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7/10/08 15:39
Filed Under 이미지적 인간

보고나서 왠지 찝찝한 느낌이 남는 리얼(?) 멜로로 유명한 허진호 감독의 신작인 행복을 봤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 이후 외출에서는 살짝 실망을 했었는데 황정민과 임수정이 만들어내는 앙상블을 보고 싶었더랬다.

 

 

허진호의 카메라는 아름답고 조용한 가을을 담아내고 있었고, 소박하지만 파스텔 톤이 살아나는 의상과 소품도 계절에 참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느낌의 카메라라고나 할까?

 

창백하고 순수해 보이는 마스크를 가진 임수정은 폐농양을 앓는, 세상에 없을 거 같은 착한 여자, 또는 죽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어서 이 세상에 아쉬울거 없는 비현실적인 인물 은희를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냈고,

 

순수한 미소가 악독한 눈빛보다 어울리는 황정민은 염치가 없는 영수를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몰염치하고 이기적이며 우유부단한 남자로 만들어냈다.

 

먼저, 영화의 주된 줄거리에서 벗어난 느낌부터 이야기하자면, 영화를 보면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요양원의 모습이었다. 신부전이라서 절대 짠 것을먹으면 안되는 아저씨가 밤에 사람들과 라면을 끓여 먹고, 간경화라서 술을 먹으면 안 되는 영수는 술을 홀짝 홀짝 마셔대고, 폐암이라서 담배를 안 펴야 하는 아저씨는 담배를 한 대 피고 자살한다.

 

담배를 많이 피우는 사람이 폐암에 더 많이 걸리고, 술을 많이 먹는 사람이 간경화에 걸리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 어찌 보면 보건복지부의 '공익 광고'에나 어울릴 법한 내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니 '몸엔 좋은데 재미가 없어'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요양원의 사람들은 삶에 대한 재미를 완전히 잃은 사람들 같은 비현실성이 있었다. 술과 담배말고는 딱히 인생이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심각한 병에 걸려 한 집에 모여 살면서 이상한(?) 체조를 하는 모습이라니... 중대한 병에 걸려도 그저 할 수 있는 선택이 술과 담배를 끊는 것 뿐인 그들의 인생이 참으로 짠하게 느껴졌다.

 

흠.. 그리고 영화의 본론인 사랑이야기는 비현실적인 통속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은희는 그저 사랑을 줄 줄만 알고 간병을 받아야 할 사람이 오히려 남을 간병 하기만 하고 연락도 없이 돌아오지 않는 남자에게 화도 낼줄 모르는 비현실적으로 착한 여자다. 그러면서도 '나랑 함께 살래요?'라고 먼저 이야기를 꺼낼 줄도 알고 '나 옮는 병 아니에요'라는 말로 키스를 유도할 줄도 알고 귀신 이야기로 섹스를 유도할 줄도 아는 솔직한 여자다.

 

그러나 그녀의 솔직함과 순수함은 오늘이 마지막 날일수도 있는 절박함에 기반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고 따라서 이 둘의 관계는 이미 은희의 완패로 끝날 것이 뻔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나중에 어떻게 될 지라도 지금은 살고 싶다는 그녀의 소망과 '죽을 때 영수씨가 같이 있어주면 좋겠다'던 소원이 모두 이루어졌으니 그녀는 어쩌면 행복하게 세상을 떠났을 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언제나 잔인하고 상처를 주지만 그 과정과 관계에서의 잠깐의 행복은 그 아픔을 잊게 만드는 이상한 힘이 있다.

 

상처가 뻔함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다는 것이 거짓말임이 뻔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계속할 수 밖에 없는 그 찰나의 '행복'에 대한 영화는 너무 뻔해서 보고나면 찝찝한 또 한편의 멜로일지도 모르겠다.

 

감성적으로는 여전히 불편하고 허전하며 썰렁한 듯 하여 술을 부르는 멜로임에는 틀림없다. 허진호 감독은 이렇게 뻔한 우리 주변의 그렇고 그런 사랑 이야기를 무언가 특별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희안한 힘이 있고, 이번에는 특히 임수정과 황정민의 연기력이 완전 파워업시켰다.

 

황정민이 저렇게 옷을 입으면 다리도 길어보이고 간지도 나고 정말로 매력적이라는 사실과 카메라의 각도에  따라서 사람의 인상이 엄청 달라보인다는 사실도 잘 드러나는 영화이기도 했다.

 

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묻던 소년이 '변치 않겠다'는 것이 뻔한 거짓말임을 아는 청년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섹스를 하면서 '나 숨차서 죽을 수도 있어요'라고 이야기했고, 영수의 파렴치한 이별 통보에 죽을 지도 모르게 숨이 차도록 뛰던 그녀가 잔인했지만 행복했던 사랑의 느낌을 가지고 세상을 떴기를 바란다. 그게 은희답다.

 

 


 

덧니. 별로 할 말이 없는거 같은 그저그런 영화였다고 생각했는데 쓰다보니 길어졌다. 일하기가 싫다 보니 죽어라 포스팅만 길어지는 구나...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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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8 15:39 2007/10/08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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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2007/10/08

    Tracked from / 2007/10/08 17:46  삭제

    해미님의 [[행복] 통속적 사랑극?] 에 관련된 글이라기보다 그냥~ 확실히 가을타나보다. 꿀꿀함의 연속이다. 지난 주 개천절에 <행복>을 본 뒤부터 지속되는 현상이다. 게다가 며칠 전에 자다가 쥐가 났는데 장딴지가 퉁퉁 부어 계속 아프다. 오전에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별 일 없단다. 그런데 왜 그런거냐고 했더니 '근육의 나이'를 운운한다. 원래 모든 사람들이 다 원래 뭔 일을 하면 한 두 가닥씩 근육이 찢어지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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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후 2007/10/10 18: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임수정 주연이란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영화.. -_-;;;;

  2. 나후 2007/10/10 19: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산업의학이나 예방의학은 맨날 영화보고 책일고 그러고 사는겨? 즐겨찾기 되어있는 홍실이/해미 둘다 그러고 사는듯... =_- 엄청 부럽군ㅋㅋㅋ 아마 일하기 실어서, 게을러일이 밀렸는데... 하는 멘트들은 그냥 쑥쓰러워서 덧붙이는 것들 아녀? 의심스러워 의심스러워...

    겨울이 와서 눈이 펑펑 오는 날 해인사에 있고 싶다... -.,- 행당동 너무 지겹다....

  3. 해미 2007/10/10 2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후/ 조금만 버텨. 눈오는 겨울되면 해인사 놀러가자. ^^

  4. hongsili 2007/10/10 2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후, 그래 우리 시간 남아돌아... 그래서? 해인사 콜... 가본지 너무너무 오래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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