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8/12/17 11:15
Filed Under 손가락 수다방

이미 한달을 넘긴 원고를 마감하고 나면, 당분간은 절필해야겠다. 바닥도 바닥도... 이쯤이면 땅굴을 파고 들어갈 지경이다. ㅠㅠ

 

---------------------------------------------------------------------------

 

얼마전 세계 직무스트레스 학회에 다녀왔다. 주제 발표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정신적 ‘괴롭힘’에 대한 내용이었다. 한국의 사업장에서는 흔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만한 상사나 동료의 정신적 괴롭힘이 직무스트레스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주제가 된 것이었다. 이 주제 발표가 끝난 후 질의 응답시간에 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분이 손을 들었다. 자신을 북유럽의 어느 국가에서 일하는 연구원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질의·응답 시간인 그 시간에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 좋은 발표에 정말 감사합니다. 요즈음 제가 그 문제로 고민이 많았습니다.”로 시작한 그녀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얼마 전에 본인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남성인 상관이 새로 왔는데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 사사건건 질타를 하고 개인적인 모욕을 준다는 것이었다. 참아보려고 하고는 있는데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을 지경이라고 그녀는 이야기했다. 주제 발표에 대한 질의·응답시간인지라 적절한 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어려움을 공감할 수 있었고 그녀의 이야기가 끝난 후에는 격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참 많이 힘들다고 했다.

 

그녀의 힘듦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지만, 나는 다른 생각으로 사실 더 침울해졌다. 그래도 그녀는 여성들의 정치 진출이 활발하다는 북유럽 국가의 여성이었고 그녀가 회사에서 상관한테 당하고 있는 괴롭힘이 한국과 같은 상황에서는 ‘그냥 일반적’이고 ‘회사 생활 하려면 그 정도는 참아야하는’ 그런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만 특별하게 그런 스트레스에 대한 대응을 쉽게 하는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런 걸까? 아마도 그건 보다 더 심하고 비상식적인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내가 경험한 몇 가지 사례는 더욱 그러했다.

 

아직도 의사한테 맞는 간호사

 

얼마 전 모 대학병원 간호사들을 중심으로 스트레스에 대하여 조사할 기회가 생겼다. 매년 1,300명 정도의 간호사 중에 200명이 병원을 그만 둔다고 했다. 간호사들이 보통 이직율이 높다고는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설문조사를 하고 심층 면접조사를 하면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폭언은 수시로 듣고 폭행을 당한 간호사도 있습니다. 저도 그런 일을 실제로 겪었고요. 남자 환자나 보호자 같은 경우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욕을 하고 물건도 집어 던지고 심하면 폭행도 합니다. 또 더한 것은 예전보다는 많이 줄었지만 의사가 간호사를 때리는 경우도 있어요. 네. 언뜻 이해가 안가시겠지만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레지던트가 간호사를 때린 적도 있고 재작년에는 인턴이 간호사를 창고로 끌고 가서 문을 잠그고 폭행을 한 사례도 있습니다.”

 

참 무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모 대학병원의 수술방에서는 간호사가 폭언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해서 그 자살이 산업재해로 인정을 받은 경우도 있다. 환자와 보호자의 폭언과 폭행에 상시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병원의 간호사들에 동료여야 할 의사까지도 폭언과 폭행을 일삼고 심지어는 이렇게 생긴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수간호사와 같은 중간관리자 선에서 무마되고 넘어가는 것이다.

 

사실 위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사건이 항상 일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건은 도의적 책임을 떠나 형사상의 문제이. 이런 문제가 개선되거나 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묻히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육아에 대한 부담으로 살이 빠진 활동가

 

여성이 갖게 되는 스트레스 중에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육아의 문제이다. 얼마 전 노동보건활동가들과 만난 자리에서 육아의 문제로 고민하는 한 명의 여성 활동가를 만났다. 오래간만에 만난 그녀는 살이 쫙 빠져있었다. 술을 마시면서 그녀가 그 동안의 답답함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와 같은 활동가이다. 남편이 활동가라는 사실은 일면 여성 주의적 관점 하에 가사와 육아 등을 분담하면서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을 살짝 안겨주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경험에 따르면 남성 활동가라고 반드시 가사노동을 잘 분담하는 것도 아니며 반드시 여성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가부장적일 수도 있고 ‘운동’이란 명분하에 그녀를 착취하면서 살기도 한다.

 

그녀의 남편은 그래도 비교적 집안일도 잘 도와주고 육아도 잘 도와주는 편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것에만 만족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고 했다. 아이가 생기기 전만큼 활동을 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출장을 다니기도 어렵고 밤새워 뭔가를 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 주변의 사람들은 ‘좋은 남편’이라며 남편 칭찬을 하기는 했지만 같이 고생하고 있는 그녀를 칭찬해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주변에는 아이를 맡길 곳도 마땅치 않았다. 육아비도 문제이지만 그녀의 바람에 조금이라도 적당한 어린이집을 찾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활동과 육아를 병행하며 그녀는 많이 힘들었고 살이 많이 빠졌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은 조금이나마 개선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아이가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가 나이를 먹으면서 그녀도 최근 다시 살이 좀 찌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한 활동가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실 직장 생활을 하는 모든 여성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언제쯤 우리는 육아에 대한 고민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친절이란 이름으로 고통 받는 계산원

 

백화점과 대형 할인매장에서 근무하는 계산원들도 스트레스가 심하다. 자기가 무슨 왕이라도 된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고객은 그나마 양반이다. 입었던 옷을 바꿔달라고 생떼를 쓰는 고객부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이대는 고객들까지, 그녀들의 하루는 조용할 날이 없다. 가뜩이나 스트레스로 활활 타는 그녀들의 마음에 기름을 들이붓는 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친절 평가이다.

 

계산원들의 친절 향상이라는 목표 하에 시행되는 친절평가는 첩보작전을 방불케 한다. 손님으로 가장 한 평가요원은 실제로 물건을 사고 계산을 하는 행위를 하면서 말도 안 되는 각종 억지를 부리고 이에 대응하는 계산원의 태도를 평가한다. 이렇게 평가된 그녀들의 ‘친절도’는 그녀의 업무 능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언제 손님을 가장한 평가원이 들이 닥칠지 알 수 없어 조마조마하다. ‘손님이 왕’이라고 하니 어떤 상황에서도 친절한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는 하지만 거기에 평가원들까지 더해서 겪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까지 일부러 겪게 만드는 것은 좀 심하다 싶다. 서비스의 질이라는 것이 마음에도 미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울어 나오는 배려에 기인한다는 것을 왜 모를까? 그녀들이 편하고 즐겁게 일할 때 정말 친절한 매장이 될 수 있을 것인데 화장실도 못가고 언제 평가원이 들이 닥칠지 몰라 불안에 떠는 그녀들이 어떻게 진심으로 친절할 수 있냐는 말이다.

 

반쪽 난 펀드, 화풀이 당하는 그녀들

 

최근 경제 위기 상황에 많은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고 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가지고 있던 펀드가 반타작은 기본이고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단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경제 위기에 펀드는 반쪽 나고 이래저래 돈을 긁어모아 집을 샀는데 이율은 오르고 많은 사람들이 괴로운 요즈음이다.

 

이런 상황에 두세 배로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매일 퇴근시간이 밤 12시는 되어야 한다는 그녀들은 요즘 각종 항의전화에 시달린다. “너희가 펀드 가입하라고 해서 했는데 반쪽이 났으니 물어내라”고 하면서 소리도 지르고 욕을 하기도 한다.

 

물론, 펀드를 가입하게 한 그녀들에게 책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만기가 된 적금을 타려고 은행에 갔을 때 같은 권유를 받은 적이 있다. 본인의 통장을 보여주며 수익률도 높고 하니 적립식 펀드에 가입하시는 게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약 3년 전쯤의 일이었다. 그 때 나는 “그거 원금은 보전되는 거예요?”라고 물었고 아니라고 대답하는 그녀에게 들지 않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랬다. 당시에 그녀들은 누구에게나 펀드에 들라고 가입을 권유했다.

 

그렇지만 이는 그녀들에게 떨어진 ‘할당’ 때문이다. 98년도의 경제위기 이후 은행은 단순히 돈을 맡기고 빌리는 곳이 아니라 돈이 돈을 벌 수 있도록 다양한 금융 상품이 만들어지고 팔리는 장소로 뒤바뀌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은행의 노동자들은 돈을 관리하는 일 뿐만이 아니라 이런 금융 상품을 팔아야 하는 위치에 놓였고 심지어는 1인당 몇 십억의 할당을 받았다. 개인이 빚을 내기도 하고 주변의 사람들도 동원해보지만 이는 역부족이었고, 자기에게 온 모든 고객들에게 펀드를 권했던 것이다. 그녀들에게 실적에 대한 강요가 없었다면 그렇게 무리를 해서 펀드를 팔지 않았을 텐데 지금 시기가 되니 돈 잃은 사람들의 원성을 일선에서 듣게 되는 것이다.

 

다양한 직무 스트레스, 입 열기부터

 

지금 이야기를 한 것처럼 직무스트레스는 참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들은 여성에게 이중부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일도 하고 가사일도 해야 하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직장에서 전통적인 스트레스 요인이라고 이야기되는 직무요구도, 직무 자율성, 동료나 상사의지지, 인간관계뿐만이 아니라 고객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오는 대부분의 스트레스가 여성에게 쏟아지기도 한다. 여성들이 하고 있는 일이 서비스업에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게다가 비정규직인 적도 많기 때문에 그녀들은 더 불안하고 스트레스가 많은 것이다.

 

여기에 가정에서의 부담까지 더해지면 여성들은 사면초가에 처하게 된다. 육아와 가사를 겸해야 하는 그녀들은 집과 일에서 모두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 하거나 감정을 표현을 못한다. 그러다 보면 우울해지기도 하고 살이 빠지기도 하고 많은 문제들이 생기기도 한다.

 

이런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답이라고 이야기할 만한 뾰족한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단 여성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이야기하고 나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산업보건 패러다임 안에서 소외되었던 여성들의 문제를 끄집어내고 공식화 시키는 것이 일단 우리가 먼저 할 수 있는 일이다. 참지 말고 본인이 처해있는 상황과 조건을 이야기하자. 본인이 즐겁게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나누고 그런 것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만들 수 있을지 이야기하자. 그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 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8/12/17 11:15 2008/12/17 11:15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ptdoctor/trackback/455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요꼬 2008/12/17 14: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완전 1000%공감 내말이 그거에요^^; 직장다니고,애있고,남편이 활동가이고...전 그래서 사실 페미니즘이니 여성뭐이런거 진짜 몰랐거든요 근데 결혼하면서 아이낳으면서 격으면서 더 공부하고 그런다는...슬프기도 하고 내자신이 대견하기도 하고....그분은그래도 살이 쫙빠지네 난 쫙 찌는데 ㅋㅋㅋ

  2. 해미 2008/12/21 1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꼬/ 스트레스르 받으면 빠지는 체질과 찌는 체질이 있는 것 같아요. 저두 주로 찐다는. ㅋㅋ

About

by 해미

Notice

Counter

· Total
: 424804
· Today
: 109
· Yesterday
: 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