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던 가게엔 체인점이 많은 다른 빵집과 우리 가게가 비교당하는 걸 자존심 상해하는, 프라이드가 강한 '사모님'이 계셨다(사실 사장님이었는데, 다른 직장에 다니는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한사코 자신을 '사장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다). 나는 케이크 상자 하나하나를 포장할 때 손으로 예쁘게 리본을 묶어 내놓으면서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집에서는 만 원짜리 몇 장의 행방을 가지고 엄마와 아빠 사이에 끼어 비참한 전투를 벌여야 할 때가 많았으므로, 어쨌든 최저시급 삼천 얼마나마 내 손으로 직접 돈을 버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스무 살의 나에게 큰 자부심이었던 것 같다.
일하던 추석 당일 자취방에는 형광등이 나갔다. 문 닫은 편의점들 사이를 헤매며 '당연한 것'이 없을 때 느껴지는 설움을 새삼 느꼈다. 겨우 먼 곳에 있는 편의점까지 가서 형광등을 하나 샀다. 그때나 지금이나 키가 작은 나는 천장에 손이 닿으려면 의자 위에 올라가야 했는데, 그때 집에 있는 건 회전의자뿐이었다. 그 위에 올라가 식은땀을 흘리며 난생처음 형광등을 갈아보았다.
형광등을 돌려야만 갈아 끼울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고, 이게 왜 잘 안 빠지는지 몇 번이나 고개를 올렸다가 내렸다가 하면서 혹여나 의자가 돌아가서 추락사하진 않을까, '형광등 갈아 끼우다 그만...자취생의 쓸쓸한 죽음' 같은 헤드라인으로 뉴스에 나오진 않을까 걱정했다.
그 첫 추석을 기점으로 이렇게 명절에도 일을 해야 하는 5인 이하 사업장의 서비스업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내는 동안 나는 '명절맞이 귀향길'의 행렬에 동참할 수가 없었다. 나는 집에, 그러니까 '본가'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집'은 이상한 개념이다. 보통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 부모의 집을 '집', 또는 '본가'라고 부르고 그 외의 공간에 미·비혼의 자녀들이 살고 있으면 그곳은 '집'이 아니다. 먹고 자고 한 사람 몫의 집안일을 해내며 그곳에서 각자의 일상이 흘러가고 있어도 좀처럼 거길 '집'이라고 부르는 일은 없다.
'집'에서 빠져나가는 개념들은 기숙사, 자취방, 고시원 같은 '유사 주거공간'들이다. 아마도 언중(言衆)의 무의식 속에 '집'의 원형이미지는 "귀여운 새들이 노래하고 집 앞뜰 나뭇잎 춤추"는 곳에, 반드시 혼인 관계로부터 파생된, 적어도 두 세대 이상의 식구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인 것 같다.
그러니까 명절이란, 바다에서 태어나 강에서 자란 연어들이 바다로 회귀하듯이 '유사 주거공간'에 사는 인간들이 대규모로 '집'에 돌아가야 마땅한 시기인 것이다. 내 경우엔, 명절에도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사정이 있어 '집'에 가지 못하는 것은 남들이 보기에 충분히 딱하고 그럴듯한 사유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리저리 아르바이트를 조정하면서라도 '집'에 갈 수 있게 되고 난 이후에 발생했다.
가족 대신 '좋아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명절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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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이상 가족과 친척을 만남으로써 오는 스트레스를 참을 수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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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슬러 올라가서 짚어 보자면, 우리 부모 대의 명절나기는 사정이 조금 복잡하다. 아버지 쪽의 친가는 모두 6남매인데, 아버지의 아버지, 즉 친할아버지 쪽은 일찍 돌아가셔서 사실상 '우리 남매들이 여기에 모여야만 한다'는 기준이 없어, 구심점 없이 흩어진 상태다. 그렇기에 삼 대 이상이 모여 북적북적하게 지내는 명절은 물 건너간 셈이다.
외가 쪽은 차 타고만 네다섯 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먼 지방으로, 거기까지 한번 가기가 쉽지 않으며 또한 구심점이 되어줄 만한 외조부모 역시 부재한 상태다. 그리하여 명절이라 하여 우리 다섯 남매와 엄마아빠가 '집'에 모이면 이런 코스를 거쳤다. 우선 우리와 아주 데면데면한 사이인 첫째 큰어머니(설상가상으로 큰아버지가 안 계신다)댁에 한 번 들러 밥 한 끼 얻어 먹고, 아버지의 생가에 한 번 들러 얼굴 도장 찍기. 이것이 부모 세대에게 묻어가는 나의 명절나기였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도대체 거기에 왜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막연히 3촌 정도의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던 큰어머니는 사실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며, 그녀라고 도통 애를 주렁주렁 달고 오는 가난한 '도련님'의 방문이 기꺼울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일 년에 두 번쯤 보는 아버지 '생가'에 사는 친척들 역시 나와 거리가 한참 멀어 사실상 남에 가까운 사람들이란 것도 알았다.
그건 이상한 방식으로 자란 눈치였다. 친구들 사이에서 받은 세뱃돈을 셈하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받은 돈이 친구들 평균에 비해 아주 적거나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각자 세뱃돈을 주머니에 넣고 눈치 싸움을 벌이는 명절, 팔자에도 없던 '도련님' 쪽 아이들이 여럿 들이닥치는데 저쪽 일찌감치 결혼한 사촌 오빠네 아이는 한둘일 때, 우리 집 쪽에선 그 아이들에게 선뜻 만 원짜리가 아니라 천 원, 오천 원짜리를 쥐여줄 때, 우리를 썩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의 밥상머리 앞에서, 그 '눈치'란 게 늘어갔다. 우리가, 내가 그 '친척집'들에 전혀 반가운 존재가 아니란 걸 알게 된 이후로 나는 그곳들로부터 발길을 끊기 시작했다.
이후의 난관은 부모의 집도 내게 '명절' 때나 돌아가게 되는 곳이 되었을 때 펼쳐졌다. 한해 두해 원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시기가 길어지며, 나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버렸다. 부모의 집에서 하루에도 수차례 벌어지는 소란들이 당연한 일상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가끔 주어지는 휴식 시간이면 조용한 내 자취방이나 기숙사 책상에 앉아 좋아하는 책을 펴들고 창으로 떨어지는 햇볕을 맞으면서 꾸벅꾸벅 졸았다. 아무도 그 평화를 깨지 않았다.
'집'이란, 서로 잘 맞물리지 못하고 삐걱대는 소음에 가까운 언어들이 부유하는 곳. 좁은 공간에 여러 식구가 몰려 사는 탓에 잦은 사건·사고가 일어나고, 그로부터 비롯된 소음이 끊이지 않는 공간. 절대로 끝나지도 않고 해결되지도 않는 만성적인 갈등으로 가득 찬 곳이 나의 '집'이었다. 평온한 나의 현재가 그런 '집'에서 겪은 시절의 기억과 대비될 때마다 그 고요는 내게 정말로 이질적이고도 이상하고도 소중한 것이었다.
나는 스물여섯이 되던 해 설날에 그 '집'에서 발작을 했다. 발단은 부모 사이의 흔한 말다툼이었다. 중간에서 눈치를 보며 내가 이 공간에 발붙이고 있는 단 하룻밤만이라도 이 갈등을 어떻게든 무마시켜보려고 애를 쓰던 끝이었다. 나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나의 공간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통장에 단 십만 원이라도 있으면 당장 택시를 탔을 거라고, 내가 이번에 여길 떠나면 나는 다신 여기 오지 않겠다고 했다. 내가 쓰러져서 발작을 하자 갈등은 어물어물 없던 일이 되었다. 다음날이 되자, 그 모든 일이 없던 일인 것처럼 '가족'들은 한 냄비에 숟가락을 넣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명절에 더 이상은 집에 가지 않기로 했다. 그 후로 2015년 추석이 되기까지, 명절은 내게 좀비가 휩쓸고 간 도시에 홀로 남겨지는 것 같은 체험을 하는 때였다. 나는 아무리 바빠도 명절이 들이닥치기 전에 미리 장을 봐 두거나, 미처 장을 보지 못해 냉장고가 텅텅 비었을 때는 주변의 맥도날드를 이용해 끼니를 때우는 요령을 익히게 되었다.
주변에서 자꾸 "명절에 집에 안 내려가느냐"고 물으면, 바빠서 못 내려가게 되어서 아쉽다고 말하든지, 아니면 내려간다고 거짓말을 하든지 하고 자취방에서 미드나 몰아서 보면서 몇 해를 보냈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나서야, 이제 더 이상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화목한 정상가족'이 있는 것처럼 연기하면서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상술할 수 없을 만큼 여러 사건과 조건이 겹치며 내리게 된 결정이긴 했지만, 중요한 건, 나는 어느 순간부터 명절을 '가족'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으로 보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번 추석, 엄마를 '집'에 초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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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엄마에게 대접하기 위해 만두를 빚어, 떡만둣국을 해드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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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추석부터 "페미니스트답게" 나기로 했을 때, 이런저런 사정으로 원가족에게서 탈출해 모인 사람들은 요리와 설거지와 청소를 분담했고, 밤새도록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때부터였다. 내 '명절나기'가 '페미니스트다워'진 것은 말이다. 나는 지난 몇 해 간 우리 집에 친구들을 초대하거나, 친구들의 집에 초대받아 가거나 해서 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고 영화를 보고 게임을 했다. 그게 나의 명절나기였다.
올해 명절은 조금 사정이 달라졌다. 사실 이 글이 쉽게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한 것도 갑자기 발생한 특이사항 때문이다. 나는 올해 명절에, 사실상 처음으로 엄마를 내 집에 초대하기로 했다. 여기서 나의 '집'이란 통념적인 의미와는 다르게, 오래 함께 살아온 나와 셋째 여동생, 둘을 중심으로 해서 함께 생활해 나가는 몇 명의 사람들이 단단하게, 때로는 느슨하게 공유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엄마와의 관계로부터 무조건 '단절'되는 것만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믿고 어떻게든 분리되어 나오려고 애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면, 지금의 내가 '페미니즘'적으로 그녀의 삶을 이해하려 노력하면서는 엄마와 내 관계가 절대로 그냥 단절될 수는 없단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녀에게 임신과 출산과 육아를 겪게 하면서 여러 가지로 빚이 있고, 그녀는 서투르고 엉망이었을지언정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온 사람이다.
한편 그녀는 조실부모하고 '어른'의 돌봄 없이 자라났으며 결혼 이후로는 가정폭력에 오래 노출되면서 생활의 요령을 쌓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커리어와 가정생활이 양쪽으로 엉망이고, 맹목적 신앙의 이름으로 내게 이런저런 가해를 하기도 했다.
우리 사이의 이런 복잡한 사정이 하루아침에 정리될 거로 생각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좋아서 내 집에 초대하는 사람'의 목록에 엄마를 넣어 보고 같이 명절을 나 보는 것이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추석 당일, 엄마가 다녀갔다. 요약을 하자면 오면서도, 있으면서도, 가면서도 순탄하지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원하지 않는 다른 가족을 내게 말도 없이 데려오려 했는가 하면, 내가 그 점을 따지고 드니까 그럼 아예 안 가겠다고 툭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러더니 당일엔 또 말도 없이 "지금 가고 있다"고 통보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미 펑크가 난 스케줄을 계산해서 다른 친구들을 집에 불러 놓은 상태였는데, 사람이 복작복작한 우리 집에 도착해 "좀 피곤해서 자야겠다"더니 늦은 저녁에 일어나서 아무 설명도 없이 "이제 간다" 해버렸다.
나와 내 동생은 엄마의 향후 생활과 우리들의 관계에 대해서 논의할 거리를 미리 정해 놓고 같이 나눠 먹을 것, 같이 보고 즐길 것들을 기껏 고민해 두었는데, 엄마는 이런 얘기를 꺼낼 새도 주지 않았다. 어느덧 나이 먹은, 작고 사랑스럽고 고집스러운 이 친족 여성과 잘 지내는 일은 왜 이렇게 힘이 드는 일이란 말인가. 탄식했다. 결국 친구들은 모두 귀가하고, 한밤중에 동생들과 쪼르륵 달려가서 돌아가며 엄마와 싸우고 어르고 달래고 나서야 겨우 집에 다시 '모셔'올 수 있었다.
우리집 명절 음식은 만두다. 내가 어릴 때부터 송편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래서 송편은 데면데면한 큰어머니 댁에나 가야 구경하는 음식이었다. 엄마아빠는 명색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그래서 딱히 틀에 박힌 명절 요리를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만두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했다. 잘 익은 김치를 꼭 짜서 썰어 넣고, 두부, 당면, 간 돼지고기 볶은 것을 섞어서 빚는 만두다.
나는 친구들을 초대해서 명절 요리를 만들 때도 반드시 이걸 만들었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늦은 밤이지만 엄마가 오기 전에 미리 빚어 둔 만두를 가지고 엄마가 좋아하는 가래떡을 넣어서 떡만둣국을 끓여드렸다. 엄마는 맛있다고 했다.
결국 그렇게 다들 모여 앉아서 하려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 얘기들은 잘 끝난 편이기는 하다. 그리고 엄마는 또 다음 날 일을 하러 나가려면 길 안 밀리는 지금 가야 한다며 새벽 세 시 반에 휙 가버리긴 했다. 나와 동생들은 슬리퍼를 꿰어 신고는 쪼르륵 따라 내려가면서 엄마에게 이것저것 챙겨 주고 안아 주고 차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털레털레 귀가했다.
아아, 이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아직 추석이다. 한 해 중에서 내가 제일 맘에 들어하는 기온과 풍속과 습도의 가을 무렵. 나는 이렇게 엄마가 나의 소중한 '일상'을 잠시 휘저어 놓은 가운데, 우리가 간밤에 이야기 나눈 회의 내용을 글로 정리해서 가족 텔레그램방에 공유도 하고, 이 글도 적어 내려가며 정신을 가다듬는 중이다. 아직 며칠 남은 추석 연휴 동안에는 밀린 일도 정리하고, 친구들과 영화도 보고, 등산도 하면서 내 페이스를 찾아 다시 잘 보낼 예정이다.
이것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자유'를 찾고, 그 다음에는 '해야 할 것을 해 나가는 용기' 를 내는 중인 나의 페미니즘 실천기다. 자신의 주소지로 돌아가 버린 엄마도 좀 더 행복했으면 좋겠고, 다음 명절 즈음엔 그녀의 삶도, 나의 삶도, 우리들의 관계도 조금 더 좋아져 있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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