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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과 대중적 노동운동 - 김금수

세계노동운동사 제1차 세계대전과 대중적 노동자계급 운동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
1917년 무렵 노동자 대중은 극도로 궁핍해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수백만 명에 이르는 인명이 손실된 데다가 생활수준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수준으로 악화된 것입니다. 게다가 수십 년에 걸친 투쟁으로 획득한 권리와 자유가 박탈되면서 사회적인 적대모순이 확대되고 첨예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나라의 노동자들이 다양한 형태로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그 투쟁들은 전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전쟁을 유발한 제도에 대해서도 저항한 것이었죠.


마치 먹구름이 폭풍우를 몰고 오듯 자본주의는 전쟁을 몰고 온다고 조레스가 말한 바 있다.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불황의 위기를 가져오고 새로운 영토 정복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만든다. 그리고 각 국가의 사회구성 내 자본주의 발전과 각국 자본주의의 대결이 전쟁을 불러일으킨다(Michel Beaud, 1981: 218). 자본주의의 발전은 불가피하게 세계를 국가경쟁, 제국주의적 팽창, 갈등과 전쟁의 방향으로 몰고 갔다(Eric Hobsbawm, 1987: 549).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노동자들의 상태
1914년 8월 제1차 세계제국주의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1914년 6월의 사라예보 사건을 구실로 7월에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 그 시작이었죠. 이것이 동맹국들(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과 협상국들(프랑스, 러시아, 영국) 사이의 충돌로 발전하면서 바야흐로 제국주의 세계전쟁이 되었습니다. 교전국가들의 독점부르주아지, 군부, 정부들이 이 전쟁을 장기간 걸쳐 준비한 주역들이었어요.
제1차 세계대전은 그 규모나 결과 면에서 미증유의 전쟁이었습니다. 34개에 이르는 국가가 이 전쟁에 관여했고, 직접적인 군사비가 2080억 달러에 달했죠. 이 전쟁에 동원된 군인은 7천만 명 이상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1천만 명 가량이 목숨을 잃었고 2천만 명 이상이 불구가 되거나 부상을 입었습니다. 전쟁은 많은 나라들에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고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경제관계를 깨뜨렸어요. 많은 산업부문과 교통기관이 파괴됐고, 농업생산이 격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금속, 연료, 전력, 면화 등 주요 자원들이 비생산적인 군사적 용도로 사용되어, 사람들을 살상하는 데 이용되었죠.
전쟁은 자본의 집적·집중을 촉진하고 독점체의 힘을 강화하여, 독점자본이 국가독점자본으로 전화하는 과정을 가속시켰습니다. 자본주의에서 제국주의로 그리고 독점에서 국가화로 나아가게 했죠. 그런 점에서 전쟁은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시킨 셈입니다. 한편, 제국주의전쟁이 만들어놓은 조건들은 부르주아 국가와 금융과두제 힘의 결합을 바탕으로 '전시국가자본주의'가 성립되도록 했습니다. 전시국가자본주의는 생산·에너지·원료·인적 자원 등 모든 잠재력을 전쟁목적에 동원하고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강력하게 규제했습니다. 이 체제는 자본에게는 이윤을 보장했지만,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족의 투쟁에 대해서는 억압으로 대응했죠.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은 이전에 비해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전쟁에 동원되어 죽거나 부상을 당했고, 그들의 가족들도 일시적으로나 영구적으로 생계수단을 상실하게 되었죠. 그리고 군사행동이 행해진 곳이나 적군이 점령한 국가 또는 지역에서는 경제적인 황폐화가 급속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군사행동에 따른 생산력의 파괴, 국민경제 기본부분의 군수부문으로 대체, 생산의 위축 등으로 생활필수품이 심각하게 부족해진 것입니다. 이로 인해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세르비아, 발칸 지역 등의 노동자들이 특히 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전쟁 중에는 노동자들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었고, 노동자계급의 구성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전쟁에 동원된 남성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비노동자층과 여성·청소년들이 메우게 된 것이죠. 광산업과 기계제조 그리고 화학 등의 산업부문에서 일하는 여성과 연소노동자의 수가 나라에 따라서 4배에서 8배까지 증가했습니다. 또, 점령 지역에서 피난해 온 난민, 외국인 노동자, 군사 포로, 군인 등의 노동이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이들은 매우 낮은 임금으로 일에 종사했죠. 어느 교전국가에서든 노동조건이 현저히 악화됐습니다. 기업주들은 '애국'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서 노동일을 연장하고 노동 강도를 강화했어요. 만성적 식량부족으로 기아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노동 강화와 장시간 노동이 일상적으로 행해졌습니다. 또, 여성·연소노동자와 난민 또는 군사포로들이 산업부문에 활용되면서 산업재해가 급증했고, 노동자들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했습니다.
1917년 무렵 노동자 대중은 극도로 궁핍해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수백만 명에 이르는 인명이 손실된 데다가 생활수준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수준으로 악화된 것입니다. 게다가 수십 년에 걸친 투쟁으로 획득한 권리와 자유가 박탈되면서 사회적인 적대모순이 확대되고 첨예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나라의 노동자들이 다양한 형태로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그 투쟁들은 전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전쟁을 유발한 제도에 대해서도 저항한 것이었죠.

대중적 노동운동의 발전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성된 극히 불리한 여건들은 노동운동의 발전을 심각하게 제약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 내부에서도 매우 복합적인 모순들이 형성되도록 만들었죠. 언론·집회의 자유가 억압당했고 파업과 시위의 참가자와 반전 문서의 필자, 출판자, 배포자들이 투옥되거나 전선으로 보내졌습니다. 이런 일은 러시아와 같은 반민주주의 국가에서뿐만 아니라 영국과 같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전통을 유지한 국가들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형태나 방법 그리고 강도에서는 차이가 있었지만, 교전국들은 모두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동원했습니다. 사회배외주의자들(Social-chauvinists)이 주장한 노동과 자본 사이 '국내평화' 정책은 공통적인 현상이었죠. 많은 노동자 조직의 지도자들이 '자국'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옹호함으로써 노동자들을 혼란과 동요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한편, 전쟁 기간 동안 노동자계급 구성이 급격하게 변화한 것도 노동운동 발전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어요. 기존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군대에 동원되고 수많은 소부르주아 층과 여성 및 청소년들이 공업과 운수부문에 유입되면서, 불가피하게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의식이나 노동운동의 수준이 저하되었죠. 그러나 가혹한 전쟁 조건들은 노동자들이 거센 불만과 분노를 품도록 만들었고, 반전 투쟁과 반자본주의적 투쟁을 전개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투쟁들이 진전됨에 따라 노동자들은 맹목적 애국주의에서 점점 벗어났지요 그리고 전쟁의 진정한 원인과 성격을 알게 되면서 계급적으로 자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노동자 대중의 반전의식과 투쟁이 자연발생적으로 고양되면서 사회의 민주주의적 정치역량을 강화했고, 이것은 노동운동의 변혁적 사고와 행동을 촉진했습니다.
이제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주요 국가별로 대중적 노동운동의 발전 과정을 살펴봅시다.

러시아
러시아 노동자들의 투쟁이 고양되는 모습은 두드러졌습니다. 전쟁 발발 직후에는 탄압 때문에 러시아 노동운동도 일시적으로 후퇴를 경험했죠. 많은 합법적 노동자 조직이 금지되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노동조합의 활동도 '특별 감시' 하에 놓여있었습니다. 군사행동이 벌어진 최초의 5개월 동안에는 파업이 70건, 파업 참가 노동자는 4만 명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어요. 그러나 1916년 2월과 3월이 되면서 노동운동이 차츰 활발해졌고, 같은 해 봄과 여름에는 차리즘(tsarism)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전쟁 발발 반년이 된 1915년 2월부터 그 해 7월 사이에는 파업 발생이 574건, 파업 참가자가 24만1천 명에 이르렀죠. 또 전쟁 개시부터 1916년까지 파업건수는 606건에 이르렀고 참가자 수는 43만2천 명이었습니다. 이 파업들 중에서 36%는 정치적 파업이었으며, 정치파업에 참가한 노동자 수는 전체 참가자의 45%에 달했습니다.
1915년 이후에 일어난 파업들은 전선에서 차르 군대의 심각한 패배와 시기를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고양되면서 전국적으로 커다란 정치적 반향을 불러일으켰죠. 특히, 농업이 황폐해진 상황에서 발생한 파업투쟁들은 차리즘과 전쟁에 대한 병사와 농민대중의 투쟁을 촉발시켰습니다. 노동자계급의 과감한 투쟁이 농민들의 자각을 촉진하고 군인들의 전쟁에 대한 의식을 변화시킨 것이죠. 전선의 불안하고 힘겨운 상황, 전쟁에 따른 막대한 희생, 물가 폭등, 기아와 궁핍, 곡물과 가축사료의 태부족 등이 농민과 군인들이 노동자들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끔 만들고, 자신들의 정치적 의식을 일깨우도록 한 요인이었습니다. 1915년에 177건이었던 농민투쟁은 1916년에는 294건으로 증가했죠.
노동자 투쟁이 규모가 점점 커지고 완강해지면서 점차 정치적 성격을 띠었습니다. 그리고 농민운동이 고양되고 군인들의 불만이 갈수록 고조되었습니다. 혁명적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1916년 10월, 세 개의 강력한 정치적 파업이 발생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식량위기와 생활필수품 값의 폭등, 그리고 부당이득에 저항한 파업이죠. 6만7천 명이 참가했고, 노동자와 경찰대의 충돌 과정에 군인들이 오히려 노동자 편에 섰습니다. 두 번째는 차르 정부가 볼셰비키 조직에 속한 해군 병사를 탄압한 데 대한 항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50여 공장의 12만 명 노동자가 주축이 되고 거기에 중소기업 노동자와 학생들이 참가한 파업이었습니다. 이렇듯 대규모적인 대중 정치투쟁이었던 10월의 파업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죠.

독일
다른 대부분의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노동자계급의 투쟁도 군사행동이 시작되면서 크게 위축됐습니다. 이는 사회배외주의자들을 비롯하여 전쟁 옹호자들이 자국의 전쟁 승리를 위해 '국내 평화'를 강조한 결과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러한 상태에서도 노동자들은 점점 계급적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투쟁을 준비했습니다. 전쟁 조건에서 박탈당한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과 반전 투쟁에 참가하는 노동자와 노동조합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14년 12월2일, 칼 리프크네히트는 당의 결의를 어겨가면서까지 군사예산에 대해 반대 투표를 했습니다. 이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운동의 국제주의 경향 강화와 반전운동 발전에 큰 의의를 갖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베를린, 드레스덴, 브라운슈바이그, 고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등 여러 도시의 사회민주당 조직으로부터 지지를 받았죠. 칼 리프크네히트를 비롯해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제트킨, 프란츠 메링, 빌헬름 피크 등을 중심으로 사회민주주의자 중핵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제국주의 전쟁 정책에 반대하며 정력적으로 활동했습니다. 1915년 봄부터 대중적 반전행동이 조직되기 시작했습니다. 3월에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여성들이 평화와 물가 억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5월에는 시위대 약 1천5백여 명이 제국의회에 몰려들어가 전쟁 반대를 외치기도 했죠.
가을이 되면서 반전투쟁이 한층 더 활성화되었습니다. 1915년 11월 베를린에서 시민 1만여 명이 '빵과 자유', '전쟁 반대' 슬로건을 내걸고 제국의회 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칼을 빼든 기마 경찰대가 군중들을 해산시키려 했지만 시위는 계속되었고, 다음 날에도 되풀이되었습니다. 많은 도시에서 물가폭등에 항의하는 저항이 일어났어요. 이것은 전쟁에 반대하는 대중집회·시위와 결합된 것이었죠. 켐니츠에서는 이런 성격의 투쟁이 몇 주 동안 진행되면서 경찰과 충돌을 빚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라인 지방의 광산 노동자, 함부르크의 조선 노동자와 섬유 노동자들도 저항에 참여했습니다.
대중의 불만이 점점 높아지자 이를 억누르기 위해 경찰은 감시를 확대하고 반전운동 활동가들을 체포했습니다. 정부는 반전운동과 저항운동 참가자들을 전선으로 보내버리기도 했죠. 게다가 17세부터 60세까지 노동능력을 가진 모든 남자의 강제적 노동의무를 규정한, '조국을 위한 보조적 봉사에 관한 법률'이 1916년 말 채택되었습니다. 이 법률은 고용의 자유를 박탈한 것이었고, 사실상 노동자들을 기업주에게 종속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은 대중적 반전운동이 진전하는 것을 결코 막을 수가 없었어요. 새로운 노동자들이 투쟁에 참여했죠. 여기서 적극적 역할을 담당한 세력이 여성과 청년들이었습니다. 1916년 4월 예나 지방에서는 칼 리프크네히트의 주도로 '계급평화의 허구'를 거부하고 '국제연대와 계급투쟁'을 첫 번째 의무로 제기하는 혁명적 청년 그룹의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는 "모든 힘과 수단을 동원하여 반전을 위해 투쟁할 것이며, 전쟁이 조성한 정세를 자본주의 사회의 붕괴를 앞당기기 위해 이용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주도하는 스파르타쿠스단은 1916년의 메이데이를 겨냥하여 국제연대와 제국주의전쟁 반대를 위한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메이데이를 맞은 베를린에서는 보병과 기마경찰의 경계가 삼엄했죠. 그럼에도 1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포츠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리프크네히트가 외친 '전쟁 반대', '정부 타도' 구호에 맞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리프크네히트가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도 군중들은 구호를 계속 외쳤죠. 같은 날 독일에서는 여러 도시에서 반전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그 뒤로 2개월 가량 계속된 반전운동의 서곡이었어요. 이와 함께 여러 도시에서 '기아폭동'이 빈발하였는데, 어떤 곳에서는 정부가 계엄을 선포해야만할 정도였습니다.
새로운 탄압이 시행되었습니다. 리프크네히트는 4년 1개월의 징역형을 언도 받았고, 룩셈부르크와 메링 등은 구금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대중투쟁은 점점 고양되었습니다. 여름이 되면서 반전투쟁은 최고조에 이르렀어요. 1916년 6월28일부터 30일 사이, 베를린에 사는 노동자 5만5천 명이 정치파업을 벌였습니다. 이 파업은 리프크네히트의 재판과 전쟁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던 것이죠. 스파르타쿠스단은 이 파업을 독일 노동운동 발전의 전환점으로 평가했습니다.
1916년 초 베를린에서는 기계제조, 병기·장비, 항공기 등 군수공장에서 6천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전쟁의 참화에 반대하며 정치파업을 일으켰습니다. 1916년 여름이 끝날 무렵부터 가을에 걸쳐서는 독일 전역에서 반전 시위와 파업 그리고 정부와 노동자 사이의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8월에는 함부르크에서 '전쟁 반대', '정부 타도', '빵을 달라'는 구호를 내건 대중시위가 일어났죠. 그리고 11월2일 드레스덴에서는 노동자 7, 8천 명이 지방정부로 몰려가 식량배급의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1916년 한 해 동안 독일에서 일어난 파업 총 건수는 240건이었고, 파업 참가자 수는 12만 4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총칼을 동원한 독재와 가혹한 착취 때문에 쌓인 광범한 대중들의 불만이 전쟁, 기아, 물가폭등에 반대하는 대중행동으로 폭발한 것입니다. 이는 전쟁옹호자들이 주장하는 '국내평화'에 대신에 첨예한 사회적 긴장과 대규모적인 계급적 갈등이 확산되고 있음을 여실히 표현한 것입니다.

프랑스
1914년 8월과 9월, 독일군이 프랑스 영토를 침입하여 여러 지역을 점령하고 수도 파리를 위협하자, 프랑스의 지배세력은 '국가 방위'를 강력히 선전했습니다. '국방정부'는 '신성한 거국일치', '계급평화'를 슬로건으로 내걸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노동총동맹(CGT) 지도자들은 노동자 조직의 활동을 부상병과 포로 그리고 난민 등에 대한 사회적 원조에 한정하려 했죠.
1914년 후반부터 1915년 들어서까지, 물질적 상태가 현저히 악화되었음에도 프랑스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습니다. 전쟁 동원 때문에 조합원이 절반으로 줄어든 조건에서 노동자 파업이 위력을 갖기 힘들었던 것이죠. 1914년 8월부터 12월에 사이에 모두 18건의 소규모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노동자 1천 명이 참여했습니다. 1915년에는 파업이 98건이었고 파업 참가자수는 9천3백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태는 오래 가지 못 했죠. 전쟁으로 인한 고통과 현실적 참상이 민중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키면서, '국가 방위', '계급 평화' 등의 선전은 위력을 잃게 됩니다. 1915∼1916년에는 반전운동이 점점 확산되면서 대중적 성격을 띠게 되었죠.
프랑스 반전운동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주로 생디칼리즘 신봉자들인, 노동조합 내 좌파세력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제국주의 전쟁에 대해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항의하기 시작한 것도 그들이었지요. 1915년 5월 금속노동조합연맹 사무총장 메르하임은 신문지상을 통해 "이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라고 자신들의 주장을 명백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금속노동조합연맹은 '민중 살육을 그만 두라'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자의 슬로건에 찬성하는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금속노동조합연맹은 건설노동자와 토목노동자 노동조합과 더불어 1915년 5월1일 파리에서 국제연대와 병합이나 배상 없는 강화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죠. 그리고 1916년 봄에 결성된 생디카방위위원회(CDS)는 프랑스노동총동맹(CGT)의 '계급평화' 노선에 반대하여 노동자계급 대중적 투쟁 방침을 선언했습니다. 이들은 파업행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죠.
1916년은 파업이 활발한 시기였어요. 파업 건수가 전년에 비해 3배 이상(315건), 파업 참가자수는 4배 이상(4만1천 명), 파업으로 인한 노동손실일수는 5배 이상(23만6천 일)으로 늘어났고 성격도 한층 완강해졌습니다. 1916년 말 무렵에는 파업투쟁이 확대되어 총파업으로 되는 경우도 있었죠. 주로 섬유, 운수, 금속, 화학 부문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주도했습니다. 금속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파리의 군수품 공장에서 벌인 12월 파업은 1916년에 일어난 최대의 파업이었습니다. 공장 종업원 6천 명 중 절반 이상이 참가했던 이 파업은 임금인상뿐만 아니라 반전 요구도 내걸었죠. 이렇듯 1916년 들어 전쟁과 지배세력의 전쟁정책에 반대하는 움직임은 전국적으로 퍼졌습니다. 게다가 전쟁에 대한 항의는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농민, 병사들에게도 확대되어 대중적 움직임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영국
영국의 노동당과 노동조합 지도자 대부분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거국일치정책과 계급협조정책의 적극적으로 협조했습니다. 1914년 8월24일, 영국노동조합회의(TUC)는 기업주 측과 이른바 '산업강화'에 조인했습니다. 여기에는 노동조합이 전쟁 종료 때까지 파업을 하지 않기로 하는 약속이 포함되었어요. 영국 노동당 집행위원회도 부르주아 정당들과 전쟁 기간 동안 선거휴전을 하는 것과 병사모집 캠페인에 참여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노동조합 운동은 이론적으로는 국제주의자에 동조하고 국내외의 '군국주의'에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는 철두철미하게 운동의 총력을 국가 방침 쪽으로 기울였어요. 열렬하고 정력적인 노동당원들 몇몇과 사회주의 단체인 독립노동당(ILP) 소속의 조합원들 등 평화주의를 확신하는 소수가 있긴 했지만, 모든 산업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커다란 격려와 원조를 받으며 군기 아래 집결했습니다. "독일이 승리한다면, 유럽 민주주의와 자유의 패배와 일소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는 것이 영국 노동자조직 지도자들이 제2인터내셔널의 반전 결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명분으로 내세우는 논리였죠.
1915년 3월, 노동조합 운동 지도자들은 정부조정이 노동쟁의 해결의 주요 방책이 되는 것과 여성과 청년의 고용통제 문제에서 노동조합의 권리를 대폭적으로 삭감하는 것을 승인했습니다. 시간외 노동, 심야작업, 일요일 노동의 제한 폐지 등에도 동의했죠. 계속해서 정부는 국가적인 비상사태라는 것을 구실로 노동조합에게 이전보다 더 큰 애국심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호응하여 노동조합은 전쟁 사업에 관련된 구인광고를 금지하고 다른 지역 노동자와 고용계약을 맺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받아들였죠. 업무를 둘러싼 고용주들의 경쟁을 폐기하는 이 법은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대한 유례 없는 간섭이었습니다. 그리고 1916년에는 크롬웰 시대이래 처음으로 국민개병제를 뼈대로 하는 병역법을 제정하는 것에 노동당 집행위원회와 영국 노동조합회의(TUC)가 동의했습니다. 사회배외주의자들도 노동자들을 전쟁 봉사의 길로 이끌기 위해 열성적이었죠.
노동당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이러한 적극적인 양보는 영국의 지배층에게 충분히 평가받았습니다. 노동당 사무총장이었던 아서 헨더슨은 연합정부의 일원으로 입각했고 다른 노동당 간부 두 사람이 정부 내부의 책임 있는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런 계급협조 방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노동자들의 저항에 부닥치게 되었죠. 1915년 초부터 파업이 급증했고, 1916년 말부터 1917년 초에 걸쳐서는 현장위원(shop steward) 및 노동자위원회가 전국규모에서 조직되어 '현장위원 및 노동자위원회 전국운동'이 결성되었습니다. "직장의 노동조건에 대한 통제와 고용환경에 대한 규제를 획득하고, 노동자들이 승리하는 그 날까지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계급적 기초에 바탕을 둔 노동자조직을 결성한다"는 것이 규약에 명기된 이 운동의 목적이었죠.
1915년 영국의 파업운동은 그 규모가 매우 컸습니다. 1915년에는 627건의 파업이 일어났고 노동자 44만8천 명이 파업에 참가했으며, 노동손실일수는 295만3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많은 파업들이 승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1915년의 파업들은 151건에 노동자 2만5천 명이 참가했고, 노동손실일수가 14만7천 일이었던 1914년 후반 6개월과 비교하면 그 규모를 어림할 수 있지요. 1916년에는 전년에 비해 파업이 다소 줄어들어서, 파업건수는 532건이었고 파업참가자수는 27만6천 명이었으며, 노동손실일수는 244만6천 일 이었습니다.
1915∼1916년에 일어난 파업 거의 대부분 노조의 통제를 받지 않은 것(wildcat strike)이었습니다. 정부는 그러한 파업들을 빌미로 정부는 일련의 엄격한 정책들을 시행했어요. 1915년 7월에 발효되고 1916년 1월에 보완된 군수생산법은 노동쟁의를 강제조정하고 노동조합의 권리를 중대하게 제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법령은 사실상 파업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죠. 그리고 애초 기계공업과 조선업종에만 적용되었던 이 법은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중요 공업부문 전반으로 확장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탄압과 노동조합 지도부의 노자협조정책도 노동운동과 민주주의운동이 아래로부터 분출하는 것을 억누를 수는 없었습니다. 1915년 봄, 여름부터 대중적 반전행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집회에서 전쟁을 침략적·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이를 비난하는 결의를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1915년 겨울에서 1916년 봄에 걸쳐서 전개되었던 병역의무제 시행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반전투쟁은 매우 격렬했습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치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죠. '반징병제위원회'가 영국의 공업중심지 곳곳에 설치되어, 1916년 초 의회에 상정된 병역의무법안을 반대하는 대중운동을 조직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많은 노동조합이 이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고, 1916년 1월에는 반징병제운동 전국협의회가 결성됐습니다. 징병제반대운동은 1916년 2월에 병역법이 채택된 뒤에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전국에서 집회와 시위가 일어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영국노동조합회의가 총파업을 행사하겠고 압력을 가하기도 했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장기적인 전쟁을 치르기에는 자원이 턱없이 부족했고 지역에 따라 경제발전의 불균등이 격심했어요. 전쟁은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사회적·민족적 모순의 심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따르는 피해와 손실이 막대해지면서 국민들의 불만은 점점 커졌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국내평화' 선전과 민족적 반목, 그리고 군사·관료적 강제제도의 영향 또한 받지 않을 수 없었죠.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외국 제국주의에 예속화되지 않기 위해" 조국방위 전쟁을 적극 지지해야 한다고 선전했습니다. 노동조합 간부들도 기업과 '국내 평화'에 관한 형식적 협정을 체결하지는 않았지만 노동자들의 권익투쟁에 대해서 부정적 태도를 취하면서 계급협조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럼에도 전쟁이 발발한 바로 뒤, 오스트리아의 몇몇 지역에서는 소규모 파업과 집회,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1914년 말과 1915년 초에 걸쳐 임금 인하와 노동일의 연장에 반대하고 물가등귀에 항의하는 파업이 체코와 오스트리아의 광업, 체코의 섬유산업, 빈의 금속산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1916년 봄부터는 파업이 더욱 빈번해지고 대중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전에 비해서 노동자들의 요구 관철 정도도 증가했지요. 투쟁들은 경찰이나 군대와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점점 반전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헝가리에서는 이미 1915년 봄부터 물가폭등에 항의하는 투쟁과 파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파업투쟁을 주도한 쪽은 군수산업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부다페스트에서 시작된 파업이 비교적 평온하였던 지방으로 확산되는 등 1916년의 파업투쟁은 활기를 띠었죠. 같은 해 여름에는 농업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습니다. 이처럼 전쟁이 발발하고 3년째에 접어들면서 반전 분위기가 고조되었죠.
전쟁이 진행되면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사이의 대립도 날카로워졌어요. 헝가리 의회에서는 양국을 결합시키고 있는 이중제국의 조건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야당 측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헝가리와 제국 전체 사이의 동맹, 즉 독일과의 동맹을 파괴할 것을 요구하는 발언들도 점점 많아졌죠. 1916년 말 군사적으로 큰 패배를 겪고 경제적·정치적 위기가 격화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부르주아 층 안에서는 타협적 강화를 주장하는 경향이 우세해졌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를 부른 직접적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한 1914년 8월부터 이탈리아가 참전한 1915년 5월까지,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은 거의 끊이질 않았습니다. 1914년 8월에는 실업과 물가앙등, 그리고 임금 인하에 반대하는 저항행동이 전국에서 일어났고, 토리노의 자동차공장 노동자와 카탄자로의 전차 종업원이 파업을 벌였습니다. 1914년 가을에는 '전쟁을 중지하라', '빵과 일을 달라'는 슬로건을 내건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토리노, 베네치아, 피사, 밀라노, 플로렌스 등의 도시들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1914년 9월에 열린 이탈리아 노동조합 대회에서는 모든 교전국과 중립국의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전쟁이 초래한 위기를 자본주의제도와 군주제도의 폐지를 위한 계기로 삼자는 주장이 역설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노동자의 반전 움직임과 저항에 단호하게 대응했습니다. 1915년 초 이탈리아의 참전계획에 항의하는 렉지오 에밀리아 노동자들의 집회에서 경찰이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시위 참가자들은 완강하게 저항했고, 쌍방에서 사상자가 발생했죠.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서 집회와 시위가 '사회질서에 위협'을 줄 경우, 이를 금지할 수 있는 권한을 경찰서장에게 부여하는 법령을 제정했습니다. 노동자의 민주주의적 권리가 경찰의 전횡에 맡겨져 버린 것이지요. 결국 각지의 경찰 당국은 이 법령에 근거해서 반전집회 뿐만 아니라 공동체 조직과 노동조합의 다른 집회까지도 금지했습니다.
1914년 8월4일 이탈리아 사회당(PSI)과 노동총동맹(CGL), 이탈리아 노동조합연맹 지도기관 합동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은 참전에 반대하며 이탈리아가 중립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그러나 1915년 여름에 막상 이탈리아가 참전하게 되자 사회개량주의자들과 노동조합 온건파 간부들은 전쟁을 저지한다는 이전의 결정을 뒤집으려 온갖 노력을 쏟았습니다. 서유럽 다른 나라 사회배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국내평화'정책을 실행하려 열심이었죠. 이들은 이탈리아가 협상국 측과 동일 보조를 취하며 참전하는 것을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정부와 기업 측에 협력하면서 '산업위원회'에 참가했습니다.
이탈리아가 참전을 결정한 직후 정부는 '산업동원' 포고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군부의 주문을 수행하는 공장 노동자와 직원들에게 군대 의무가 주어졌지요. 그 공장의 노동자들은 파업권을 상실했고 일을 그만둔다든지 또는 자기 마음대로 다른 기업으로 이동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부질서의 위반은 전시법규로 규율되었고, 징병유예를 취득해도 기업관리부의 결정으로 취소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소한 과실에 대해서도 벌금이 부과되었는가하면 구속되기도 했죠.
그러나 억압정책은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대중운동의 흐름을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공장위원회와 같은 새로운 노동자 조직이 생겨나면서 투쟁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이런 위원회들은 노동자들이 직접 선출하여 구성되었죠. 이 조직들은 대중적이고 적극적이었고 노동운동의 변혁적 지향을 잘 반영했습니다.
1915년 후반에는 베네치아, 밀라노, 시칠리아, 기타 지역에서 전시공채에 반대하는 격렬하면서도 자연발생적인 시위와 집회가 열렸습니다. 파업도 빈번했죠. 1915년 6∼7월 파업은 거의 모든 산업에 파급되기도 했습니다. 1915년 한 해 동안 발생한 파업은 53건, 파업 참가자는 13만2천 명, 노동손실일수는 63만3천 일이었습니다. 1916년에는 파업건수와 파업 참가자수는 다소 줄었으나 노동손실일수는 73만7천 일로 증가했습니다.
혹심한 궁핍, 광범한 실업, 식료품의 부족과 가격폭등, 노동강화 등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상황은 '계급적 휴전'을 고수할 수가 없는 것이었어요. 이에 따라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반전과 변혁 지향의 그룹이 형성되었고, 다양한 형태의 저항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탈리아 노동총동맹 내에서도 많은 노동자들이 이런 움직임에 대해 동조하였죠.

미국
미국에서도 반전 분위기가 조성됐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성격을 띠었습니다. 미국 노동운동의 반전 분위기는 다른 나라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감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투쟁의 필요성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죠. 중립적인 처지에 있는 미국에서 고조된 반전 분위기는 미국노동총연맹(AFL)의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참전준비가 진행됨에 따라 미국노동총연맹 지도부는 온건한 부르주아적 평화주의 노선에서 군사력 증강을 꾀하는 부르주아지와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방향으로 방침을 바꾸었죠. 미국노동총연맹 지도부의 이 같은 방침 전환은 지방조직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렇지만 1915년 열린 미국노동총연맹 대회는 결국 군국주의적 캠페인에 동의했어요. 이런 가운데서도 많은 대의원들의 강한 요구에 따라 대회는 징병제와 학생 군사훈련 도입에 반대하는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미국에서 반전운동을 추진한 세력은 주로 사회당의 일부 그룹과 세계산업노동자조합(IWW)이었습니다. 이들은 미국의 참전과 전쟁에 대한 '국민적 준비' 캠페인에 반대하며 집회와 시위를 조직했습니다. 이에 대해 정부는 파업투쟁과 반전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세계산업노동자조합의 활동 자체에 대해서도 엄격한 통제를 가했죠.
전쟁 붐이 일어나면서 파업은 불어났어요. 전쟁 붐으로 인한 경제성장은 생활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노동자 투쟁에 유리한 조건이었죠. 1915년 미국에서는 1천405건의 파업이 일어났고 노동자 50만4천 명이 파업에 참가했는데, 1916년에는 파업건수는 3천786건으로 증가했고, 파업참가 노동자수는 160만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이에 따라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인상 등 사용자들의 양보를 받아냈죠. 파업투쟁들은 반전 시위, '참전준비 퍼레이드' 참가자들과의 충돌, 의용병 참가 거부, 병역의무제 도입 반대 등을 수반했습니다. 이러한 파업과 반군국주의 투쟁들이 미국의 참전준비를 방해하여, 전쟁'준비' 일정을 지연시킬 수 있었죠.

제1차 대전 중 노동조합의 활동
무장한 수천만 명이 대치하고 있음에도 1916년 당시 주요 전선에서는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전선과 후방에서는 수백만 명이 사망했고 식량부족과 기아 사태가 심각해졌죠. 생필품의 부족과 물가등귀가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열악하기 그지없는 노동조건이 노동자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가운데 각종 탄압이 강화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이 노동자와 병사 그리고 농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으며, 공공연한 반정부적 저항을 야기했습니다.
몇몇 국가에서는 자본가들이 노동계급의 정치지도자와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자국 정부의 전쟁기구 속에 완전히 끌어넣기 위해 계급협조 정책을 강행했습니다 노동자 대표를 협력자의 지위에 고정시키려는 이러한 작업은 각 나라의 국내정세에 따라 다양하게 진행됐죠. 자본가들은 노동운동이 전쟁을 이용해서 위신을 높이거나 일반적 입장을 강화하는 것을 경계하는 데에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지배계급이 노동운동 관계자를 전시 지배체제의 일부로 이용하면서 기대했고, 또 획득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첫째, 전쟁에 대한 전면적인 찬성. 그럼으로써 노동자들이 대량학살을 묵인하도록 할 수 있었죠. 둘째, 전시 중 사회평화의 확보. 즉,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을 사실상 해소하는 것입니다. 지배계급은 완전히 길들여놓은 노동운동 내부 그들의 종복들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범위에서, '사회평화'를 획득했죠.
1916년에 접어들면서 교전 국가들에서는 계급적 투쟁이 격화되고 각지에서는 파업이 고양되었습니다.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의 군수공장에서는 장기파업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또 파업이 총파업으로 전화된 경우도 있었죠. 1917년 초에는 거의 모든 교전 국가들에서 반전운동이 대중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제국주의전쟁을 사회변혁투쟁으로 전화시키려는 움직임마저 있었어요.
변혁을 지향한 노동자들은 사회개량주의자들이 파괴한 인터내셔널과 전쟁반대 투쟁을 되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전쟁 중에 스위스의 짐머발트(1915년 9월)와 키엔탈(1916년 4월)에서 반전과 사회변혁을 요구하는 회의가 열리기도 했죠.

출처 : 노동사회 2004년 1월호, 통권 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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