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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7/03
- NCCK 평화통일위원회 토론회에 다녀오다.
아아. 무려 박순경 선생님부터 해서 60-70년대의 노장들과 80년대의 꼰대들까지 모였더랬다.
토론 시간까지 참가하지는 못했고, 발제만 듣고 왔다.
최영실 선생님께서 "한국 교회 평화 통일 vision문서"(선언문임)초안을 발표하셨는데
사실 서두의 '신앙고백' 부분은 내가 썼다는..ㅡㅡ;
발제문과 토론문을 보면서 아쉬웠던 것은
에큐메니컬 교회의 평화/통일 운동이 라인홀드 니버 류의 "기독교현실주의" 류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교회 자신의 삶의 대안보다는 정치권에 호소하는 식의 선언문.
지난 20년간 이 노선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누가 뭐래도 지난 민주정부의 통일 정책의 산파역할을 한 것은 에큐메니컬 기독교권이었다. 독재정권 시절의 문익환 목사로부터, 이재정 신부, 한완상 선생을 필두로 많은 이들이 직접 입각하여 통일 정책을 진두지휘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승리는 곧 "민주주의의 패배"이기도 했다. 이전엔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 "정치" 담론이었던 통일 담론은 이제 민주화 엘리트 세력의 "통치"담론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사실상 나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문제에 관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통일 문제란 이제 국가 정책 엘리트들, 시민사회의 지도 세력들, 그리고 국제관계 문제이지, 실정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民의 문제는 아니게 된 것이다.
나 스스로는 "민족통일"이라는 구호에 어떤 감정적 동요도 느끼지 않고, 현실적으로도 이 구호에 동의도 하지 않지만, "한반도 평화",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 "동아시아 민중의 평화"에 대해서는 간절한 필요를 느낀다. 그런데 이 문제에 관하여 교회가 가져야 할 태도가 여전히 - 민주정부 10년의 실험을 끝낸 - 기독교 현실주의일까?
노장들, 꼰대들께서는 오늘의 상황을 80년대의 '회귀'로 보시는 듯 하다만, 그럴 수는 없다. 그저 '다른 미래'가 도래해버린 것 뿐이다. 따라서 오늘의 대안 역시 80년대의 대안과 같을 수 없다. 지금 기독교 현실주의의 선언문 하나가 나와밨자, 그냥 시민사회 일각에서 글 하나가 발표된 것일 뿐, 그것이 '정치적' 효과를 갖는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런 건 어떨까?
문서 이름이 Vision문서 아닌가? vision이란 성서적 입장에서 본다면 '묵시'라 할 수 있다. 기왕 비전 문서를 낼 것이면, 하나의 묵시종말적 관점의 문서를 내는 것은 어떨까? 묵시종말적 관점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정치적인 세계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유일한 것이 아님을 뜻한다. 지금 이 세대가 아닌 다른 세대가 온다.(유대교, 세례 요한) 혹은 이미 왔다(예수)는 것. 이것이 묵시종말적 관점이다.
그리스도 교회가 만약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없는 것처럼,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온 것처럼 평화를 살아버리면 어떨까? 그래서 군대에 안 가버리고(부담된다면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예비군훈련부터 거부해보자), 군부대에 들어가 상징적으로 무기를 해체하고(70년대에 미국의 수녀님 세분이 해군 미사일 하나를 못 쓰게 만들어서 평화운동의 상징이 된 일이 있다.), 마치 국경선이 없다는 듯이 허가받지 않고 북으로 넘어가보고(이것도 새롭지 않다. 문익환 목사님이 이미 하셨던 일이다.)
교회가 이런 실천에 갑자기 나선다면, 혹은 이 정도까지가 아니더라도, 근본적인 차원에서 '국가의 평화'를 넘어가버리는 다른 평화 실천들을 하기 시작한다면, 매순간 정치가 열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모든 정치적 메시야니즘을 넘어가는 '메시야적 정치'가 아닐까. vision문서라면, 마치 자신들이 시민사회의 지도부라도 되는 듯 행세하지 말고, 이 국가와 시민사회의 외부(묵시적 용어로는 '그의 나라')를 창안하는 실천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뭐.. 그러기엔 이미 NCCK는 너무나도 시민사회의 '일부'일 뿐이다. 기독교 현실주의는 신학이 아니다. 신학화된 정치공학일 뿐이다. 나는 뭔가 새로운 교회의 '신학적 정치'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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