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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 전사’ 3인 43년 만에 다시 모이다

마석모란공원에서 이장식.. 김병권·신향식·이재문
마석=이창훈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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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30  20: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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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권·신향식·이재문 등, ‘남민전 전사’ 3인의 이장식이 30일 오전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열렸다. 사진은 신향식 선생의 이장식이 끝난 뒤 참석자들이 함께 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남민전 전사’ 3인이 사건발생 43년 만에 다시 모였다. 

긴 겨울을 이겨낸 새싹을 키워내는 봄비가 내리는 30일 오전 11시 정각,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남민전 전사 3인 김병권(고양시 청아공원에서 이장), 신향식(경기도 광주공원묘원에서 이장), 이재문(인천시 천주교 공원묘지에서 이장) 선생의 이장식이 열렸다.

이날 세 번의 이장식 사회는 남민전 관련자 박석삼 씨가 맡았으며, 세 명의 약력 소개 역시 남민전 관련자인 탁무권 씨가 맡아 진행하였다.

이날 열린 세 번의 이장식에서는 남민전 관련자인 고 김남주 시인의 시 세 편이 소개되었다. 

먼저, 시 「김병권 선생님」과 이재문 선생을 떠올리면 쓴 「전사 1」 그리고 신향식 선생을 떠올리며 쓴 「전사 2」가 김남주 시인의 육성으로 낭독되었다.
 
하루에 세 번의 이장식을 치르는 어려움 때문에 서둘러 이장식이 진행되었으며, 총 여섯 명의 추모발언이 이어졌다.

   
▲ 김병권 선생 묘역. [사진-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 김병권 선생 부부 영정. [사진-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먼저, 김병권 선생 묘역에서는 남민전 관련자 김종삼 씨와 범민련 남측본부 노수희 부의장이 발언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종삼 씨는 “자상하면서도 노혁명가의 굳건한 모습을 간직하셨던 선생님!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어도 항상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도록 의자를 북돋아 주시던 선생님!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하여 낙담하고 있을 때 ‘괜찮아! 괜찮아!’ 하시면서 다른 관점에서 희망의 불씨를 살려 주시던 선생님! 선생님이 그립습니다”라고 말하고, 마지막에 “그리고 남아 있는 우리들이 시대의 물음에 잘 답할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라고 마무리하였다.

   
▲ 이재문 선생 묘역에서 이장식이 열렸다. [사진-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두 번째 이장식이 진행된 이재문 선생 묘역에서는 남민전 관련자인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과 한국진보연대 전창일 상임고문이 발언하였다. 

이 자리에서 권오헌 명예회장은 “저희들이 작은 정성을 모아 38년 동안 백석동 천주교묘지에 외롭게 계시던 선생님을 이곳 많은 열사분들이 계신 마석모란공원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 뒤, 자신의 집에서 피신해 있었을 때의 일화를 소개하며 “다진 마음 변함없이 잘 싸우라!”라고 말이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고 말했다. 

또, 최근 변화된 남북관계와 미국의 처지를 설명하며 “43년 전 남민전 지도부가 결의했던 민족자주와 대단결 정신으로, 침략외세를 몰아내고 자주통일세상을 이뤄내야 할 것”이라며 추모발언을 맺었다.

   
▲ 신향식 선생 묘역. [사진-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세 번째 이장식이 진행된 신향식 선생 묘역에서는 남민전 관련자인 차성환 부마항쟁진상규명위 상임위원과 추모연대 박중기 이사장이 발언하였다. 

이 자리에서 차성환 상임위원은 “선생님께서는 항상 소탈하신 모습으로 저희들과 호흡을 같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법정에서도 당당하게 거침없이 자기의 소신을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말한 뒤, “선생님을 이곳 민족민주열사묘역에 다른 세분과 함께 모시게 되어서 그나마 저희들이 못 다한 도리를 조금이나마 면하는 것 같아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새로 모신 자리에서 영면하시길 바랍니다”며 말을 마쳤다. 

또한, 세 유가족들은 모두 비가 내리는 가운데도 자리를 같이 해준 부친의 동지들과 여러 분들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남겼다.  

   
▲ 세 번의 이장식을 마친 참가자들은 마석모란공원에 먼저 자리를 튼 남민전 관련자 박석률 씨의 묘역을 찾아 참배하였다. [사진-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한편, 이날 이렇게 세 번의 이장식을 마친 참가자들은 마석모란공원에 먼저 자리를 튼 남민전 관련자 박석률(2017년 7월 25일 작고) 씨의 묘역을 찾아 참배하였다. 

 

김병권(1921년~2005년 당시 85세) 약력

192. 12. 5.    경북 대구 출생. 
1942~1945.   일본에서 강제징집을 피해 만주로 감. 
1946. 3.       해방 후 귀국하여 대구대중일보 기자로 미군정과 대립하다 폐간. 
1946.          박윤수와 결혼. 
1960.          4.19 혁명 후 사회당 경북도당 상임위원. 
1961. 5.       남북학생회담 추진 시민결의대회 조직 관련 박정희 군사정권에 체포. 
1964.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연루 수배 당하여 피신. 
1968.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권재혁 등과 체포, 징역 5년 선고. 
1975.          사회안전법 발효로 신향식 등과 지하활동. 
1976. 2. 29.   이재문, 신향식과 함께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결성. 
1976. 3. 3     반공법 위반 체포로 징역 3년. 형기 만료 후 전향 거부로 감호 처분. 
1980. 12.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사건으로 대법원에서 15년형 확정 판결. 
1995. 2.       범민련 남측본부 중앙위원, 재정위원장. 
1995. 11. 29.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 사건으로 3년 6월 선고 후 형 집행정지로 출소. 
2002~2003.    6.15 공동선언실천과 한반도평화를 위한 통일연대 고문.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2003.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치료, 안산 ‘행복의 집’에서 투병생활. 
2005. 9. 21.   오후 2:30 운명. 일산 청아공원 안치
2019. 3. 30.   마석 모란공원으로 안치

 

신향식(1934년~1982년 당시 48세) 약력

1934. 12. 1.  전남 고흥에서 父 신춘우과 母 정정옥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1959. 11. 30. 전남 고흥 이계영과 결혼. 
1964. 2.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졸업. 
1965. 5.      동아출판사 제작부에 취업하여 임금투쟁과 노조결성. 
              ‘학사주점’과 ‘60년대 학사회’ 상무간사로 활동. 
1966.         재경고흥군 학사모임 ‘삼산친목회’ 결성. 
1968. 8.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징역 3년 6월 선고. 
1972. 2. 25.  비전향 만기출소. 
1975. 7.      박정희 군사독재의 사회안전법 발효에 맞서 간고한 지하투쟁 돌입. 
1976. 2. 29.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결성, 중앙위원으로 활약.
1980. 12. 23. 피검 후 81년 12월 23일 대법원 상고심 기각, 법정 최고형인 사형 확정. 
1982. 10. 8.  정오 12시 서울구치소 교수대에서 형 집행.

 

이재문(1934년~1981년 당시 47세) 약력

1934. 7. 9.  경북 의성에서 父 이만욱과 母 김원남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 
1957.       경북대 정치학과 졸업. 바로 영남일보사 견습기자로 입사. 
1960.     대구매일신문 정치부기자 근무. 4.19 혁명 후 ‘민족일보’가 창간되자, 정치부기자 참여. 우홍선 등과 ‘통일민주청년동맹’ 조직. 
1961.      5.16 군사쿠데타로 ‘민족일보’가 폐간되고 간부들이 검거되면서 수배.
1964. 8.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65년 1월 2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 
1965. 5. 25.  가톨릭신문 기자 김재원과 화촉.
1971.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구경북지부 운영위원 겸 대변인 역임. 
1974. 4      ‘민청학련’ 사건으로 1급 수배를 당하여 지하활동에 들어감. 
1975. 4. 9.   ‘인민혁명당’ 사건 8열사 학살을 목격하고 정권에 맞설 조직을 구상. 
1976. 2. 29.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결성, 서기에 추대. 
1979. 10. 4.  수배 속에서 민족해방과 반파쇼 민주화투쟁에 헌신하다 체포. 
1980. 12. 23. 법정투쟁을 다했으나 대법 최종심에서 법정 최고형 사형으로 확정. 
1981. 11. 22.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포승줄에 묶인 채 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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