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5/12/14 18:40
Filed Under 이미지적 인간

얼마전 우연히 대학로에서 '손님'이란 연극을 봤다.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아마도 바이올린을 들고 퀭한 눈으로 서 있는 인민군 소녀의 모습을 담은 포스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손님'은 황석영의 동명소설을 연극으로 만든 작품이었다. 매일 매일 병원에서 정신없이 살던 인턴시절... 머리만 닿으면 잔다는 인턴의 잠을 쫓은 소설이었다. 인턴숙소의 허름한 2층침대에서 다른 인턴들이 잠이 깰까봐 스탠드 불 밑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손님'은 읽어본 사람들이 다 아는 것처럼 북한의 인민군과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몇일간의 학살과 폭력에 대한 기록이다. 그 기록은 산자와 죽은자의 대화를 오가며, 그리고 현실과 기억을 오가면서 만들어진다.  


 

한국전쟁이란 시기, 북한의 공산주의라는 이념도 기독교라는 종교도 민중에게는 구원을 주지 못했다. 그저 죽음을 주었을 뿐이다. 올해 웰컴투 동막골에서 보여줬던 화해와 평화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은 것처럼 '손님'은 아프다. 황해도에서 서로를 죽이고 죽였던 몇일간의 악몽 속에서는 이념도 종교도 그저 '손님'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손님'이 아니라 '살인자'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많은 등장인물들과 갈등이 정말로 원작에 충실하게 표현된 연극이었다. 그 어느 배우도 현실성이 떨어지지 않았으며 죽은자와 산자의 만남이라는 원작의 판타지스런 분위기는 현대무용스러운 연출로 그 느낌이 더 생생했다. 거기에 미니멀리즘의 영향인지 단조로운면서도 분위기가 나는 무대장치 역시 분위기와 정서를 살리는데 충분했다.

 

큰 극장에 사람은 얼마 없었지만 무대에 집중해서 그 현실을 목도하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였다. 연극이라는 표현방식이 이렇게 훌륭하게 소설의 감동을 오롯이 살려낼줄은 정말 몰랐다.

 

요즈음...

 

농민들이 맞아 죽고, 맞아서 사경을 헤매고, 국회 앞에서는 여전히 이 추운 날씨에도 물대포가 쏟아지고, 비정규직들은 점점 내몰리고 있고, 홍콩에서는 자본은 화해를 민중은 투쟁을 하고 있고, 이주 노동자들은 노예들이 쫓기는 것처럼 한국사회에서 쫓기고 잡혀가고 수용되고 있다.  

 

황우석 논란으로 첨예하기 드러나기 시작한 한국사회의 파시즘과 경쟁력 이데올로기는 이 시기 한국을 움직이는 이즘인것 같아 섬뜩하고, 사학법 개정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종교계의 힘도 무섭다.

 

손님에 묘사된 것과 같은 '한국전쟁'의 상황은 아니지만 여전히 국가 경쟁력 이데올로기와 초국적 자본의 경쟁력 이데올로기라는 손님이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그리고 이 손님들을 물리쳐 줄 '다른' 세상에 대한 실천과 움직임이라는 손님은 왠지 힘도 없어 보이고 상처투성이인것 같기만 하다. '다른 세상'이라는, '해방'이라는 손님이 '민중'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그리고 '해방'이라는 손님이 '민중'들과 함께 '주인'이 될 수 있을때까지... 또 얼마나 죽고 얼마나 다쳐야 할까?

 

한국전쟁의 비극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덧니; 공부한답시고, 보고서 쓴답시고 따뜻한 방에 앉아서 책장이나 넘기고 컴퓨터나 두들기고 있는 나도 지금의 정세와 실천속에서는 그저 '손님'일 뿐이다. 지금은 그저 '방관'하고 사랑채에서 주인집을 흘긋거리는 손님이지만... 봄이오면 그 비극에 온 몸으로 부딪히고 저항하는 주인의 일원이고 싶다. 손님을 '손님'으로 인식하고 '주인'들이 '주인'임을 외치고 투쟁하는 그 자리에 있고 싶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12/14 18:40 2005/12/14 18:40
TAG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ptdoctor/trackback/177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이재유 2005/12/15 17: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그렇네요, 손님...ㅠㅠ... 이젠 손님을 정리해야겠죠!!!

About

by 해미

Notice

Counter

· Total
: 424972
· Today
: 131
· Yesterday
: 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