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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다 잊었다” 말하지만...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유족의 명절

 

67년 세월 동안 수많은 미제사건으로 남아

구자환 기자 hanhit@vop.co.kr
발행 2017-10-04 10:15:23
수정 2017-10-04 10:4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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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소리 자료사진
민중의소리 자료사진ⓒ구자환 기자


 ‘사랑의 자리’낙엽이 떨어져도 생각이 나고
강물이 흘러가도 생각이 난다.
돌아온다고 약속해놓고 오지않는 무정한 님아.
사랑이 머물던 자리 그님은 어디가고
어디가고 돌아올 줄 모르나.

할머니는 불쑥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둘째 딸이 ‘어머니가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다’는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88세의 고령에 맞지 않게 고운 음색과 음정을 갖춘 노래가 잔잔한 침묵을 뚫고 있었다. 할머니는 노래를 부르며 먼저 가버린 남편의 그리움과 원통함을 애써 달랬다. 어떤 때 할아버지(남편) 생각이 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기도 했다.

“이젠 다 잊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대답은 외려 무덤덤했다. 수십년이 흐르면서 눈물도 말라버렸다. 숱한 세월이 흐르면서 죽은 사람을 슬퍼하기보다 당장 삶을 이어가는 것이 급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하는 것이다. 가해자들이 침묵을 강요하며 노린 것이 ‘시간’이었을까. 통한의 아픔도 숱한 세월 속에 묻혔다. 당시 농사를 지으며 마산소방서에 다녔던 남편 황치원씨는 21세 나이의 청춘이었다. 20세인 할머니는 첫딸에 이어 둘째 딸을 태안에 품고 있었다. 다행히 열서너 마지기의 논이 있어서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 수가 있었지만 남편이 없는 농사일은 ‘골병’ 그 자체였다. 홀로 어린 딸을 키워야 했던 가혹한 시간이 어느새 67년이 흘렀다. 할머니는 가혹한 시간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하느냐고 했다.

20세의 나이에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이귀선 할머니
20세의 나이에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이귀선 할머니ⓒ구자환 기자

노래를 마친 이귀선 할머니는 잠시 자리를 벗어낫다. 67년의 세월이 흐른 동안 국가는 할머니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다.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 진상조사에서 진실규명이 되었지만 법원은 증거능력이 부족하고 마산형무소 수감된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심마저 기각했다. 현재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부역 사건 등 다수의 유족들은 법원으로부터 ‘국가 잘못’이라는 판결을 받고 보상을 받았으나 유족 일부는 법원으로부터 비슷한 이유로 기각 당했다. 보도연맹학살 사건 등 진실규명 미신청 유족은 신청자보다 훨씬 많이 남아있다.

“돌아와서 들에 풀어놓은 소를 찾아오겠다고 나갔어. 그리고 안 돌아오데”

2일 찾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곡안리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8월 11일 미군 폭격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2002년 영국 BBC에서 이 사건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송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이 방송은 미처 알지 못했거나 침묵했던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는 국민보도연맹학살 사건이 그 이전에 있었다. 당시 마산과 진주일대 국민보도연맹원은 한국전쟁 초기인 음력 6월1일 소집 통보를 받고 갔다가 영문도 모른 채 산의 계곡과 인근 바다에서 집단 학살됐다.

“아침에 ‘나중에 돌아와서 들에 풀어놓은 소를 찾아오겠다’고 하고 나갔어. 그리고 안 돌아오데”

남편은 진전지서에서 ‘가입하면 군에도 안 가고 좋다’는 권유를 받고 가입했다. 그것이 국민보도연맹인 줄은 알지 못했다. 1949년 이승만 정권은 좌익세력을 대상으로 사상을 전향하고 계도하기 위한 관변단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지역 할당제가 실시되면서 국민보도연맹원에는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농민이 다수 가입됐고, ‘말 깨나 한다’는 지식층과 중고등학생까지도 가입됐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은 위협하고, 농민에게는 대출과 농기계 대여를 해주고, 가입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취급한다고 협박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가입시켰다. 시골마을에서는 이장이 주민에게 알리지도 않고 지니고 있던 도장을 찍기도 했다. 이때부터 ‘도장을 함부로 주지 말라’는 말이 생겼다. 이렇게 만들어진 37만명으로 추정되는 국민보도연맹원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인민군에게 동조할 수 있다’는 이유로 예비 검속되고 전국 곳곳에서 무차별 학살됐다.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에는 가입하지 않은 인사들도 다수 포함된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논과 밭을 팔아 뇌물을 주고 풀려난 보도연맹원도 곧잘 회자된다. 집안이 부유했던 아버지는 자식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논과 밭을 팔아 포대자루에 담아 뇌물을 전했다. 그럼에도 돌아오지 못한 자식도 있었다. 뇌물을 받은 순경 등은 ‘담배 사가져 오라’는 등의 말로 풀어주었지만 순박했던 사람은 담배를 사들고 다시 되돌아와 죽임을 당했다. 어떤 마을에서는 한 순경이 자신이 존경하는 독립운동가를 살리기 위해 ‘선생님, 목욕하고 오시라’고 풀어주었다. 그러나 이 독립운동가 역시 목욕을 하고 다시 돌아왔다. 죄가 없으니 도망갈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순경은 크게 탄식을 하면서 ‘존경하는 선생님’에게 욕설을 마구 퍼부으며 울었다고 한다.

유족들이 괭이바다에서 수장된 국민보도연맹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헌화하고 있다.
유족들이 괭이바다에서 수장된 국민보도연맹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헌화하고 있다.ⓒ구자환 기자

남편을 기다리던 할머니는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풀려난 마을주민으로부터 남편의 소식을 들었다. 이 마을에는 진전면장의 힘으로 주민 3명이 살아서 돌아왔다. 마을로 돌아온 주민 중 한 사람은 ‘만약 돌아오지 않으면 음력 7월 10일 제사를 지내라’는 단 한마디만 전했다. 이날이 남편인 황치원씨가 마산 구산면 ‘괭이바다’에서 수장 학살된 날이었다.

마산 괭이바다에 수장된 음력 7월 10일

“우짤거고, 아무리 한이 맺혀도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지”

할머니는 끝내 그 비통했을 순간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오랜 고통을 되새기는 질문을 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던 것에 비해 무척 허탈한 답변이었다. 듣고 있던 둘째 딸이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는 듯이 대신 거들었다. 당시 할머니의 태안에 있던 유복자다.

“말 안 해도 뻔 한 거 아닙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을 치고 대성통곡을 했겠지. 죽은 사람은 그렇다 치고 산 사람의 원이라도 풀어줘야 하지 않습니까.”

할머니는 참혹한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이제는 남편의 생각도 잊었고 눈물도 말라버렸다. 담배와 술을 먹으며 지내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애써 웃었다. 살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체념이다. 너무 어이없고 황당한 일을 당하면 사람은 웃는다.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이 벌어진지 67년이 지났다. 2005년 노무현 정부 당시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는 수많은 민간인학살 사건 등에 대해 진실규명을 했지만 이명박 정부로 접어들면서 활동기간을 연장하지 못하고 종료됐다. 짧은 활동기간은 여전히 수많은 미제 사건을 남겼다.

문재인 정부는 ‘민간인학살 사건’을 10대 국정과제로 설정하고 2018년 초 ‘제2의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재조사 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현재 남편을 잃은 유족들 대부분은 기억을 상실하거나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나마 생존한 유족들도 오랜 시간 고통의 기억에서 벗어나 체념하거나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 이것이 제2의 진실위가 하루빨리 활동을 재개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침묵을 강요당하고, 역대 반공우파 정권에서 배척한 대한민국의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 이제 살아있는 자들을 몫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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