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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17
    TV를 끄자.(1)
  2. 2008/01/17
    픽션(2)
  3. 2008/01/17
    災(재)개발

TV를 끄자.

TV를 자세히 보자.

 

TV을 끄자.

 

 

좀 더 자세히 보자. TV를 끄는게 좋지 않을까?

 

 

맞지 않는 초점 처럼 맞지 않는 시대의 TV를 걷어내자

 

 

검은 화면만 나오는 건 부족하다.

차라리 방구석에 움켜쥐 유성매직으로 TV를 그리자.

그리고 실제 존재하는 TV를 없애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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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

3일전.

회의가 12시에 있어 난 10시쯤 일어났다.

내가 잠에서 깨어 눈을 뜨면 내 눈앞에는 항상 식탁에 있던 의자와 흔들의자,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다시 문을 열어야 하는 문이 보인다. 물론 천장과 바닥도 보인다.

그날은 무척 힘들게 잠이 들어서 깨어났다.

눈을 뜨니 동생이 티비를 보고있었다. 난 항상 하던 식으로 동생에게 "티비꺼" 라고 이야기 하려고 했지만

뇌와 입이 따로놀았다. 그렇지만 그 순간은 생생히 기억한다.

난 내 눈에 비치던 그 구도와 동생의 처진어깨, 그리고 그 옆에 흔들의자에 있던 젖은것 같은 수건까지.

나에겐 꿈에서 나올 것 같은 구도였다.

 

하지만 나를 보는 사람에게 난 그런 구도를 만들어줄 기회가 있었는가.

아마 '그렇다'라고 확신은 할 수 없다. 난 확실하지 않은 생각들을 이야기 했고, 행동했으니까 말이다.

 

사무실에 가는 길은 그때그때 기분이 달라진다.

대부분 7시30에 일어나 8시 30분이나 50분쯤 버스를 타거나, 혹은 자전거를 탄다.

버스를 탄다면 5619번과 5620. 그리고 5617를 타서 150번으로 갈아타는 경우가 있다.

즉, 늦었을때 5620를 타고 구로디지털단지에 내려서 자하철을 탄다. 그나마 효율적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여유가 있을때는 5619를 타고 신도림으로 간다.

더욱 더 시간이 있다면 5617를 타고 금천구청에서 150번으로 갈아타서 갈월동(서울역)에 내려

걸어가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버스를 타지 않을 경우 자전거를 타고 안양천을 따라 신도림으로 간다.

자전거는 항상 상쾌했다.

그렇지만 아침에 다투는 일이 많아졌다.

스승께서 내게 화를 다스리고 마음을 보라, 하셨지만 난 아직 수행이 모자른다.

난 왜 다투었는가, 내가 예민한 이유였던가,

내가 성찰해야 할 것을 왜 남이 대신 성찰을 하고있는 것인가.

다투고 난 뒤의 마음은 항상 꿀꿀하다. 매우 혼란스럽고 심지어 욕이 튀어나올때도 있다.

 

눈을 감는다고 나의 고민과 성찰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난 정말 내 주위 가까운 사람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었던것이다.

'아' 하는 탄식만 흘러나온다. 흘러나왔던 탄식은 공기를 타고 다시 내 눈동자를 쿡쿡 찌른다.

담배를 핀 후 맑은 공기를 마시지 못하는 것처럼 맑은 정신이 있을리가 없다.

 

작은학교시절, 내 스승은 내게 지금까지의 잘못했던, 내가 생각하는 잘못했던 일들을 공책에 적어보고

그 일들은 기억해내서 이야기해보라 하셨다. 난 잘못을 적었다. 그리고 읽었다.

스승은 내게 물었다. 마음이 편안해 졌냐고, 난 그렇다고 답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거짓의 답이었다. 내가 말하기 싫은 잘못들은 모조리 빼버리고 다른 잘못들을 적었다.

그리고 마음한켠이 불안한데도 난 편하다고 답했다. 이중생활이다.

잘못에도 여러종류가 있다. 이 잘못과 이 잘못은 다르기 때문에 종류가 다르다. 사람에게 하는 잘못과 동물에게 하는 잘못도 다르다. 난 이 다른 잘못들을 성찰하지 못했다.

 

예전에 난 고양이와 생활했다.

고양이는 내 친구였고 고양이도 날 친구로 생각했다. 고양이는 심지어 두발로 걸어다녔다.

고양이의 이름은 '하지' 였다. 난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해 하지를 친구에게 보내게 되었다.

옆에 있던 사람친구가 외국으로 떠난 느낌이었다. 내 옆에 동물친구가 떠난 느낌이 그리하였다.

부모님도 모르고 있었던 하지의 존재는 지금 경상북도에서 다시금 나와 다른사람들에 의해 떠오르고 있을것이다. 그 친구는 털이 아주 예뻤고 나에게 해주는 말들도 아주 좋은 말이었다.

 

난 정겹다. 내가 정겨운게 아니라 내 주위가 정겹다.

 

맑스는 눈동자가 맑지 않다.

 

쓰고 싶은 글은 생각날때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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災(재)개발

재개발의 재는 아마 재앙재(災)일것이다.

 

사람의 맘을 사로잡는 방법. 재개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발’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개발이 되면 자신이 살던 동네가 무조건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로 사람들은 개발을 원한다. 그렇지만 현실에서의 ‘개발’은 사람들의 환상을 여지없이 배반한다.

개발의 문제점은 하나하나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에 치명적인 것들이다. 마을 공동체는 갈아엎어지고 이윤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은 내쫓겨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살(live)만 한 집 대신 (가진 자들이) 살(buy)만 한 집만 남는다. 주거환경이 좋지 않은 동네를 재정비하고 공공서비스에 대한 접근을 쉽게 해야 하지만 현재의 재개발은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살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개발의 실제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자.

 

인간에 대한 개발의 ‘배반’은 어디까지인가.

 

 

재개발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지역간의 빈부격차를 줄이고 불안정한 생활고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누리기 위해 재개발이 필요하다고 한다.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중요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 하나가 공공서비스다. 교통이나 동사무소, 병원, 문화시설, 가스관, 수도관, 소방도로 등 여러 가지 공공서비스가 확보되고 접근하기 편하게 분포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공공서비스가 취약한 상태에 있는 동네의 환경을 바꾸는 것은 분명 필요하다. 소방차가 들어갈 수 없어 화재가 나도 불길을 잡지 못하고, 아픈 사람이 있어도 구급차가 들어갈 수 없는 마을에 개발은 필요할 지도 모른다. 학교를 다녀야 하는데 너무 멀고 버스를 한 번 타려고 해도 몇 십 분을 걸어야 하는 동네는 사회적 약자나 가난한 사람들이 살기에 더욱 힘들다. 그러나 개발은 거꾸로 간다.

 

도시를 재개발하는 데에 ‘어디서 먼저 되고, 어디는 늦게 된다’는 우선순위는 정해져있지 않다. 노후주택이 얼마나 많은지,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는지 등의 기준에 따라 개발사업구역이 지정된다. 그러나 정말로 개발이 필요한 낙후지역은 개발사업구역으로 지정되고도 몇 십 년 동안 개발사업이 추진되지 않는 반면, 서울의 뉴타운처럼 굳이 당장 갈아엎지 않아도 되는 동네들은 각종 기준완화조치로 개발사업이 일사천리 추진된다. 사람들이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드는 것보다는 ‘돈’이 나오기 좋은 동네만 개발하기 때문이다. 안전하지 못한, 살기 힘든 곳들이 차근차근 개발되어야 하겠지만 ‘이익’에 눈이 먼 지자체들은 가난한 이들이나 사회적 약자의 삶을 안중에도 두지 않으며 오히려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

 

가난할수록, 세입자일수록 개발의 현실은 가혹하다. 개발사업구역의 세입자들에게는 공공임대주택의 입주권과 주거이전비가 제공된다. 그나마 법이 정한 조건을 만족하는 세입자들에 한해서 제공되는 것인데 이것도 문제가 많다.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받아도 3~4인 가구가 살기엔 비좁은 평형만 주어지고 1인 가구가 들어가 살기엔 집의 구조가 부적절하다. 게다가 임대료는 결코 싸지 않다. 관리비 역시 마찬가지다. 비좁고 안락하지 못한 곳에서 합당치 않은 임대료를 내는 것은 누가 보아도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이다. 임대료, 관리비 부담으로 아예 입주할 엄두를 못 내거나 연체되어 곧 퇴거당할 수 있는데 무리를 하는 것도 권할 만한 선택은 아니다. 도시 저소득층은 단독․다가구주택에서 여러 가구가 함께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개발로 신규 공급되는 주택은 대부분 저소득층이 살기 힘든 비싼 아파트다. 즉, 싼 집을 실컷 부수고 비싼 집만 고이 짓는 것이 개발이다.

개발기간 중 살 집을 구하는 것도 큰 문제다. 세입자들에게 적절한 가이주대책이 마련되어 근처로 잠시 이사했다가 다시 살던 곳으로 들어올 수 있어야 할 텐데 조합이나 지자체는 세입자들더러 알아서 하라고만 한다. 개발사업구역으로 한 번 지정되고 개발이 추진되면 일대의 땅값과 집값이 모두 엄청나게 오르기 때문에 알아서 하라는 말은 결국 ‘멀리 꺼지라’는 얘기일 뿐이다.

 

이렇게 개발이 추진될 수 있는 이유는 추진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고 어떤 사업이 필요할 지를 숙고하는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개발사업은 집이나 땅의 소유주들의 의견만을 수렴해서 결정된다. 이마저도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채, 심지어는 돈을 쥐어주면서 동의서를 받아 조합을 설립하고 사업계획을 수립한다. 어떤 개발사업들은 국가기관이 일방적으로 사업계획을 세우고 그 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토지를 강제로 수용해 추진되기도 한다.

같은 동네에 살아도 세입자들은 더욱 개발사업의 내용을 모른다. 누구는 더 잘 알고, 누구는 더 알지 못하는 차별적인 상황은 세입자나 가난한 이들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세입자가 토지나 건축물에 대한 소유권이 없다는 이유로 법은 그/녀들의 권리를 부정하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주택이 철거되는 것, 개발과정과 개발 이후에 자신이 보장받게 되는 주거대책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런 상식마저 무시하고 지자체나 조합이나 별다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자체나 조합이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불리한 방향으로 정보를 퍼뜨리거나 각종 유언비어들이 떠돌게 된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에 근거한 판단은 부적절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또한 이 과정에서 주민 갈등이 불거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조합과 조합 사이, 조합원과 비조합원 사이, 세입자와 집주인 사이, 세입자와 세입자 사이에서의 갈등이 터져나온다. 개발이익을 한껏 챙겨가는 시공사나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지자체는 뒷짐지고 있는 척 한다. 그러나 개발사업과 관련된 주민들의 갈등은 결국 개발사업 자체의 비민주성이 왜곡되어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마을은 공동체다. 한 마을에서 몇 십년 간 살았던 사람들에게 공동체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할 수 있다. 쌀이 떨어졌을 때 급하게 빌릴 수 있고 아이들의 교복을 물려입기도 한다. 일자리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기도 하고 서로 필요한 것을 돈이 아닌 우정으로 나누기도 한다. 사람다운 삶은 연대의 마음으로 맺어지는 관계를 통해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러나 마구잡이 개발은 평생의 터전이었던 마을을 송두리째 없애버린다. 공동체의 성원들은 오갈 데 없어진다. 몇 십년 간 같은 곳에서 같이 살았던 사람들과의 관계는 끝나게 된다.

인간의 공동체뿐만 아니라 그 공동체가 터전을 틀었던 자연이 파괴되는 것도 개발사업에서 뗄 수 없는 문제다. 개발 중의 건축 폐기물들과 소음, 온갖 유해물질들은 개발구역 주위의 동네 주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쉽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지만 늘 그곳에 살아왔던 작은 식물과 동물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도 최근에는 개발에 눈이 멀어 그린벨트를 해제하고 여기저기 신도시를 지어올리고 있으며 이로 인해 수없이 많은 생태가 훼손된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그런 각종 개발사업이 친환경적이고 생태적인 도시를 만들겠다는 구호를 내건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거짓말이다.

 

개발은 ‘환상’이다. 이미 전국 곳곳에서 개발 사업이 진행 중이지만 이명박 정권 시대에는 더욱 많은 개발사업이 미친 듯이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개발을 막기 위한 싸움을 고민해야 한다. 개발사업이 불러올 거대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개발사업의 일상화 자체가 인간다운 삶을 향한 꿈이 들어설 자리를 가로채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재영/인권운동사랑방 주거권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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