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7/06/03 00:20
Filed Under 이미지적 인간

개봉하기 전부터 보고 싶었더랬다. 개봉전 나오는 리뷰들도 보지 않았다. 스포일러가 있다고 해도 내용을 알고 영화적 장치들을 발견해가는 재미를 좋아하는 나인데 이번에는 왠지 스포일러가 있다는 경고문에 모범생처럼 읽지 않았다.

 

그저, 멜로인줄 알았다. 마케팅을 그렇게 하기도 했지만 눈물이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전도연을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송강호의 눈빛이 담겨 있는 포스터를 보면서 가슴 아픈 멜로이려니 생각했다. 불편함의 대명사 이창동이 그리는 멜로 이야기가 궁금했다. 여성 장애인을 대하는 시각을 포함한 오아시스의 불편함이 아직 기억에 남아 있지만, 이번에는 어떻게 멜로를 만들어 내는지 궁금했더랬다.

 

그러나 영화는 한 사람의 멜로와 한 사람의 상처로 이루어져 있었다.

 

 

남편의 고향이라는 밀양에 도착할 무렵 신애는 이미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그저 하늘을 바라볼 수는 있을 만큼 살짝 붙어 있던 상황이었다. 약간의 과잉행동장애와 같은 증상을 보이는 아들에게 '일어서'라며 앙칼지게 소리를 내지르고 신경증적 상태를 언뜻 내보일만큼 치유가 덜 된 상처였다.

 

신애의 신경증은 아이의 유괴와 죽음 이후 폭주를 하게 되고 오히려 정신병적 상황으로 넘어가게 된다. 보이는 것만 믿는다는 신애는 하늘을 보면서 하늘에 있는 무언가를 보았고 그것에 의지하고 믿게 되고 다시 배신을 당하면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 영화는 고통과 상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고통과 상처라는 것이 누구에 의해 구원을 받거나 치료받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혼자 견디어 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죽을 것 같은 상처와 아픔을 하나님도 구원 못하고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마음이 가득한 그 누군가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 한 가지, 힘들고 괴로울 때 나를 도와줄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그 희망을 참으로 처참하게도 뭉개버린다.

 

(남편과 아이의) 상실과 (자기가 해야 하는 용서를 대신 해버린 하나님의) 배신의 고통은 부활절 행사장에서 엄숙하게 울려 퍼지는 목사의 목소리에 ‘거짓말이야~’라는 유행가를 붙이고, 장로를 유혹해 하나님을 모욕하고, 자신의 손목을 칼로 긋는 가학과 피학의 과정에서 치료의 과정을 겪게 된다.

 

 

이런 신애의 상처의 치유과정에서 항상 뒤에서 그런 신애를 지켜보던 종찬은 딱 그만큼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괜찮은 남자다. 그런 신애에서 더 개입하려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관심하지도 않게 관심과 배려의 가는 끈을 놓지 않고 가져갈 줄 아는 썩 괜찮은 남자다. 종찬은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신애에게 거울을 보기 좋게 들어주는게 그녀을 위해 해줄수 있는 최선이라는 사실을 알고 조심스럽게 물어보며 행동하는 남자다.

 

다시 가서 자르자고 보채지도 않고, 자기가 잘라주겠다고 섣불리 나서지 않는 그저 거울을 반듯하게 들며 미소를 흘릴 줄 아는 멋진 사내인 것이다. 이런 종찬이 있기에 어쩌면 신애는 혼자서 그 상처들을 버티는게 조금은, 아주 조금은 편해질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너무 낙천적인 것일까?

 

신애의 불안한 정서를 보여주는 것처럼 날씨 좋은 하늘을 핸드헬드 카메라로 불안하게 비추며 시작한 영화는 마지막 지저분한 바닥에 떨어지는 햇살과 그림자, 그리고 고통과 상처같은 잘려진 머리카락을 보여주면 그녀의 상처가 조금은 나았다는 것을 하지만 여전히 그 상처는 그렇게 어딘가에서 뒹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마무리 된다. 

 

상처는 아프게 소독을 하고 마취를 해서 꿰매기도 하고 몇일을 욱신욱신 거리다가 조금씩 붙고, 그러다가 잘못하면 다시 터졌다가 또 시간이 지나면서 붙는다. 사람의 몸에는 상처를 스스로 치료하는 세포들의 방식이 있다. 다만 상처의 깊이에 따라서 치료에 걸리는 시간이 길어지기도 하고 흉터가 남기도 하지만...

 

마음에 난 상처도 마찬가지일테다. 그 상처가 남편의 배신과 죽음, 아이의 유괴, 시어머니의 언어 폭력, 스스로의 허영이 만들어 낸 죄책감, 나만이 할 수 있는 용서를 가로챈 하나님의 배신이든간에 결국 그렇게 목울대로 울음을 삼키기도 하고, 꺼이꺼이 소리내어 울기도 하고, 싱크대에 그냥 서서 밥을 삼키기도 하면서 그렇게 치료되어 가는 것일테다. 

 

 

영화는 보는 내내 관객의 상처를 들쑤셔대며 그로기 상태로 몰아간다. 영화의 시작무렵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은 영화가 끝나고도 그칠 줄 몰랐다. 영화관을 나와서도 계속 쏟아지고 결국 그로기 상태가 될 정도가 되어야 진정이 좀 되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난 일주일이 지나서야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만들었다.

 

최근, 까칠함이 하늘을 치는지라 그렇게 울지 않을 줄 알았다. 게다가 유괴 이야기라는 사실에 모성 어쩌구에 별 관심과 감흥이 없어서 안 울줄 알았다. 하지만 영화의 시작후 얼마안되 '상처에 대처하는 인간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임을 깨닫게 되면서 내 가슴속 어딘가에 묻혀 있었던 뭔지 모를 상처들이 다시 소금물에 담궈진 것처럼 화끈거렸던것 같다.

 

신경증적이면서도 예민하고, 믿음 때문에 행복해 보이면서 뭔가 비어있는 눈빛을 가지고 있고 가끔은 폭발하고 사람들을 경멸하는 신애를 연기하는 전도연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어느덧 뭔지도 모를 가슴에 있었던 상처들이 다시 화끈거렸던 거다. 신애처럼 꺼이꺼이 울어보기도 하고, 미친것처럼 멍하니 앉아 있어보기도 했고, 울음을 삼키기도 하고, 밥인지 뭔지 모를 것을 꾹꾹 삼켰고, 미친듯이 일을 해대던 언제가의 내 경험들이 가슴속 어디선가에서 꾸물꾸물 기어나와 나를 그로기로 몰고 가버렸던 것 같다.

 

하지만, 상처는 치료가 된다. 다시 예전으로 완벽하게 돌아가기 쉽지 않을 정도로 깊은 상처라고 해도 흉터가 남을지는 몰라도 벌어져 있는 상태로 있지는 않는다. 그 상처의 변화 과정은 결국 혼자 버텨내는 거다. 그렇게 혼자 가다 보면, 그리고 신애처럼 운이 좋아서 딱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지켜봐줄 누군가가 있다면 조금은 시간이 덜 걸리겠지만... 그렇게 혼자 가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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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3 00:20 2007/06/03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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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쥬쥬 2007/06/03 00: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미지만 으로도 보고싶어지네요.

  2. 해미 2007/06/04 13: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쥬쥬/ 마음이 충분히 힘들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하고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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