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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이 만들고 추진한 정책 ‘농민수당’, 전국으로 확산중

기초단체 속속 도입..광역자치단체에선 주민참여조례안 발의되거나 청구인 서명 중

이소희 기자 lsh04@vop.co.kr
발행 2019-09-12 16:26:12
수정 2019-09-12 17:3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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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를 앞두고 경기도 수원 인근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추석 귀성 차량들. 좌우로 벼가 익어가는 논이 보인다.(자료사진)
추석 연휴를 앞두고 경기도 수원 인근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추석 귀성 차량들. 좌우로 벼가 익어가는 논이 보인다.(자료사진)ⓒ양지웅 기자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 많은 이들이 도시를 떠나 고향인 농촌으로 향한다. 지루한 교통체증을 뚫고 몇 시간 만에 도착한 고향 들녘엔 폭염과 태풍을 견딘 곡식과 과일이 영글어 간다. 탐스럽게 익어가는 농작물을 보며 올 한해도 애써 농사를 지은 농부들을 떠올리게 된다.

농부들이 농사를 짓지 않는다면 어떨까? 돈벌이가 잘 되지 않고 고생스럽다며 논밭과 과수원을 두고 모두 어디론가 이주한다면 어떻게 될까. 믿고 먹을 수 있는 국산농산물이 없어지는 것은 물론, 잘 정돈된 들녘과 오밀조밀한 고향 풍경은 없어지고 사람의 온기가 사라져 황폐해진 폐허가 우리를 맞게 되리라.  

이렇듯 농민들의 사회적 역할은 농산물 생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 도시 외 수많은 지역이 황폐해지지 않게 관리하고,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으로 꾸려가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아무도 이 역할에 주목하지 않았다. 정부는 1990년대 이후 각종 무역협상에서 농업부문을 개방해, 농가소득이 줄고 농민들이 피폐해지는데도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사회는 농민들의 노력을 제대로 인식조차 못했다.  

농업과 농촌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농민들이 스스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자신들이 하는 사회적·공익적 역할에 대해 이제라도 국가가 인정하고 소득으로 보전해 줘야 한다는데 뜻을 모은 것이다.  

농민수당 도입을 위해 공부하는 농민들.2019.08.13
농민수당 도입을 위해 공부하는 농민들.2019.08.13ⓒ사진 = 농민 민중당 페이스북
4.13 20대 총선을 보름여 앞둔 가운데 농민의길 소속 농민단체 대표들이 29일 오전 광화문 광장에서 '농민수당, 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 도입'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20대 총선 농정공약 발표 회견을 하고 있다.
4.13 20대 총선을 보름여 앞둔 가운데 농민의길 소속 농민단체 대표들이 29일 오전 광화문 광장에서 '농민수당, 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 도입'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20대 총선 농정공약 발표 회견을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주경야독 끝에 농민들이 만들어 낸 정책  

‘농민수당’은 그렇게 탄생했다. 2015년 처음 전국농민회총연맹에서 논의를 시작했고, 이어 2016년엔 농민단체 연대체인 농민의길에서 논의를 진행했다. 농민들은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규정한 ‘농업의 다원적 기능’, 현행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기본법」이 짚은 ‘농업 농촌의 공익적 기능’을 자신들이 하고 있다고 봤다.  

그래서 ‘농민수당’은 농민이 농업을 하며 식량의 안정적 공급, 생태계의 보전, 국토 환경 및 자연경관 보전 등을 통해 공익적 기능을 하는데 대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보상해 주는 형태를 취하게 됐다.  

학습과 토론 끝에 ‘농민수당’이 정책의 얼개를 갖추자, 농민들은 2016년 총선 전 각 정당에 이를 공약으로 해 줄 것을 제안했다. 당시에 민중당이 해당 제안을 처음으로 수용했고, 전국의 농민 출신 후보들이 농민수당을 내걸고 선거에 나가 많은 유권자들에게 이를 알려냈다.

파급효과는 적지 않았다. 농촌 사회에서 공감의 물결이 일자 2018년 지방선거에서는 더 많은 정당과 후보들이 ‘농민수당’을 공약으로 하고 출마했고, 이들 중 일부는 당선돼 현재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농민수당’을 공약으로 건 명현관 군수후보(민주평화당)와 이정확 군의원(민중당) 후보가 모두 당선된 전남 해남군에선 작년 12월 28일 전국 최초로 ‘해남군 농업보전 등을 위한 농민수당 지원 조례’가 만들어졌다. 공식적으로 한국 사회 최초로 ‘농민수당’이 도입된 것이다.

전북 고창군 농민수당 지급처 안내판과 지급된 고창사랑상품권
전북 고창군 농민수당 지급처 안내판과 지급된 고창사랑상품권ⓒ사진 제공 = 독자 이대종 님

실현에도 확산에도 농민이 앞장선다  

농민들은 이 조례가 제정되는 과정에 끊임없이 참여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하, 전여농)은 농민수당 도입을 위해 농민들을 상대로 교육, 설명회, 토론회 등을 지속적으로 열었다. 전농 관계자는 군청의 정책 회의에 참여해 끊임없이 의견을 내고 담당 공무원, 전문가들과 정책이 문제없이 실행될 수 있도록 조율했다. 그 결과 해남군 농민수당은 문제 없이 시행돼, 올 6월과 9월 두 차례 농민들에게 지급됐다.  

해남의 사례는 농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신호가 됐다. 전남 함평군에서는 지난 2월 ‘함평군 농어가수당 지원 조례’가 제정돼 8월에 하반기 분이 지급됐다. 전북 고창군에서도 지난 6월 농민들이 앞장 서 만든 ‘농민수당’ 조례가 통과돼 하반기 농민수당이 한 차례 지급됐다.

먼저 기초자치단체 중심으로 ‘농민수당’ 도입의 물결이 일었다. 각지의 농민들이 주민조례발의 서명판을 들고 나가 지역 주민들에게 서명을 받고, 지방 정부에 제출하며 제도화에 발동을 걸었다. 9월 현재 전남 화순군과 영암군에서는 농민수당 주민조례발의 서명이 완료돼 후 군청에 제출됐고, 고흥군과 나주시에서는 주민조례제정을 준비중이다. 곡성, 광양에선 시민들을 상대로 한 농민수당 강연회, 설명회가 진행됐다.  

농민들이 조례안을 제출하지는 않았지만 지방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제도가 도입되는 곳도 생겼다. 경북 청송군에서는 농민회와의 협의를 거쳐 윤경희 군수 발의 조례안이 제출돼, 이번달 군의회를 통과했다.  

전라북도 농민수당 주민참여 조례제정 서명운동 모습
전라북도 농민수당 주민참여 조례제정 서명운동 모습ⓒ사진 = 농민 민중당 페이스북 페이지
전남 농민수당 주민참여조례 청구인 서명 받는 농민
전남 농민수당 주민참여조례 청구인 서명 받는 농민ⓒ사진 = 농민 민중당 페이스북

기초자치단체에서 광역자치단체로 확산 중 
주민참여조례 추진 양상, 친환경 무상급식 운동과 닮아
 

농민들은 광역자치단체 차원에서도 ‘농민수당’이 도입되길 원하고 있다. 전농은 각 시도연맹 차원에서 지역 노동·시민단체와 손을 잡고 주민참여조례안을 만들어 시도의회에 접수하고 있다.

가장 많이 농민수당이 확산된 전남도에서는 전농, 전여농이 도내 시군 순회 간담회를 통해 농민 의견을 수합했고, 전남시민 공개토론회와 심화세미나를 통해 ‘전라남도 농민수당 지원에 관한 조례(안)’을 마련했다. 지난 6월 이를 주민참여조례로 만들어 도의회에 제출하기 위해 농민단체와 민주노총 전남본부, 민중당 전남도당이 청구인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50여 일만에 제출가능인원 16,000명의 세 배에 가까운 43,000명의 서명을 받아, 7월 25일 도의회에 제출했다.

전북도에서도 7월 22일 전농, 전여농이 26개 시민 사회단체와 함께 ‘농민공익수당 조례제정을 위한 주민발의 전북 운동본부’를 발족했고, 8월 21일부터 청구인 서명을 받아 10일만에 29,610명의 도민 참여를 이끌어 냈다. 운동본부 측은 지난 4일 전북도의회에 서명지를 제출했다.

광주광역시, 충청남도, 제주도에서도 시민들이 주민참여조례안 발의를 위해 청구인서명을 받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외에도 충북도과 경남도에서 주민 조례 제정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30일 오전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친환경무상급식풀뿌리국민연대 등 시민단체가 친환경무상급식 파괴하는 표적감사 흑색선전 관권선거개입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2014.05.30
30일 오전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친환경무상급식풀뿌리국민연대 등 시민단체가 친환경무상급식 파괴하는 표적감사 흑색선전 관권선거개입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2014.05.30ⓒ김철수 기자

농민들이 주민참여조례 제정을 통해 ‘농민수당’을 도입하려 하는 데는 특별한 의의가 있다. 우선 노동자, 시민들이 함께 하는 청구인 서명운동 과정을 통해, 해당 정책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이해를 높이려 한다. 또 정책이 실현될 시 적잖은 광역시도 예산이 소요되기 때문에 서명을 받으며 시도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지지를 호소하려는 뜻도 있다.  

이는 친환경무상급식운동이 정책으로 수용된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당시 시민사회가 시작한 친환경무상급식운동은 주민참여조례제정 운동으로 이어졌고, 민주노동당은 이를 주요 정책으로 받아 안았다.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야5당(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이 ‘친환경무상급식풀뿌리국민연대’와 친환경무상급식 정책 협약을 맺으면서 이는 전국 곳곳에서 시행되기 시작한다.  

정책 도입 및 실현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일까. 현재 농민들은 작은 난관에 봉착해 있다.

유사한 내용으로 조례 내놓는 지자체와 의원들 
농민들 “주민 발의 과정 무력화하지 마라”
 

충남도에서는 시민단체들이 함께 주민참여조례 서명을 받고 있다. 도내 논산, 당진, 예산에서도 주민들이 주민조례 발의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예산군의회가 8월 27일 ‘예산군 농민수당 지원 조례안’을 입법예고해 논란이 됐다. 충남농민수당 조례제정운동본부 측은 “지자체가 농민수당 운동에 힘을 실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주민 발의 과정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전남도에서도 상황이 비슷하다. 농민들이 7월 하순 경 주민참여조례안 청구인 서명을 완료하고 도의회에 이를 제출했는데, 전남도 측이 8월 16일 ‘전남도 농어민 공익수당 지급 조례안’을 입법 예고했다. 모 정당 의원도 7월 하순 도의회에서 ‘전남도 농어민 기본수당 지급 조례안’을 발의했다. 결국 전남도의회는 이달 중 도집행부안, 주민발의안, 의원발의안까지 세 가지안을 심의하게 됐다. 지역농민단체들은 도 측에 해당 조례안을 철회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자치법규 메뉴얼을 통해 주민조례 입법 청구권을 존중하기 위해 자치단체가 유사조례를 발의하는 것을 자제하라고 지도하고 있다. 

9일 서울 국회 정론관에서 전농과 민중당이 '농민수당법, 어민수당법 발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민중당 이상규 상임대표가 농민수당법 도입의 필요성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2019.09.09
9일 서울 국회 정론관에서 전농과 민중당이 '농민수당법, 어민수당법 발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민중당 이상규 상임대표가 농민수당법 도입의 필요성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2019.09.09ⓒ사진 = 민중당

‘농민수당’의 최종단계는 입법화  
민중당, ‘농민수당법’ 발의 예고 
 

농민들이 바라는 ‘농민수당’의 최종 단계는 국가 차원에서의 도입이다. 9일 전농은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중당과 함께 ‘농민수당법’, ‘어민수당법’을 발의할 계획임을 밝혔다.

박행덕 전농 의장은 “지난해 지방선거 때 민중당이 농민수당을 공약한 이래 여러 지자체에서 농민수당이 도입되고 있다. 이를 고맙게 생각한다. 전농은 민중당과 함께 농민수당, 어민수당 도입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전농과 민중당은 이날 기자회견문을 통해 “이제 농민수당은 거스를 수 없는 농업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전국 광역자치단체 주민발의운동으로 활화산처럼 번져 나가고 있다. 이제 입법화되어야 한다.”면서 “농민수당은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인정하고 증진하기 위한 정책으로 직불제로 대변되는 소득보전 정책, 복지정책 일원화와 양극화 해소방안으로 모색되는 기본소득제와도 다른 농업정책”이라고 설명했다.  

안주용 민중당 공동대표는 “농민단체의 안을 기초로 법안을 완성키 위해 국회 법제실과 긴밀하게 논의 중이다. 오는 16일 국회 토론회를 개최해 더 넓게 의견을 수렴한 후 법안을 완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민중당이 발의할 ‘농민수당’ 법안은 몇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농민수당’을 받는 대상을 ‘농업인’이 아니라 ‘농민’으로 분명히 정했고, 국가가 관련 재원 조성의 의무를 지게 했다. 또 농민수당 지급대상 선정 등 논의를 진행할 ‘농민수당심의위원회’에 농민과 정부관계자를 1:1로 참여케 해 농민의 정책참여의 길을 열어뒀다. 지급수단을 현금과 지역화폐로 해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게 하고, 농민의 수령권 보호를 위해 ‘압류대상’ 범위에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한편, 안 공동대표는 ‘농민수당법(안)’과 함께 ‘어민수당법(안)’도 제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농민수당 법안 논의과정에서 어민수당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당사자인 어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보니, 농민수당에 어민수당을 슬쩍 포함시키는 형식으로는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법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업의 공익적 기능’이 충분히 존재한다는 점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하반기 정기국회에서 두 가지 법안이 발의돼 논의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농민수당’의 경우 올해 국회에서 입법되지 않는다 해도, 내년 총선의 주요 정책 공약 중 하나로 떠오를 것은 자명해 보인다.  

이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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