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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퇴출·합성사진·댓글달기…국정원의 연예인 활용법

 

김한솔 기자 hansol@kyunghyang.com
입력 : 2017.10.06 07:32:00

 

MB 정부 블랙리스트에 ‘좌파 성향’ 연예인으로 분류됐던 코미디언 김미화씨.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MB 정부 블랙리스트에 ‘좌파 성향’ 연예인으로 분류됐던 코미디언 김미화씨.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2013년 세상을 뜬 배우 박용식씨는 10년간 생계를 위해 방앗간을 운영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전두환과 닮았다’는 이유로 방송 출연을 금지당했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에나 나올 법한 독재 정권 시절의 황당한 인권 탄압 같지만, 최근 그 실상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이명박(MB) 정부 국정원의 문화예술인 탄압 행태도 그 못지 않다. MB 정부 국정원은 분야별 문화예술인 82명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이들의 정치적 성향을 분류했고, 방송사에 압박을 가해 입맛에 맞지 않는 연예인들의 출연을 막았다. 너절한 합성사진과 댓글공작으로 이미지도 훼손했다.
 

■ 성향 분류·퇴출 압박·합성사진…국정원의 연예인 활용법 

코미디언 김미화씨는 2010년 7월6일 SNS에 “김미화는 KBS 내부에 출연금지 문건이 존재하고 돌고 있기 때문에 출연이 안된답니다”며 “KBS에 근무하시는 분이 이 글을 보신다면, ‘블랙리스트’ 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돌아다니고 있는 것인지 밝혀주십시오” 라는 글을 올렸다. 같은해 4월 김씨가 KBS <다큐멘터리 3일> 내래이션을 맡자 KBS 김인규 사장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내래이터가 잇따라 출연해 게이트키핑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문제를 삼은 지 석 달 만에 올린 글이었다. KBS는 “블랙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김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고, 김씨는 이듬해 4월 10년간 진행하던 MBC 라디오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에서도 급작스럽게 하차했다.

7년이 지난 지금 김씨가 올린 SNS 글은 하나 둘씩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가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로부터 보고받은 ‘MB정부 시기의 문화·연예계 정부 비판세력 퇴출 건’ 과 MB 정부 청와대의‘좌파 연예인 비판활동 견제 방안(2010년 4월)’ 문건 등에 따르면 국정원은 분야별로 좌파 문화예술인 82명의 명단을 만들고 관리했다. 문화계는 이외수·조정래·진중권씨 등 6명, 배우 겸 방송인 문성근·명계남· 김민선·김미화·김구라·김제동씨 등 16명, 영화감독 이창동·박찬욱·봉준호씨 등 52명 등 총 82명이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국정원은 아예 정부 비판 연예인들의 프로그램 배제, 퇴출 등 압박을 위해 2009년 7월 김주성 당시 국정원 기조실장 주도로 문화·연예계 대응을 위해 ‘좌파 연예인 대응 TF’를 구성했다. 국정원이 2009년 12월24일 작성한 ‘라디오 시사프로 편파방송 실태 및 고려사항’에는 김미화씨에 관해 “퇴출, (경영진에) 교체권고, 프로그램은 개편으로 폐지”라는 ‘지시사항’이 담겼다. 국정원은 해당 문건에서 “(2010년 6월) 지방선거 앞두고 정부 비판 급증 예상”이라며 “방송사 행정 제재, 경영진 주의 환기”라는 ‘지침’을 내렸다. 

방송인 김제동씨가 지난달 서울 상암 MBC 사옥에서 파업 집회를 열고 있는 조합원들과 만나 이명박 정권 때 당한 방송출연 제약 등의 경험을 들려주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방송인 김제동씨가 지난달 서울 상암 MBC 사옥에서 파업 집회를 열고 있는 조합원들과 만나 이명박 정권 때 당한 방송출연 제약 등의 경험을 들려주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방송인 김제동씨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 사전 행사를 진행하고, 이듬해 1주기 추도식 때 사회를 보면서 MB 정부의 눈 밖에 났다. 김씨는 2009년 10월 진행 중이던 KBS <스타 골든벨>에서 하차 통보를 받았고, KBS <해피투데더>출연도 촬영 전날 취소됐다. 2010년 4월 MBC 에서 진행 중이던 <환상의 짝꿍>도 폐지됐다. 2010년 1월19일 국정원에서 작성된 ‘문화예술체육인 건전화 사업 계획’에는 김미화씨, 김제동씨 등을 ‘퇴출 대상’으로 삼고 “방송사 간부, 광고주 등에게 주지시켜 (이들을) 배제하도록 하고 그들의 비리를 적출하여 사회적 공분을 유도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는데, 이것이 일부 현실화된 셈이다. 퇴출TF와 별도로 국정원 심리전단은 온라인상에서 특정 연예인을 ‘종북 성향’이라고 낙인찍어 공격하기도 했다. 

배우 김규리씨는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때 “광우병이 득실거리는 소를 뼈채로 수입하다니... 차라리 청산가리를 입안에 털어 넣는 편이 오히려 낫겠다”라는 글을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에 올렸다가 국정원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 김씨는 최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해 “(내가 쓴 글에) 청산가리 하나만 남게 해서 글 전체를 왜곡했던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며 “그 누군가가 10년 동안 가만히 있지 않고 내 삶, 내가 열심히 살고 있는 틈 사이사이에서 (나를) 왜곡했다”고 말했다. 

배우 문성근씨가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피해자로 조사를 받기 위해 1지난달 1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들어서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배우 문성근씨가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피해자로 조사를 받기 위해 1지난달 1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들어서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국정원 심리전단은 배우 문성근씨와 김여진씨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기 위해 둘의 나체 합성사진도 직접 제작해 인터넷에 유포했다. 해당 합성사진을 만들어 유포한 국정원 직원은 최근 구속됐다.
 

■ 왜 연예인일까 

MB 정부 국정원의 ‘블랙리스트’ 명단은 연예인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지만, 연예인들에게 특히 조직적으로, 전방위적으로 압박을 하려 한 정황이 눈에 띈다. 대중적 영향력이 크고 여론과 이미지에 민감한 연예인들의 직업적 특성을 정치적으로 악용한 것이다.

국정원은 퇴출 대상인 블랙리스트 뿐만 아니라 ‘지원 대상’인 우파 연예인 리스트까지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이 2010년 작성한 ‘연예계 좌파실태 및 순화방안’ 문건에는 친정부 성향의 연기자, 개그맨들을 ‘좌파 연예인들의 대항마’로 거론하며 이들을 정부 주관 행사나 공익광고에 우선 섭외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중앙대 사회학과 신광영 교수는 “일반 대중과 접촉면이 넓고, 영향력도 있는 연예인들을 압박하는게 파급력이 있다고 본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화씨 등 국정원 블랙리스트 관련 피해자들을 소환 조사한 검찰은 추석 연휴가 끝난 뒤 국정원 개혁발전위에서 넘겨받은 자료 등과 함께 수사에 더욱 속도를 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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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0060732001&code=910100#csidx949139f5bbd60dabde06137228620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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