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책을 써야하나 생각이 많았다. 연말연초 복잡한 머리를 쉬기 위해 읽어댄 소설들 이야기를 써야 하나, 개인적 취향을 담아 좋아하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써야 하나, 잘 읽히게 만드는 수다꾼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써야 하나, 최근 오가는 길에 아주 흥미롭게 읽고 있는 앙드레 고르의 ‘에콜로지카’를 써야 하나, 학생 시절 내게 충격을 줬던 ‘태백산맥’이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써야 하나, 보건의료를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그 느낌이 남 달랐던 ‘현대 자본주의와 보건의료’를 써야하나... 많은 책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코너의 제목이 ‘내게 가장 좋은 책’인지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활동과 고민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책을 써야겠다 싶어 선정한 책이 ‘노동자 건강의 정치경제학’이라는 책이다.
얼떨결에 선배들이 하는 프로젝트에 끼었다가 얼떨결에 챕터 하나 수정하고 글 한편 써서 내 이름이 박힌 책이다. 영어를 엄청 싫어하는 나로서는 짧지만 번역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한 책이었다. 영어 원제는 ‘The point of production’이다. 그대로 번역하면 ‘생산의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 책은 제목처럼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그 현장에서 병들어 가는 노동자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전체적인 관점을 전해주는 책이다. 1998년 미국에서 전통적으로 공장이 밀집해 있어서 예전부터 노동자들의 문제에 관심이 많은 교수들이 꽤 있는 메사추세츠 주립대학 로웰 캠퍼스의 인문 과학대 지역경제 및 사회개발 교실 교수인 정치학자 존 우딩과 보건환경 대학원의 석좌교수인 경제학자 찰스 레벤스타인이라는 교수가 쓴 노동자들의 건강에 대한 책인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어찌나 10년전의 미국의 현실과 우리의 현실이 하나도 다르지 않은지 신기하기도 했고, 전문가연 하는 사람들의 역할과 자세를 꼬집는 것은 레빈스타인 할배의 섬뜩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16살의 어린나이에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문송면, 병원까지 만들게 한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투쟁, 노동자들의 질병에 대한 부정으로 일관하는 근로복지공단에 일침을 가했던 이상관 투쟁처럼 한국의 노동보건운동 역사에도 많은 사건이 있었고 그 만큼 많은 발전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삼성 반도체의 젊은 여성 노동자들은 백혈병에 걸려 사망하고 있고, 한국타이어의 노동자들은 돌연사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있고, 이주 노동자들은 강제 추방이 두려워 산재 신청도 하지 못하고 있고, 비정규 노동자들은 ‘아프다’는 사실이 ‘해고’로 연결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노동자들이 아프거나 더 아파지는 이유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감기에 걸린 노동자는 하루이틀만 집에서 푹 쉬면 한결 좋아질 수 있다. 그렇지만 감기 때문에 일을 안 나가는 노동자는 거의 드물다. 아플 때 쉬면되는 것을 제대로 쉬지 못하니까 감기도 심해지는 것이다. 계산대를 떠날 수 없어 화장실에 제 때 못가 방광염에 걸리는 노동자나 무거운 학습지를 들고 다니느라고 무릎이 아픈 학습지 노동자, 밤에 자야 하는데 야간근무 하느라 불면증을 앓고 있는 노동자들, 날아오는 골프공에 맞아서 머리를 다친 경기 보조원, 전동차에 뛰어든 시신을 정리하고 늦지 않게 차를 운전하느라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기관사들...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질병들로 노동자들은 괴롭다. 이들이 아픈 것은 직간접적으로 그들의 노동과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질병은 무시되거나 적당히 무마된다.
아프면 아프다고 이야기하고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제대로 치료 받을 수 있고, 일이 힘들게 느껴지면 언제든지 쉴 수 있고, 일하는 노동자들의 몸과 마음이 편안 할 수 있게 작업을 배치하고 설계한다면, 이윤보다 더 인간의 몸과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노동자들은 덜 아프거나 안 아플수 있고, 철거민들은 죽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이 노동자이기 때문에 또는 사회적 약자이거나 소수자이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번역을 한 부분에 보면, 참으로 인상적인 구절이 나온다. 아직도 노동이라는 것을 자본과의 고리타분(?)한 대립구조로 생각을 하느냐거나 노동자들의 건강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종을 올릴만한 문구이다.
“오래된 계급 구분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상투적 표현들과 유쾌한 개념들은, 미국 노동자들이 중간 계급과 달리 심각한 손상, 심지어 죽음까지 그들의 일상적인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에 의해 공허한 어구임이 드러나게 된다.
상상해보라.
만일 해마다 여러 개의 기업 본사가 광산처럼 붕괴되어 60-70명의 기업 간부들이 깔려 죽는다면 터져나올 아우성을.
또는 모든 은행이 경영진, 사무원, 출납계원에게 꾸준히 암을 유발시키는 보이지 않는 독성 먼지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해보자.
마지막으로, 이런 공포를 상상해보자. 매년 수천 명의 대학 교수가 일을 하면서 귀가 멀고, 손가락, 손, 때로는 눈을 잃는다는... “
그렇다. 이렇기 때문에 노동자 건강의 문제는 생산의 지점을 정확하게 파고 들어 노동자들의 몸과 삶을 갉아먹는 것들을 찾아내고 바꾸어내는 투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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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꼬 2009/02/11 1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내용은 우리 노동자는 슬프지만 책안에 그 의미?가 나에게는 정말 마음에 와닿네요~~~와 그럴수도있구나.
가슴에 와 닿는다니... 좋은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