ‘혁명’과 다르기 때문은 아닐까? “청와대로 가자!”, “차벽을 넘자!”는 외침과, 그것을 위한 직접행동들(줄다리기, 토성 쌓기) 이외에 다른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건, 좀 더 넓게는 저녁의 촛불집회와 가두시위 외에 이 봉기의 시간 속에서 다른 실천을 기획하지 못하는 건 “다중”을 말하고, 상상력과 전위를 논하는 이들조차도 이 봉기를 기억속의 ‘혁명’ 속에 억지로 끌어맞추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기억 속의 혁명과 현실의 갭 사이에서 허무주의에 빠져버린 것은 아닐까?

 

사실 우리 기억 속의 “혁명”은 “다중”적이어선 실현될 수 없는 기획이다. 혁명 지도부의 확고한 지도 아래 인민이 한 몸이 되어 응집된 폭력으로 국가를 뒤집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혁명을 원한다면 당장 구체적으로 우리가 구할 수 있는 모든 장비(어쩌면 무기!)를 동원하여 명박 산성을 무너뜨리고 청와대와 정부청사, 국회로 행진하여 지배자들을 무장해제하고 새로운 정부를 선언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 경우 어쩌면 군대와 맞서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중의 봉기라는 형태로 시작된 이 국면이 이런 식의 혁명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없음을(그리고 그런 식으로 나아가서도 안 됨을) 인정해야 한다.

 

승리의 충격
촛불 봉기가 우리 기억 속의 혁명의 모습과 다르다고 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일까?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두 달 전으로 돌아가서 살 수 있겠습니까?” 아니다. 우린 결코 그렇게 살 수 없다. 돌아가기에 우리는 너무도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직접 행동 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최대의 문제는 승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이다.”(데이빗 그레이버, <승리의 충격>)

 

그레이버의 논의는 대단히 흥미롭다. 그 역시 90년대 후반에서 지금까지의 반세계화/반전 투쟁에 참가하면서 우리와 같은 문제 - 패배감의 만연 - 에 부딪혔다. 그는 패배감의 이유를 운동의 단기적 목표는 전혀 달성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며, 중기적 목표는 너무나도 빨리 달성되어 버렸다는 점에서 찾는다. 여기서 단기적 목표란 - 반세계화 운동을 예로 들면 - 특정 서밋(IMF, WTO, G8 등)을 저지해서 철폐하는 것을 말하고, 중기적 목표란 워싱턴 컨센서스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를 전지구적으로 확산시키고 각종 국제 기구들을 무력화시키며 새로운 직접 민주주의운동의 모델을 보급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적어도 급진적인 운동의 분파에게) 최종적 과제는 국가를 타도하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제가 중기적 과제의 빠른 성공과 단기적 과제의 실패로 인해 무한히 연기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반세계화 운동의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무엇보다 단 몇 년 사이에 전지구적 수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유일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실제로 IMF, 세계은행 등이 가진 자본금이나, 이들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저하되었다. 남미의 경우 이제는 거의 IMF없는 남미를 상상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

 

하지만 그들의 단기적 목표는 거의 대부분 실패한 것이었다. G8 회담이나 WTO회담은 어찌되었던 무사히 열렸고, 경찰폭력은 단호히 시위대를 막았다. “반테러”의 명분으로 각국의 공항은 반세계화 운동가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관리하기도 했다. 이러한 실패는 활동가들로 하여금 중기적 목표에 대한 운동의 승리를 자신의 것으로 인지하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운동을 분열시켰다. 구 좌파는 구 좌파대로 자신의 혁명이상에 이 운동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물러나고, NGO들이나 종교단체는 “자본주의 폐지”라는 좌파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해 물러나며, 아나키스트들을 비롯한 직접행동 그룹들은 그 과정에서 패배감에 시달린다. 그리하여 최종적 목표는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고 만다.

 

때문에 그레이버는 직접행동 그룹이 자신들이 거둔 승리를 제대로 인식하고, 거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혁명이란 단번에 국가 단위(혹은 전지구적 단위)에서 국가가 패배하고 자본주의가 폐절되는 것이라는 환상을 벗어나 실제 승리한 지점에서부터 그러한 자본주의 바깥의 삶, 국가 바깥의 삶을 살며 그러한 삶과 저항, 그리고 수많은 승리들을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타도되는 하나의 순간, 즉 명확한 단절이라는 옛 견해의 이면은, 그에 모자라는 어떤 것도 진정한 승리는 전연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자본주의가 여전히 건재한다면, 그리고 한 때 전복적이었던 견해를 팔아치우기 시작한다면, 자본주의가 진정으로 이겼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 된다. (중략)... 내게 이것은 터무니없어 보인다. 자본주의 기업이 페미니스트 책과 영화, 그리고 다른 상품들을 마케팅하기 시작했다고 하여, 페미니즘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아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한 방에 타도하지 않는 한, 이것은 다른 곳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장 명백한 징표다. 어쩌면 혁명을 향한 실질적인 길은 무한한 흡수의 순간, 무한한 승리 캠페인의 순간, 무한한 작은 반란의 순간 또는 무한한 탈주와 조용한 자율의 순간을 포함할 지 모른다. (중략)...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우리가 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며, 사실상 약간은 이겼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실 최근 우리는 상당히 많이 이기고 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좀 더 우리가 거둔 성과들을 분명한 승리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혁명”은 바로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얻었을까? 조정환은 다음의 여섯 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1)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대중화시키고 있다.
 2) 수구적인 이데올로기적 권력기구 조중동의 권력을 침식하고 있다.
 3) 국가권력과 지배계급 내부의 분열을 조성하고 있다.
 4) 사회 각계각층을 반이명박 전선으로 결집시키고 있다.
 5) 새로운 항쟁의 주체들을 생산하고 있다.
 6) 봉기의 새로운 기술들을 매일 매일 창조하고 있다.
 (조정환, <2008년 촛불봉기: 다중이 그려내는 새로운 유형의 혁명>)

 

 또 촛불봉기를 통해 얻게 된 “새로운 시민의 상식” 목록도 있다. 
 첫째, 헌법 1조 지켜져야 하며, 국민 원하면 대통령도 리콜해야 한다는 생각
 둘째, '배운여자'와 '배운남자'는 더 이상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다는 생각 
 셋째, 사실을 왜곡 보도하는 조중동, 언론으로서의 권위가 사라졌다는 생각
 넷째, '민영화'와 '자율화'는 생각만큼 좋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
 다섯째, 서로가 서로를 믿고 도울 수 있다는 생각
 (이수연, <촛불과 함께한 두 달, 우리는 어떻게 달라졌나?>)

 

이 것 이외에도 수많은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수십만 명이 모인 광장은 김밥과 생수가 모자라지 않는 작은 꼬뮌의 모델을 제시해주었고, 생협이나 대안학교 운동 등 그동안 ‘탈정치적 중산층 운동’으로 여겨져왔던 운동에 급진적 삶정치의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조합원 수가 늘어나고 있음은 물론이다!) 또한 무슨 일만 생기면 법원, 인권위, 헌재만 바라보던 사회운동이 다시금 직접행동의 능력을 찾아가고 있기도 하다.(그 과정에서 집시법은 사실상 있으나마나 한 법으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다)

 

두 달 전의 우리의 삶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성과들이 어마어마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설사 지금 우리가 공안정국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고, 미국산 쇠고기가 제대로 된 검증장치 없이 유통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앞으로 우리의 삶은 바로 우리가 이룬 이 성과 위에서 이어갈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것들을 진지하게 승리로 인식하고 더 많은 승리로 과감히 나갈 때 가능한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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