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 더해, 국가원수를 연상시키는 여타 권한들도 상임위원장한테 주어졌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법령 공포권(제53조 제1항), 법령 집행권(제75조), 사면권(제79조), 훈장 수여권(제80조)까지도 1948년 북한 헌법에서는 상임위원장에게 부여됐다.
심지어 내각의 결정과 지시를 위헌·위법을 이유로 폐지할 수 있는 권한까지도 인정됐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김일성 수상의 결정과 지시를 폐지할 수 있는 권한이 헌법상으로나마 인정됐던 것이다.
이렇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북한을 대외적으로 대표하던 시절에 이 자리를 역임한 두 인물이 김두봉(재임 1948~1957년), 최용건(재임 1957~1972년)이다. 이 중 김두봉은 유명한 한글 학자다. 한글학자 주시경의 뜻을 남한에서 이어받은 대표적 제자가 최현배라면, 김두봉은 북한에서 그 뜻을 이어받은 대표적 제자다. 김두봉과 최용건이 상임위원장을 하던 시절에 김일성은 최고지도자이기는 했지만 북한을 대외적으로 대표하지는 못했다.
그랬던 북한의 권력구조를 획기적으로 일변시킨 게 1972년 12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 회의의 헌법 개정이다. 이때 등장한 1972년 헌법에서는 주석제를 신설하면서 주석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이 헌법 제89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은 국가의 수반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권을 대표한다"고 규정했다. 북한을 대외적으로 대표할 권한도 함께 부여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1972년 12월 27일이 남한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한껏 높인 유신헌법이 공포·시행된 날이라는 점이다.
한편, 종전에 국가를 대표했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으로 바뀌었다. 명칭만 바뀐 게 아니라 권한도 축소됐다.
1972년 헌법 제87조에 따르면, 상설회의 의장은 최고인민회의를 운영하는 것 외에, 법령을 심의·결정·해석하고 중앙재판소 판사와 인민참심원을 선거하거나 소환하는 정도의 권한 밖에 갖지 못하게 됐다. 1972년 헌법 발효와 함께 상설회의 의장직에 최초로 임명된 인물이, 그로부터 25년 뒤인 1997년 북한을 탈출하게 될 주체사상 이론가 황장엽이다. 김일성이 1972년 헌법을 통해 국가 대표권을 갖게 된 배경은 국내적 요인과 국제적 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 국내적 요인에 관해서는, 조재현 성균관대 법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논문 '북한 헌법 개정의 배경과 특징에 관한 헌법사 연구'에서 아래와 같이 요약했다. 아래 인용문 속의 '8월 종파 사건'은 반(反)김일성파가 집단 숙청된 일을 가리킨다.
"북한은 1956년 '8월 종파 사건'과 1961년 9월 4차 당대회를 기화로 김일성 1인 지배체제를 확립하였고, 이에 대한 헌법적 수용은 1972년 헌법에서 절대 권력의 국가주석제를 신설함으로써 구현되었다."
-미국헌법학회가 2018년 발행한 <미국헌법 연구> 제29권 제3호.
김일성 권력이 공고해졌다는 국내적 요인에 더해, 1970년 전후로 중국과 미국·일본이 접촉하는 탈냉전 혹은 데탕트가 확산됐다는 국제적 요인도 1972년 헌법의 등장에 기여했다. 냉전질서가 흔들리는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응해야 할 상황에서 북한 지도부는 강력한 주석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이런 분위기에서 60세의 김일성(1912년 생)이 이전에 갖지 못했던 국가대표권까지 갖게 됐다.
북한이 김일성 사망 후 다시 권한 나눈 이유는?
국가주석에게 국가대표권까지 부여하는 시스템은 1994년 김일성 사망 후의 정치상황을 반영한 1998년 헌법 개정 때 소멸됐다. 1998년 헌법은 전문(서문)에서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격상시킴으로써 주석직을 사실상 공석으로 두는 한편, 국방위원장이란 자리에 최고권력을 부여했다.
그러면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의 명칭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복원시키면서, 상임위원장에게 국가를 대외적으로 대표할 권한을 부여했다. 1948년 헌법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한편, 김정일이 맡는 국방위원장의 권한을 높이는 동시에, 내각 총리가 정부 대표의 지위를 갖도록 규정했다. 김정일이 국가를 대표할 권한은 물론 정부를 대표할 권한도 가질 수 없게 됐던 것이다.
북한이 1998년 헌법을 통해 최고지도자(국방위원장)와 국가대표자(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를 분리한 배경은 그때가 '고난의 행군' 시기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제1차 북·미 핵위기 및 김일성 사망 이후로 고난의 행군이라는 경제 위기를 겪는 상황에서 최고지도자의 위상을 지키고자 권력 분산형 헌법을 내놓았던 것이다. 장명봉 국민대 교수의 논문 '북한의 1998년 사회주의헌법 개정의 배경·내용·평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으로서 군부 장악을 통한 실질적인 최고권력을 행사하되, 대내외적 국가 대표 기능은 제3자에게 맡기고 또 식량난 극복 등 경제회생의 책임도 제3자에게 맡기면서 '위대한 영도자'에 대한 권위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말하자면, 김정일은 책임은 지지 않고 군림하는 체제를 구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공법학회가 1999년 발행한 <공법연구> 제27집 제2호.
김일성은 정권 기반이 공고화됨과 더불어 탈냉전으로 세계질서가 바뀌는 상황에 대처하고자 1972년 헌법 개정을 통해 국가 대표권을 자신한테 돌리고 자신의 권한과 책임을 극대화했다. 반면, 김정일은 북미 핵대결 뒤에 고난의 행군을 겪는 위기 상황에서 정권을 지키고자 1998년 헌법 개정을 통해 국가 대표권과 내각 운영권을 남한테 주고 권한과 책임을 분산시켰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은 1998년 체제에 입각해 북한을 이끌었다. 이에 따라 김영남이 김정일 시대에 이어 김정은 시대에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북한을 대외적으로 대표했다.
그랬던 김정은이 지난 4월 11일 북한을 대표하는 권한까지 보유하게 됐다. 1972년 겨울에 할아버지가 도달했던 권력 수준에 근접하게 된 것이다. 정권을 잡은 지 8년 만인 36세의 김정은이, 정권 잡은 지 24년 뒤인 61세의 김일성과 비슷한 위상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모든 책임을 져도 괜찮을 만큼 김정은의 권력기반이 안정화됐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북미관계 교착이라는 현 위기 상황을 '보다 더 많은 책임을 떠안는 방법'으로 돌파하려는 의지를 굳혔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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