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19호] 두 가지 '길들이기'(페다고지 칼럼)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길들이기’라는 말을 섣불리 썼다가는 봉변당하기 쉬울 것 같다. 하지만 길들이기도 뜻 나름이란 사실을 아는가? 사전에서는 길들이기를 ‘~일에 익숙해지다’라고 정의한다. 경상도 지역의 노인분들은 고어의 영향으로 ‘길’ 대신 ‘질’을 사용하여 ‘질들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길들이기’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대략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길들이기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익숙해지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길들이기’의 대명사는 뭐니 뭐니 해도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이다. 모 대학교 논술에 나왔다고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일제히 공부를 해야 했던 바로 그 텍스트다. 이 책에서 사막에서 만난 여우는 어린 왕장에게 ‘길들이기’의 의미를 말해준다. 영화 라디오스타에서 쌍팔년도 가수왕을 차지했지만 속된 말로 ‘한물 간 가수’ 최곤(박중훈)이 매니저 박민수(안성기)와 지란지교를 맺는 것 같이. 이런 점에서 길들이기는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것’, 곧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지구 반대 편에서는 또 다른 의미의 ‘길들이기’가 벌어진다.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에게 폭력과 억압으로 인한 공포를 내면화할 때, 우리는 그것을 ‘길들이기’라고 표현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맘에 들지 않으면 ‘죄가 있든 없든 박살낸다.’는 것을 보여줄 때, 우리는 이것을 ‘길들이기’라고 규정했다. 한국도 ‘길들이기’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다. 반세기 동안 미 헤게모니 하에서 한없이 착하고, 모범적인 나라가 되었으니.

한미FTA의 4대 선결조건으로 명성이 높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허용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K모 방송사의 문제아 이강택 PD가 사고를 쳤다. 감히 공장형 쇠고기 농장에서 생산(!)되는 미국산 쇠고기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파헤친 것이다. 한미FTA 앞두고 미국 정부가 미국축산자본의 이익을 대변하여 한국 정부를 길들이려 하는데, 이강택 PD는 딴지를 걸었다.


사실 이강택 PD는 초범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이후 북미지역의 현실을 고발하더니, 그 직후에는 베네수엘라를 찾아 미국이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차베스를 취재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축산자본의 압력에 굴복하고 있는 모습을 고발하여 또 한 번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이렇게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나보다.


요즘 교육부가 하는 ‘길들이기’는 참 가관이다. 교육부는 예비교사들도 길을 들이려는 것 같다. 얼마 전 교육부에서 교대 총장들 만나서 학생들 반발 그만하게 대책 좀 세우라고 한 모양이다. 중장기 교원수급계획을 재검토하겠다고 달래는 걸 보면 어지간히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다. 주기적으로 터지는 교원양성임용 문제가 자신들의 잘못이라는 생각은 안하고, 그저 예비교사들이 길들여지지 않아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교육부는 이참에 아예 교원노조 위원장 선거에도 직접 개입한다. 교육부는 장혜옥 위원장 등 3팀이 출마한 전교조 선거에서, ‘장혜옥 후보는 (해직자이기 때문에)교사가 아니므로 조합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아예 전교조 위원장을 자신들이 임명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자신들이 전교조 선거관리위원회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 어이없는 일이 전교조 길들이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사람들은 싸우면서 미운정, 고운정이 든다는데 어찌 된 것이 교육부와 예비교사, 교육부와 교사간에는 별로 미운정, 고운정이 드는 것 같지 않다. ‘옛말에 틀린 것 하나도 없다.’는 말은 어쩌면 틀린 모양이다. 교육부의 ‘목 꼿꼿하게 세우고, 지지 않겠다고 까불어?’라는 식의 태도를 보면 부모님이 하시던 ‘나라에서 하는 일 반대하지 마라.’는 말이 통용되던 시대로의 회귀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린 너무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다. 호랑이로 태어났으나, 오랜 세월 학교에서 길들여져 고양이로 자라왔다. 우리는 호랑이를 고양이라 착각하고, 고양이는 호랑이라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순응에 익숙해진 예비교사들이여 가끔 길들여지지 않아도 좋다. 체제에 순응하는 것이 길들여지는 것이라면, 길들여지는 것을 거부하자. 우리 안의 우애로운 관계를 맺는 그런 길들이기에 익숙해지자. 두 가지 길들이기, 상반되지만 무척 재미있지 않은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