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5/12/01 10:28
Filed Under 내 멋대로 살기

#1.

 

한 농민이 맞아 죽고, 비정규개악안을 강행하겠다고 열우당은 난리고, '국익'이라는 이름의 파시즘이 하늘을 찌르는 이 시기 날은 추워지는 이런 시기에 '입시휴가'라는 핑계로 인터넷과 전화로 소식만을 들으며 사는 것이 불편하다. 물론 내가 뭔가를 한다고 크게 달라질 것이 있거나 보탬이 될 만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분노가 넘쳐 흘러야 할 시기에 냉정함이 흐르는 분위기가 이상하다.

 

목숨을 건 구조조정 투쟁을 준비하고 있는 현장에 결합하지 못하는게 못내 아쉽다. 작년 유해요인 조사를 하면서 구조조정 대응팀을 같이 만나고 현장 실천단 강화 사업을 진행하면서 현장의 동지들과 친해지기도 많이 친해졌는데 그 힘든 투쟁에 함께 못하는게 너무 아쉽다.

 

오늘 총파업 집회라는데... 집회대오도 얼마 되지도 않을 것 같던데 숟가락이라도 하나 얹는 심정으로 나가봐야 하는건 아닌지 고민하는 것도 참 불편하다. 그냥 가면 되는 것을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해야 하다니...

 

공부 자체가 불편하고 어색한거는 아니지만 '공부'라는 것을 1순위로 배치한다는 것은 불편하고 어색하다. 96-97 총파업 당시에도 나는 시험을 봤다. 한 과목만 F를 받아도 유급을 당하는 것이 의대의 학제인데 '발생학'이라는 과목을 'F'를 맞았고 재시, 삼시, 사시의 '특별'시험을 거치면서 본과 1학년에 올라갔다. 그 시기 매일 벌어지는 집회를 다니면서 이렇게 저렇게 시험을 봤고 결국 진급에 성공했다. 99년도 경인의학협 집행국을 하면서 노동현장활동을 준비했고 기말고사 땜시 마창에 내려가질 못했다. 내가 시험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온 대오들은 이상관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노활에 같이 하지 못해 어색한 마음을 안고 농성을 시작했었던 기억이 있다. 2000년 대자 투쟁이 한참 벌어지고 있던 당시 나는 본과 4학년 이었고 국가고시를 치러야 했다. 당시 의약분업으로 인한 의사파업을 바라보면서 의사가 되는 것이 정말 싫었던 그 시기 공부하기가 싫었고 열심히 하지도 않았으면서도 어떤 투쟁에도 나가지 못하고 매일을 허비했다. 뭔가 중요한 시기, 항상 시험이라는 것이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나는 한번도 그런 시험을 포기해본적이 없다. 그런시기 항상 '시험'이라는 것은 꽤 높은 수위를 차지하는 사건이었고 나는 항상 '활동'을 뒤로 미뤘다.

 

지금은 결국 집회를 가는 일은 우선순위가 한참 떨어지는 일이다. 활동은 공부와 급한 병원일 다음으로 우선순위가 밀려버렸다. 언젠가 얘기했던 선배들의 변화라는 것이 이런 우선순위의 문제는 아니었는지 갑자기 섬뜻한 마음이 든다.

 

#2.

 

어제 한 사업장 위원장님의 전화를 받았다. 한달반 전쯤 내가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 오셔서 재활의학과 진료를 보고 산업의학과에서 업무관련성 소견서를 받아 가셨드랬다. 그게 승인난것이 지난주의 수요일의 일이다. 대략 한달은 걸린 모양이다.

 

암튼, 승인이 나고 서울로 왔다갔다 하면서 치료를 받기는 힘든일인데다가 말로만 '산재지정의료기관'이지 실제로 산재환자를 입원시키거나 치료 하는 것을 꺼리는 병원에서는 전원을 은근 권하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조합원 동지를 위해서도 전원하는 것이 편한지라 전원문제를 상의하시기 위함이었다.

 

전원신청서를 산업의학과가 아닌 재활의학과에서 받으라고 우리과의 아랫년차 샘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진단한 것이 재활의학과이니 그게 합당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하시라고 했는데 오늘 외래 시간에 맞춰서 올라오다가 차가 많이 막혀서 외래시간이 끝나 버렸고 그냥 산업의학과에서 써 주시면 안 되겠냐는 질문이셨다.

 

내가 병원에 없는지라 아랫년차 샘한테 전화를 했다. 그냥 써주는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할려고 했던 것이다. 근데 아랫년차 왈~

 

"재활의학과 OOO선생님이 그 환자 말링거링(꾀병) 같다고 종결하신다고 하던데요? 그리고 진단서를 재활의학과에서 끊었는데 우리가 전원신청서를 써도 되나요?'라고 한다.

 

갑자기 울컥하면서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지난주에 승인이 났는데 종결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이냐?

 

"왜 OOO선생님이 종결해야 겠다고 하셨데요? 근거가 뭐래요?"

"뭐 증상도 별로 안 심하고 말링거링인거 같다고... 전 잘 모르겠는데요..."

"그럼 선생님이 생각하기에도 말링거링이예요? 선생님이 업무관련성 소견서 썼잖아요."

"그거야... 업무관련성이야 있지만 OOO선생님이 말링거링이라는데요..."

 

세상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어떻게 잘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본인이 업무관련성 소견서를 써 주었고 그 사람의 요양을 종결한다는 것인데 그걸 어떤 근거인지도 모르고 그리고 요양종결과 작업복귀라는 것이 의학적으로 '별 치료할 것 없음'과는 차원이 다른 말이라는 사실을 지난 전공의 연수강좌때도 배운 전공의가 이런 상황에 '네, 알겠습니다'하고 재활의학과 선생한테 대답했단 사실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암튼 재활의학과 OOO선생님한테 바로 전화를 했다. 최대한 냉정하고 분명하게 얘기를 하려고 화를 조금 다스리며 최대한 냉정하고 합리적이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님, 오늘 전원신청서 쓰러 오신다는 분이요. 종결하신다고 하셨다면서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어, 김선생, 그 사람 말링거링이야. 근막통증후군으로 산재 나는 것두 그렇구... 처음부터 증상도 별로 안 심하고... 뭔가 세컨더리 게인(이차적 이익)이 있는거 같애. 종결하는게 좋을 거 같네."

"선생님, 말링거링이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어떤건가요?"

"일단 치료도 제대로 안 받았어. 그렇게 아프면 치료 받으러 왔을거 아냐? 근데 치료를 받으러 안 오더라구 그러니까 뭔가 있는거 아니겠어?"

 

내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짐작만으로 확인도 하지 않은채 종결이라니...

 

"선생님 그 분 지난주 수요일날 승인난건 알고 계세요?"

"..."

 

"요새 근로복지공단에서는 승인나기 전에 치료한거는 요양급여를 안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승인이 나는 것도 워낙에 엄격해지고 힘든 일이 되어서 환자들도 승인 나기전에 자비를 들여서 치료 받는거를 대단히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회사는 위로금이나 이런게 있는 회사도 아니고 단협에 그저 30% 보장해 주는게 끝입니다. 매일 10시간이상을 일해도 임금이 130만원 정도 될동 말동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보험도 제대로 못 들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주머니들이라고 해도 맞벌이를 하는 경우 보다는 아주머니들이 가장인 경우가 많구요. 그러다 보니 병원에 가고 어쩌고 할 시간이 없습니다. 승인이 나기전에는 치료를 받을 수가 없는 거구요. 전원이 되기 전에는 춘천에서도 치료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이 전원신청서 안 써주시고 종결을 해버리시면 그 분은 치료 받을 기회조차 없어지는 겁니다. 의학적으로 치료 할 수 있는게 물리치료 밖에 없을지라도 지금 요양에 들어가지 않으면 결국 현장에서 계속 일을 해야 합니다. 현장에서 쉬거나 물리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설도 공간도 시간도 제대로 없습니다. 저는 종결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일단 6주만 치료해보지. 난 요양기간 무작정 길어지는건 반대야. 질환도 심하지 않고..."

"저도 무작적 늘여달라는게 아닙니다. 치료 받을 기회조차 없었으니 치료를 하면서 봐야 하는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럼 일단 전원신청서를 써주지."

 

일개 과의 전공의 주제에 재활의학과의 교수이자 과장이기까지한 선생님한테 전화로 이런 이야기를 했으니 아마 오늘쯤이면 우리과 교수랑 등등에게 이야기가 들어갔을 거다. 나름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이야기한다고 했지만 전화를 끊고 전공의한테도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위원장님하고도 이런 저런 통화를 하고나니 목소리가 떨리기도 하고, 톤이 살짝 올라가기도 한고,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나는 내년에 이 병원에 한 해 더 있기로 했다. 하기 싫은 것은 몇가지 분명한 것이 있는데 마땅히 갈데도 없고, 오라는 데도 없고, 그렇다고 전업활동을 하는 것에 대한 필요 자체가 내게 아직은 그리 크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냥 일단 이 병원에서 한 해 더 뭉개면서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 고민을 더 해보기로 한 것이다.  

 

근데 어제 전화를 이리저리 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복잡함과 짜증남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전업활동을 해야 하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말이다. 더 이상 이런 일들과 맞딱뜨려 '싸가지가 없다'거나 '전문가스럽지 않게 노동자들 편'이라거나 '근거를 찾아가면 일을 하라'는 등의 야기들을 들으며 싸우고 싶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일단 피하고 보지 말자. 내년 되면 내가 외래보면서 이런 건을 독자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소위 '전문의'라는 이름하에 생기는 거니까 한번 부딪혀서 싸워가면서 해보자. 그래두 안 되면 그때 떠나도 되는거 아닐까? 결국 안 될지도 모르지만 힘들고 짜증난다고 전업활동을 한다는건 비겁한 일이다.

 

정말로 내가 '전업활동가'로서의 삶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나의 고민과 자원들을 활용할 수 있고, 전체 운동에도 도움이 되는 뭔가를 할 수 있다는 판단 속에서 '전업활동'은 고민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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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1 10:28 2005/12/0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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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실이 2005/12/01 11: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러운 꼴 안 보면서 맘 맞는 사람들하고만 살고 싶으면 달나라로 떠야지... ㅜ.ㅜ 학교병원도 투쟁의 현장이라고 생각하슈... 어데 멀리 가서 싸울 생각 하지 말구, 집안 단속 좀... (사실, 여기 주** 선생님이 너네 병원 산업의학과를 "우리 편"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다고 하셨을 때 좀 쪽팔렸구먼. 의국 출신 선후배들이 바깥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잖여..)

  2. 홍실이 2005/12/01 1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이 얘기 할려던 것이 아닌디... 다름이 아니고 하이텍 투쟁 개요를 일목 요연한게 정리한 것이 있으면 좀 보내달라구...

  3. 감비 2005/12/01 1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힘냅시다. 아자아자- 투쟁도 열심히! 공부도 열심히!!

  4. 이재유 2005/12/01 17: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미님의 심정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사실 어느 곳 하나 투쟁 현장이 아닌 것이 없죠.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버티는 것도 나름대로 큰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미 님과 같은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힘내세요, 해미님!!! *^^*...

  5. 2005/12/02 05: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셤이라는게 공부를 '제대로'한다고 다 잘보는 것도 아니고, 공부도 싫은데 어처구니없는 셤들도 있어서 사람을 확 뒤집어 놓을때가 많지요. 셤하고 맞장뜰때 제일 중요한 기술은 확실한 '온오프 시스템'. 셤공부할때 확 집중해서 '온'했다가, 다른 일할 때는 확실히 '오프'시켜놓기. 그 담으로는 그 셤에서 목표하는 도달치보다 한 10%만 더 투자하기(오바하지 않기). 해미님이 이미 많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되지만서도,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을 몇개의 셤들에 대해 더이상 발목잡히지 마시길.

  6. 해미 2005/12/02 08: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홍실이/ 자료를 함 찾아볼께요. 근데 집안단속이 한다구 되는건지 모르겠네요. 할 수는 있는 건지도... 어짜피 제가 떠남 그만인거 아닌가요? ㅠㅠ
    감비/ 감비두 힘내세요. 아자아자~ 화이팅!
    이재유/ 감사 ^^

  7. 해미 2005/12/02 08: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셤/ 아마도 제 인생에 있어서 시험은 이번이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프는 비교적 잘 하고 어렵지고 않은데... '온'이 영 뜨뜨 미지근하네요. ㅋㅋ 암튼 이번이 마지막일테니 시험이 발목잡는 일은 없겠지요. 다만 제가 경계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험이 아닌 또 무엇이 제 발목을 잡는 일이 발생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삶과 일상을 좀더 냉정하게 바라보고 평가해야 겠다는 다짐이 필요한 시기인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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