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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나의 삶, 나의 길 2부 : 새롭게, 또 새롭게 새로움은 나의 힘(장혜옥/ 전 전교조 위원장)

[특집 : 나의 삶, 나의 길] 2부

새롭게, 또 새롭게

새로움은 나의 힘

 

장혜옥/ 전 전교조 위원장

 

교실을 떠난 나의 하루는 어색하다. 햇살 가득한 거리에서 편한 자유를 즐기지만 그 시간들이 당황스럽다. 내 존재 조건 그 자체였던 교실을 이젠 세상으로 바꾸어야 했다. 안동에서 해직된 교사는 나 외에 6명, 그들과 함께 전교조의 실체를 만들어 가야 한다. 우리는 매일 학교 방문에 나섰다. 작은 차에 꼭 끼어 타고 경북 북부 산골 골골을 돌아다녔다. 전교조 신문과 선전지, 우리들의 말이 무기였다.

그 중 한 분은 울분으로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다. 그가 남긴 시를 읽으며 우린 매일 울었다. 착하고 아름다웠던 또 한 분은 산골 누추한 방에서 연탄가스중독사를 당했다. 배낭에 신문이며 선전지를 가득 담고 산골 학교를 누비던 그 맑은 눈망울이 서럽고 서러워, 최초의 전교조장으로 예를 갖춰 보내드렸다. 하늘에선 비를 뿌렸고 전국에서 모인 해직교사들도 목 놓아 울었다. 해직의 부당함을 외치며 집회, 농성, 시위하는 나날이 월례 행사로 이어졌고 그 때마다 닭장차에 끌려가고 유치장에 갇히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고, 기쁨이고, 위로였다. 그래서 우린 ‘동지’였고, 이름 뒤에 ‘선생님’ 대신 ‘동지’라 붙여 불렀다.


1년 동안 학교 방문을 하며 조합원을 일구고, 후원회원을 조직하는 일을 하며 안동 땅을 섭렵하고 나니 경북 전체는 어떨까? 궁금해졌다. 마침 권유도 있어, 경북 지부 정책실장을 맡게 되었다. 경북엔 101명의 해직교사가 대부분 활동하였으며 이미 18개의 지회가 사무실도 갖추고 있었다. 그 때 경북 지부 사무실은 동대구역 근처여서 안동에서 동대구까지 기차로 통근했다. 왕복 4시간의 통근 시간은 고마운 독서 시간이다. 정책실장이란 직책의 엄중함 때문에 독서를 엄청나게 했다. 하루 2-5권은 읽었으니 웬만한 사회과학 책은 그 때 다 읽은 셈이다. 덕분에 눈이 몹시 나빠져 그 해 이후론 차에서 책 읽는 일은 되도록 안 한다. 특별한 학습 소모임도 여럿 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 공부하고 헤어지는 일도 많았다. 도대체 왜 전교조에 가입했다고 해직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독서와 학습은 하루 10시간씩 투자해도 모자라는 온전한 열망이었다. 경북의 여러 지회를 다니며 만나는 동지들은 사람에 대한 신뢰의 아름다움을 알게 해준 새로운 힘이었다. 


1년이 지나니 이젠 전체가 궁금해졌다. 전교조는 전국 조직인데 전국은 어떨까? 원하면 통한다던가! 마침 경북 출신의 위원장께서 본부 활동을 권유하여, 본부가 있는 서울로 자리를 옮겼다. 교육선전국원이 되어 어렵기만(?) 한 286 컴퓨터와 씨름하며 실무를 하면서도, 전교조를 키워나가는 훌륭한 지도 동지들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큰 자부심이었다. 본부에서 일하는 100여명의 동지들은 나이를 떠나 내겐 모두 선배였고 스승이었다. 정책 지향을 뚜렷이 달리하는 두 그룹이 함께 이룬 통합 집행부여서 더 배울 것이 많았다.

서울 생활의 또 다른 의미는, 독립 선언을 하고 부모님 곁을 떠난 지 16년 만에, 다시 부모님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키워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단식 농성하던 명동 성당까지 찾아오셔 해직의 과정을 따뜻한 긍정으로 받아들여 주신 아버지와 바깥으로 나도는 딸에게 단 한 번도 비난 말씀을 안 하시고 무조건 신뢰해 주신 어머니에게 감사드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본부 해직 교사 중 뜻밖에 ‘지음지기(知音知己)’를 만나, 젠더 마인드 친구로서 인생의 큰 조언자를 얻게 된 것은 하늘의 선물이었다. 이후 우리 마음 맞는 비혼들은 명절이며 휴가 때에 더불어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 확대 가족의 기쁨을 이어가고 있다. 

처음으로 술도 배웠다. 격렬한 논쟁이 수시로 터졌고, 으레 술자리로 이어졌다. 맥주 1잔으로 시작한 술이 소주 2-3병으로 1년 만에 급성장할 만큼 나는 매일 격렬했다. 그 와중에 여성 동지들과 멘토링을 갖게 된 것은 여성주의 인식을 실천에 옮기는 소중한 과정이었다.

이렇게 날마다 새로운 격정으로 채워가는 1년이 끝날 무렵, 옆집에서 난 불이 옮겨 붙으며 우리 집을 몽땅 태워버렸다. 부모님의 70 평생 재산이 잿더미가 되었고 아울러 내가 가지고 있었던 럭셔리 취향의 모든 것들도 다 사라졌다. 깨끗해졌다. 친구가 사 준 골덴바지와 스웨터 두 벌로 겨울을 나면서 오히려 가벼워진 새로움을 느꼈다. 아버지 병은 깊어지셨고 쓸쓸히 돌아가신 후에야 복직이 되었다.


영주는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었다. 소백산의 깊은 아름다움과 순후한 풍경, 따뜻한 농촌의 정겨움은 곧 운명 같은 존재의 땅이 되었다. 호주 독립을 하고 호적도 옮겼다. 이제 공문서 상 완전히 독립했고, 영주 ‘풍기 사람’이 되었다. 1학급짜리 작은 학교 아이들은 그냥 ‘꽃’이었다. 그 꽃밭에 어우러져 나도 꽃이 되었고, 아이들 사랑만으로 넘치는 나날을 보냈다.

지부 대의원, 전국 대의원 등을 계속하면서 조직의 의결 구조를 배우고 지회 운영 활동을 하면서 전교조 합법화를 맞이했다. 10년, 눈물겨운 투쟁의 역사적 산물이었다.

다시 인문계 여고로 전근하면서 ‘투쟁할 꺼리’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7차 교육과정이 문제였다. 수준별, 선택형 교육과정은 무한 경쟁의 고리였고 비현실적인 정책들이 교사를 억압했다. 경북지부 ‘7차 교육과정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민주화 정부 교육개혁’의 허상에 저항하는 일선에 서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시장 만능주의’ 정책들이 어떻게 교육과 인간을 유린하는지 공부하고, 교사들에게 알려 나가면서 밀려들어오는 교원정책(성과급 제도 등)들과 맞서며 투쟁의 의지가 높아졌다. 그 사이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남겨준 재산 때문에 형제들끼리 작은 다툼도 생겨 가족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전교조와 만나지 14년, 늘 새롭게 새롭게 배우며 변화해 가는 세월 끝에 이제 권한과 책임을 지는 선출직에 나섰다. 영주 지회장은 나의 첫 선출 ‘관직(?)’으로서 일선 조직의 책무를 감당하는 중대한 지위였다. 겸손할 것과 정성을 다할 것, 사람을 귀히 여길 것을 다짐하며 겨우 1년을 감당했는데, 전교조 10대 수석부위원장 선출직에 나설 것을 제의 받았다. 추천해 주신 동지들이 고마워 겁 없이 나섰고 당선되어 다시 서울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서울, 본부에서 책임과 권한을 갖고 투쟁 일선에 선다는 것은 엄격한 각오를 가져야 했다. 끊임없는 독서와 미디어 읽기, 투쟁 전선을 열성으로 지켜가는 것은 절대 임무였다. 기간제 여교사에게 차 심부름을 시킨 교장의 횡포에 저항하다 터진 일명 ‘보성초 사건’으로 이데올로기 폭력을 당하며 시작한 집행부 활동은, 학생 정보 인권을 인터넷에서 유통하려는 ‘네이스(NEIS, 학생정보시스템)’를 교육부가 밀어붙이는데 저항하면서 2년간의 긴 투쟁으로 이어졌다. 긴 농성과 시위, 연가 투쟁이 있었고 공권력은 무섭게 억압하며 들어왔다. 우리 집안 5대 전체에 걸쳐 현재까지 유일하게 ‘법정에 서게 된 경험’은 무척 새로웠다. 

예년과 다른 언론의 관심 속에 여러 차례 미디어 토론에 참여하게 되었다. 미디어 5사(KBS, MBC, SBS, EBS, K-TV 등)에 2-3차례 나가고 각 라디오 방송사에 수없이 출연하면서 길거리에서도 알아보는 이가 생길 만큼 유명(?)해지기도 했다. 각종 타 조직의 지위를 맡게도 되었고, 중앙노동위원회 노동자위원 역할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을 나누는 소중한 경험으로 쌓여갔다.

네이스 투쟁은 9만 조합원 전원이 실천하며 전선에 서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대중들에게 고통스러웠다. 투쟁을 접자는 요구들이 분출했고, 탈퇴자들에게 명분이 되었다. 그 어려움 속에 11대 선거가 치러졌고, 경북 지부장으로 출마했지만 특히 네이스 투쟁을 어려워했던 경북 동지들은 내 열정을 외면했다. 부끄러운 참패를 대중의 명령으로 알고 돌아온 학교,  우리 아이들은 여전히 빛이고 꽃이었다. 아이들의 모든 일탈을 웃으며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게 되었고, 수업의 노하우는 스스로도 만족할 만큼 통합적이고 일관성이 녹아 있었다. 그러나, 동료들과 함께, 교사로서의 자부심이 겸손하게 소통되는 나날 속에 닥쳐온 정부의 ‘교원평가’ 정책은, 교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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