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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교육정보공개, 논란을 파헤친다!

교육정보공개,

논란을 파헤친다!

 

|| 투데이 편집부

 

 


<빅브라더>의 망령이 고개를 들다

영국의 저명한 소설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은 1949년에 발표한 “1984년”에서 미래에 도래할 정보사회의 위험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빅브라더>는 텔레스크린을 통해 소설속 사회를 끊임없이 감시한다. 이는 사회 곳곳, 심지어는 최후의 개인실이라는 화장실에까지 설치되어 있다. 실로 가공할 만한 개인정보침해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정말 두렵게도, 그가 소설을 통해 예견한 이런 미래의 사회는 지금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온 듯하다. 굳이 ‘감시’라는 이미지와 직접적으로 매치되는 “몰래카메라”같은 것들만을 거론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 눈앞에 다가온 정보사회 그 자체가 우리의 정보인권뿐만 아니라 삶 전반을 옥죄어 오기 시작했다. 2003년에 교육현장을 시끄럽게 했던 NEIS도입 논란에서부터, 현재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을 둘러싼 공방은 정보인권침해의 심각성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던져진 또하나의 불덩이들이 있다. 지난 4월 30일 국회에 발의된 ‘교육관련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특별법안’(이하 교육정보공개법)과 지난 4월 27일 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 등이 교육인적자원부를 상대로 낸 정보공개거부처분 취소소송에 대해 서울고법이 “2002~2005학년도 수능 원데이터와 2002, 2003년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자료를 공개하라”고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제 교육에 있어서도 개인의 통제범위를 벗어난 국가적 정보독점권력이 우리의 삶을 감시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빅브라더>의 실체가 점점 더 노골화되어 가고 있다.



‘공개’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교육 구조조정

 

 

교육정보공개법은 한나라당 이주호 의원이 대표발의 한 것으로, 초중고교는 학업 성취도 등 15가지 정보를 공개하고, 대학은 졸업생 취업률 등 13가지 정보를 매년 한 차례씩 공개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이 낸 소송의 내용 또한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학생의 학업성취도를 전면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는 것을 봤을때, 이 두 사안은 NEIS이후 잠잠했던 학생정보인권의 문제를 다시금 수면위로 부상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학교간 학업수준 격차를 여과없이 내 보이면서 학교간, 지역간 서열화를 통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교육 구조조정의 기제로 쓰일 여지가 다분하다.


교육정보공개를 밀어붙인 진영에서는 학업성취에 대한 정보가 우리 교육현실은 명확하게 진단하고 올바른 연구를 위해 쓰일 자료이기 때문에 개인정보 침해에 대한 우려는 기우에 불과하다고 이야기 한다. 특히 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의 이명희 교수(공주대 역사교육과)는 “교육관련 정보가 성역 없이 공개됨에 따라 우리의 교육현실을 보다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어 (…) 합리적인 교육정책 수립을 촉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또한 이를 통해 “학부모와 국민의 교육수요자로서의 알 권리 등이 확대되어” “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는 말을 통해 지난 김영삼 정부의 5.31교육개혁안 이후에 이들이 그토록 강변해 왔던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설파하고 있다.1)

그러나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공개되어 연구용으로 쓰인다면 그것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연구인가? 위의 사안들이 공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수능 원데이터를 중심으로 한 ‘시험 성적’이다. 학생의 전인적 발달을 도모하는 교육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학생의 전인적 발달을 도모하기 위한 자료라면 대부분 사적인 것이거나 통계적으로 수치화 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공개해선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자료들은 결국 학교간 학업격차를 아주 객관적인 통계치로 나타내어 학교간 서열을 분명히 드러내 주는데에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이는 최근들어 고교등급제에 군침을 흘리고 있는 각 대학들이 그들 스스로 신입생 입학성적을 가지고 자체적으로 고교간 서열을 매기는 수고를 덜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될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의 밑바탕에는 ‘성적 공개’를 통한 경쟁의 강화만이 교육의 질을 향상시킬 것이라는 장밋빛 희망이 깔려 있다. 이런 주장이 100%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성적공개는 분명 교육의 질을 향상시킬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학생을 위한 교육의 공공성 확보를 통해서가 아니라 학생들간의 출혈적인 입시경쟁을 통한 시험성적 올리기를 통해서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봉사하게 될 정보공개와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들의 연구결과란 결국 ‘입시경쟁에서 우위에 서기를 원하는 교육 수요자(소비자) 중심의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으로 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전혀 섣부른 판단이 아니다. ‘자율적인 선택권’이라는 이름하에 진행되고 있는 서울시 교육청의 고등학교선택권 강화 정책도 이러한 서열화와 제살 깎아먹기식 경쟁을 불러오는데 한 몫 할 것이다.

또한 이들의 주장 속에는 정보공개 자체가 가져올 학생인권의 문제를 ‘연구용이기 때문에 괜찮다’라는 말로 은폐하려 하고 있지만, 아전인수에 불과하다. 정보인권의 개념을 집약하는 프라이버시(Privacy)라는 개념은 “혼자있을 권리”(Right to be let alone)라는 소극적 개념이 아니라 “자신에 관한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라는 적극적 개념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인해 개인의 신상정보에 관한 수집․분석․검색․복제․유통이 훨씬 용이해지고, 이런 개인정보를 집적(集積)하는 기술을 가진 국가-자본의 힘이 비대칭적으로 커져나가는 현 상황에서의 정보인권의 문제는 단지 학생의 수치심․모멸감의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2003년에 추진된 NEIS 같은 학교정보시스템의 구축이 삼성을 비롯한 거대자본의 향후 인적자원관리의 편리함을 위해 봉사할 것이며, 이를 통해 집적되는 개인정보들은 이들 자본의 상업적 이해를 위해 쓰이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교육정보공개의 문제 또한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2) 그렇기에 무한히 팽창하고 있는 정보기술이 개인정보를 어떤 식으로 악용할 것인지 예상하는 것은 공상과학영화의 결말을 관망하는 것처럼 속 편하게 지켜볼 일만은 아니다.



공범자들에게 기대하지 말고,

신자유주의 교육에

단호히 맞서 싸우자!

학생의 학업성취도 정보 공개를 통해 교육에서의 경쟁심화를 부추기려는 흐름은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발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진보진영의 움직임은 아직 더디기만 하다. 몇몇 교육운동 단체들이 긴급히 성명을 내고 기자회견을 갖긴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는 학생의 다양한 정체성을 ‘학업성취도’라는 수치 하나로 짓밟아버리고는 끊임없이 평가하고 줄세우기에만 골몰하려는 신자유주의 교육재편에 맞서 단호히 싸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무현 정권 자체가 이런 신자유주의 교육재편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이라는 점, 그래서 이들에 대한 분명한 반대의 입장을 갖고 싸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현재 교육정보공개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두고 보수진영과 교육부가 마찰을 빚는 이상한 형국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교육부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정권 자체가 이런 흐름이 가능하게끔 만든 장본인이다. 한미FTA 교육서비스 개방, 대학 구조조정, 학교 선택권 강화, 논술강화를 통한 실질적인 3불정책 무력화 등 정부의 행동은 하나같이 이율배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의 정책기조와 맞지 않는 정책을 철회하라” 또는 “노무현 대통령은 교육정보공개법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라”는 별 효과도 없는 주장을 거두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교육재편에 맞서는 대중운동의 자율성을 강화해 나가는 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해답일 뿐이다.


1) 이명희,「수능 및 학업성취도 평가 관련 원자료 공개와 활용방안」, 『9회 함께교육포럼 자료집』.


2) 그런 면에서 미셸 푸코가 현대 정보사회를 판옵티콘(Panopticon)에 비유한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판옵티콘은 1791년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제안한 개념으로, 학교 공장 병원 감옥 등에서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감시하는 체계를 뜻한다. 푸코에게 판옵티콘은 한 사람의 간수가 모든 죄수를 감시하는 원형감옥의 의미를 지닌다. 원형감옥에서 간수는 죄수들을 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망루위의 간수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죄수들은 어떻게 감시당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할 뿐,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기 때문에 판옵티콘에 자발적으로 종속된다. 푸코는 개인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한 모든 자료가 저장되는 데이터베이스가 마치 판옵티콘이 죄수들을 감시하듯이 출산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대중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전체주의적 권력의 도구로 잘못 사용될 가능성에 주목한 것이다. 즉 판옵티콘은 빅 브라더가 정보기술로 구축한 감시체계의 결정판인 셈이다.
교육정보공개는 판옵티콘과 같이 개인의 학업성취도를 계량화-수치화하여 거대자본-정보시스템에 종속되게 하고 ‘평가’라는 보이지 않는 원형감옥 속에서 일상적인 경쟁을 개인에게 강요하면서 대중을 통제하는 매커니즘으로 작용할 것이다.


▶조지 오웰 George Or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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