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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항쟁 토론회] 공정 국가인가, 복지 국가인가?

6·10+26, 드디어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6·10 항쟁 토론회] 공정 국가인가, 복지 국가인가?

정승일 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6-10 오전 7:18:39

 

 

(사)'6월 민주 항쟁 계승 사업회'는 6·10 항쟁 26주년을 맞아 '민주화 운동의 성찰과 복지 국가'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합니다. 민주화 운동의 반성과 과제(1부), 복지 국가와 경제 민주주의(2부)로 나뉘어 열리는 이날 토론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프레시안>이 후원하는 행사입니다. 주최 측의 동의를 얻어 이날 토론회 발제문 두 편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1. 이제 가치관과 세계관을 논하자

궁극적 가치는 무엇인가?

대통령 선거의 패배와 야당에 대한 전반적 실망, 그리고 제반 진보 정당 및 민주노총의 몰락으로 나타나듯이 한국의 진보 세력 내지 민주화 세력은 현재 총체적인 위기에 처해 있다. 그리고 이 위기는 매우 근본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향했던 정신적 지향성과 가치관, 세계관, 즉 한마디로 신념 체계 그 자체가 붕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가치란 가장 소중하고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고 동시에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민주화 세력이 지난 수십 년간 가장 소중하게 여겨온 가치는 독재에 대한 저항 즉 민주주의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과연 민주주의가 그 자체 가장 소중한 가치이며 가장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난 2007년 말의 대통령 선거에 즈음하여 가장 많이 이야기된 화두가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라는 말이었다. 이것처럼 두고두고 우리가 곰씹어야할 말이 없다. 이 말은 민주주의보다 더 중요하고 높은 가치이자 더 궁극적인 목표는 국민들의 밥 즉 생계 문제를 해결하여 주는 것이며 민주주의는 그러한 가치·목표에 복무하는 수단 또는 도구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를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민주주의와 함께 금과옥조처럼 소중히 여겨져 온 또 다른 가치인 자주와 통일 역시 비슷하다. 민족 자주, 민족 통일은 식민지 경험과 남북 분단의 역사 속에서 고통받아온 우리 민족 전체에게 매우 소중한 과제였고 따라서 자주와 통일은 매우 소중한 가치, 목표이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의문은 곧바로 "자주가 밥 먹여주냐?", "통일이 밥 먹여주냐?"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실제 남북 대화, 남북 통일에 열심이었던 김대중 정부 치하에서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서민들의 생계는 악화되었으며 청년들의 '3포(취업, 결혼, 출산 포기) 시대'가 본격화되었다. 민족 자주 차원에서 전시 작전권 환수가 결정된 노무현 정부 치하에서도 서민들의 밥 먹고 사는 문제는 더 힘들어졌다. 그런데도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을 놓고 당시 진보적 식자들은 "밥 먹고 사니즘"이 민주주의와 자주, 통일, 인권 등보다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고 비아냥거렸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민주주의와 자주, 통일 등의 주체는 개인이 아닌 집단이다. 즉 민족 또는 민주 공화국으로 결집된 집단으로서의 국민이다. 이에 반해 "밥 먹고 살기 힘들어" 허우적거리는 이들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생활인들, 즉 서민들 개인과 그 가족들이다. 그런데 집단으로서의 민족 또는 국민 전체에서 개인과 개성, 인격 그리고 밥 먹고 사는 생활 문제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확연하게 나타나는 사실이 있다. 즉 개인들 간의 생활 수준 격차가 매우 심하고 더구나 민주화 이후 격차가 더 크게 벌어졌다는 점이다.

더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과거의 386 또는 7080 세대에 비하여 요즘의 20대와 30대는 매우 개인주의적이다. 그들은 집단보다 개성을 중시하며, 정치보다는 문화에, 민주주의보다는 스펙(specification) 쌓기에 더욱 관심이 많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의 인생 가치관에는 민주주의와 자주, 통일 등은 별로 끼어들 여지가 없으며, 그들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각자 자신의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 라는 개인적 관심사들로 가득 차있다.

민주주의와 자주, 평등, 통일 같은 집단주의적 가치를 소중히 여겨온 전통적인 민주화 세력 또는 진보 세력의 관점에서 보면 이와 같은 요즘 청년 세대의 개인 중시, 개성 중시는 이기주의로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과연 개인의 개성과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와 입장을 이기주의로, 개인주의로 비난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민족과 민주 공화국은 그 자체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만약 민족과 민주 공화국의 이름으로 대다수 개인의 자유와 개성, 행복이 유린된다면, 그런 민족, 그런 민주 공화국은 거부되어야 한다. 만약 민족 자주와 통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대다수 개인들이 가난과 궁핍으로 떨어진다면 그런 민족 자주, 그런 민주주의는 거부되어 마땅하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자유야말로 민주주의와 자주, 통일보다 더 소중한 가치, 더 궁극적인 가치라고 생각한다.

개인과 개성 그리고 자유주의

그런데 자유야말로 가장 소중하고 궁극적인 가치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세계관이 자유주의이다.

자유주의는 1987년 6·10 항쟁과 함께 민주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1990년대 들어 우리나라의 보수, 진보 양 진영 모두의 사고방식 속에 맹렬하게 침투하였다. 더구나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의 세계관은 20~30대 청년들의 생활방식, 사고방식에도 잘 부합한 까닭에,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간 우리 사회의 담론을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과 개성 그리고 자유주의 화두의 등장과 담론 지배에 대한 한국의 민주화 세력의 대응은 참으로 무기력하고 소극적이었다. 어느새 개혁적 자유주의 또는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단어가 한국의 진보적 담론과 사상적 토론 지형을 지배하게 되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그 정당들은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을 개혁적 자유주의 또는 진보적 자유주의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들은 민주주의와 자주, 통일 등의 가치를 개혁적 또는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보다 상위의 가치 체계 내에 포함되는 일종의 하위 가치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듯 자유주의적 세계관과 그 담론이 민주 또는 진보 세력 내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그것에 대립해온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등 여타의 세계관들은 뒤로 밀려나게 된다. 게다가 1990년대 중후반 이래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자유주의의 현대판 버전인 신자유주의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자유주의는 부동의 우월적 지위를 지난 20년간 누렸다.

그렇지만 알다시피 자유주의의 세계관에는 개인과 개성은 있되 사회와 국가, 민족 등은 없다. 아니면 한참 뒷전으로 밀려난다. 극단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화신인 마거릿 대처 영국 수상이 말했듯이, "사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언까지 나온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개인의 이기성과 이기적인 행동마저 윤리적으로 권장한다. 왜냐하면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의 강력한 자동 기계 메커니즘이 자유 시장(free market)에는 탑재되어 있는 까닭에, 이기적 행동의 총화가 자동적으로 이타적 사회성으로 승화된다고 자유주의자들은 믿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이자 시장주의다. 자유주의의 힘이 셀수록 이기주의와 시장주의의 역할은 최대화되고, 국가와 사회, 민족 공동체와 민주 공화국의 역할은 최소화된다. 그것은 보수적 자유주의(신자유주의)이건, 아니면 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이건 마찬가지이다.

사회와 민족, 국가란 없다-자본과 시장이 있을 뿐

그런데 과연 인간의 자유가, 즉 개개인의 개성과 인격의 발전이, 과연 사회 및 국가와 무관하게, 따라서 민주주의와 민족(자주, 통일의 가치를 포함한)의 발전과 무관하게 진행될 수 있을까? 더구나 자유주의가 말하듯 인간의 자유, 개성의 발전이 사회 공동체와 국가(민족)와 같은 집단성의 역할을 축소해야만 가능할까? 따라서, 민주주의와 자주, 통일 같은 기존의 진보적 가치(집단성의 가치)의 역할을 축소해야만 개성과 자유, 자아 실현과 같은 새로운 가치(개인성의 가치)의 발전이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개인의 개성과 자유는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으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자유주의가 말하듯이-개인과 사회 간의 대립, 개성과 집단성의 대립이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개인과 개성의 발전을 억누르는 그런 사회성, 그런 집단성이 실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개인과 타자 간의 사회적 관계는 기본적으로 '시장'의 관계, '자본'의 관계이다. 시장(market)이 사회(society)를 대체한다. 그리고 그 시장은 그냥 시장이 아닌 자본주의적 시장이고, 따라서 자본(capital)이 사회(society)를 대체한다. 마르크스는 개인은 총체적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간파했는데, 그렇지만 동시에 그 총체적 사회적 관계의 정점에는 자본과 시장이, 즉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군림하고 있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골방에 처박힌 개인주의적 고립성을 떨치고 나와 '알바'를 뛰어야 하고, 어렵게 취직하더라도 야근과 특근을 밥 먹듯이 해야 겨우 먹고 사는 현실에 허덕이는 것이 오늘날 주변에서 보는 대다수 개인들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과 사회, 개인과 국가(민족), 개인과 집단 간의 대립을 중시하면서 사회-국가-민족-집단성보다는 개인성과 개성을, 이타성보다는 이기성을 소중하게 여긴다. 물론 보수적 자유주의(신자유주의)가 무자비한 이기성, 무자비한 시장조차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반하여 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는 '합리적 이기성'과 '합리적 (자유) 시장'을 중시하는 차이는 있다. 그리고 그 합리적 시장의 내용과 실체는 '공정한 시장 질서'라는 개념으로 표현된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추상적인 일반론적 사회-국가-민족-집단성이란 픽션일 뿐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체적으로는 자본주의적 국가-민족-집단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 자본주의에서, 국가(민주주의를 포함한)와 민족(민족 자주와 민족 통일을 포함한) 그리고 그 집단성 역시 그 내용과 실체에 있어 자본주의에 의해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은 아예 민족-국가-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뉴라이트 지식인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찬양하면서 민족과 민족 경제, 민족 국가라는 관점 자체를 폐기해 버렸다. 그런데 진보적 자유주의 (그리고 그것과 잘 부합하는 사상인 포스트모던 아나키즘 역시 비슷한데) 역시 민족과 국가 따라서 민족 국가와 민족 경제라는 개념을 폐기한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자주/통일 등을 소중한 가치로 여겨온 기존의 진보적 전통과는 획을 긋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자유주의자들은 정작 자신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대다수 개개인의 개성 있고 자유로운 삶을 매일 매순간 억누르는 현실의 집단적(사회 시스템적) 실체인 자본과 시장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는다. 물론 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는 재벌과 대자본을 비판한다. 그렇지만 마치 재벌이 해체 또는 축소되고 중소기업-영세 자영업이 융성하여 공정한 시장 질서가 확립되는 공정 시장 자본주의에서는 인간의 개성과 자유가 꽃피울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공정 시장 자본주의가 경제 민주화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자유와 개성을 억누르는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경제적 실체이며, 그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우리는-자본주의가 아닌–자유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그 경제 시스템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해온,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주의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달리 말해서 이것은, 5000만 국민들 중 대다수 개인들의 삶을 압도적 힘으로 짓누르면서 그들의 실질적 자유와 개성을 억누르는 현실적 실체로서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대해,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적 표현으로서의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와 자주/통일 등의 중요성을(따라서 그 가치를) 말하는 것은 대다수 개인의 힘든 생계의 관점에 볼 때 공허하게 들린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고액 등록금에 허덕이면서 최저 임금 알바 찾기와 스펙 쌓기, 취업 준비, 월세 자취방/하숙집 구하기에 끙끙 매고 있는 대학생들에게, 등록금 인하와 최저 임금 인상, 공립 기숙사 대량 신축과 같은 복지 국가 전략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채, 5·18 정신과 6·10 항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하다. 그런 민주 항쟁 기념식은 그들만의 잔치일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민주화+진보 세력 전체가 처한 정신적 위기의 본질은 민주주의와 자주/통일, 평등 등의 기존 가치들을 껍데기로 만들어 형해화(形骸化)시키며 국민 개개인들의 생활과 생계를 힘들게 하는 압도적인 현실적 파워로서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해온 다양한 형태의 자유주의 사상에 대해 침묵하거나 비판하지 않은 데 있다.

개성과 자유–자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

앞서 말했듯이, 나는 민주주의와 자주/통일보다 더욱 소중하고 궁극적인 가치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 인간의 자유, 개성과 자아 실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진보 세력의 가치관에서 그 동안 완전히 배제되어온 '자유'를 이제는 진보의 궁극적 가치로, 가장 핵심적인 가치로 내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이 땅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생활인의 관점과 같다. 이제는 민주주의와 자주/통일을 넘어, 대다수 국민들을 (단지 밥 먹고 사는 수준을 넘어) 잘먹고 잘사는 그런 세상, 자신의 개성과 잠재력을 마음껏 발전시킬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free society)를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가치, 목적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주의가 내건 시장의 자유 즉 자유 시장(free market)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 즉 자유 사회(free society)가 우리의 슬로건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개인의 자유와 개성, 인격이 만발하는 잘먹고 잘사는 세상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하에서는 불가능하다. 자유주의가 말하는 자유는 정치적·법률적, 형식적·절차적일 뿐이다. 생활인들이 직면하는 생활의 관점에서 볼 때 자유주의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유란 사유 재산권 및 시장 영업 활동의 자유를 의미하며, 그 평등이란 오직 재산이 있는 자들의 사유 재산권 행사와 경쟁적 시장 참여 기회의 평등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활 현실에서 자유와 평등은 서로 대립되어 나타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낳는 부와 소득의 불평등은 자유롭고 부유한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를 나누며, 그 결과 '평등 없는 자유'를 낳기 때문이다. 대다수 생활인들이 직면하는 자본주의 시장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평등 없는 자유, 대다수 개인에 있어 실질적 부자유와 실질적 불평등을 해결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형식적, 절차적 자유·평등을 넘어 '실질적 자유'와 '실질적 평등'을 구현하여야 한다.

실질적 자유란 개개의 생활인들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자신의 인간적 잠재력을 그 어떤 경제 사회적 이유로 제한받지 않고 구현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또한 실질적 평등이란 형식적인 기회 균등을 넘어 삶을 향유함에 있어 실질적인 경제 사회적 평등을 뜻한다. 예컨대 모든 개개인이 적절한 주택과 함께 좋은 교육 기회를 가지며, 병에 걸렸을 때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고, 또한 노후에도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하는 생활 유지가 불가능하다면, 그리고 안전한 노동 환경에서 적절한 시간 동안 노동할 수 있는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 때의 자유란 공허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러한 실질적 자유를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개개인의 삶의 자유, 실질적 자유의 구현을 가로막는다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경제적 대안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 어떤 가치관, 어떤 세계관의 경제 민주화인가?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다

최장집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는 지난 5월 10일 한국사회학회에서 발표한 '경제 민주화에 대한 소고-그동안 논의되지 않는 것들을 중심으로'라는 글에서 "그동안 한국 정치에서 정당 간 경쟁과 갈등은 민주-반민주 같은 대립 구도에서 나타나듯이 관념적이고 도덕주의적인 이념 내지 가치를 중심으로 한 진영 간 대립의 형태를 띠었다"면서 "그렇지만 서구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좌우 구분의 일반적 기준이 되는 것은 사회 경제 문제에 대한 차이와 그로 인한 갈등, 그것을 표현하는 이념이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경제 민주화가 총선·대선의 중심이슈로 떠올랐다는 것은 한국 정치에서 큰 의미를 갖는 전환적 사건이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2013년 5월 9일자)

그는 또한 "민주주의의 본질적 관심사는 얼마나 많은 경제적·사회적 평등을 창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 민주화는 민주주의가 실제로 무엇을 성취했는가를 보여주는 민주주의의 거울이자 정치 민주화의 핵심 요소다"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생산 체제의 기반으로서 경제 체제를 끊임없이 민주화하려는 노력을 병행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도 지적했다.

그의 이러한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제 문제는 민주냐 반민주냐가 아니라, 자본주의냐 경제 민주주의냐이다. 그런데 모두가 다 알 듯이, 경제 민주주의가 도대체 무엇이냐 라고 묻게 되면, 백인백색의 답변이 나오게 된다. 따라서 최장집 교수는 연이어 말하기를,

"지금 경제 민주화의 정의는 광범위하게 열려 있다. 여당과 야당, 보수파와 진보파 누구도 아직 분명히 정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선거가 거듭되고, 정당 간 경쟁이 거세지고, 사회로부터 경제 개혁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게 될 때 '무엇이 경제 민주화냐' 하는 것에 대해 정치인들이 구체적으로 정의해야 한다는 압력이 높아지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장집 교수는 "경제 민주화 이슈가 판도라의 상자처럼 현대의 중요한 이념과 이론적, 철학적 이슈들을 불러내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경제적, 사회적 평등의 창출과 관련하여 판도라의 상장에서 튀어나올 현대의 중요한 이념과 그리고 이론적, 철학적 이슈들은 과연 무엇일까? 먼저 떠오르는 강력한 이념은 공산주의·사회주의일 것이다. 그런데 최장집 교수는 같은 글에서 공산주의·사회주의보다는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 정당 정치인들이 고민하게 될 문제의 초점은 '경제 민주화가 사회민주주의를 포괄하느냐 아니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경제 민주화가 유럽으로 대표되는 사회민주주의적 복지 국가 체제에 접맥하고 그것을 지향하느냐, 아니면 자유주의적 시장 경제를 유지하면서 경제 민주화를 도모하느냐 하는 질문이다."

1980년대 말 소련 및 동구권의 몰락과 함께 공산주의·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적 대안 체제로는 경쟁력이 없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그렇지만 영미 자본주의(Anglo-American capitalism)로 대표되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free market capitalism) 역시 2008년 말 발발한 세계 금융 위기와 극심한 빈부 격차로 그것의 윤리적 정당성과 경제적 효율성, 역사적 지속 가능성을 의심받고 있다. 그렇다면 남는 유일한 대안적 경제 이념은 공산주의·사회주의와 자유 시장 자본주의(신자유주의)라는 양 극단의 중간에 위치한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이다.

그런데 다양한 중간적 이념 스펙트럼의 맨 왼쪽에 사회민주주의가 있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안에서도 다시, 맨 오른쪽에는 신자유주의를 적극 수용하는 제3의 길 사회민주주의(영국의 앤서니 기든스와 토니 블레어, 독일의 슈뢰더로 대표되는)가 있고, 그 중간에 스웨덴과 핀란드의 사회민주당과 그리고 독일 사회민주당의 당내 좌파 등이 있다. 그리고 맨 왼쪽에는 독일 좌파당(Die Linke), 스웨덴 좌파당 등으로 표현되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영미의 사회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가 있고, 이것이 한국에서는 진보적 자유주의라 불린다. 또 '반성한 자유주의 또는 건전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는 독일의 질서 자유주의(ordo-liberalism) 또는 미국의 리버럴(liberal) 주류가 있고 이것은 한국에서 개혁적 자유주의로 불린다.

독일의 현재 집권당인 기독교민주당의 정치경제 사상이 질서 자유주의이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사회적 시장 경제론(social market economy)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사회적 시장(social market)이란, 자유로운 시장(free market) 즉 자유 시장에 반대되는 말이다. 즉 질서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와는 다르며, 말하자면 '인간의 얼굴을 한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질서 자유주의 역시 신자유주의(그리고 구자유주의)와 공통적으로 사유 재산제와 시장 원리 그리고 개인 책임 및 자조(self-help) 등의 가치/원칙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단, 질서 자유주의는–신자유주의와 달리–독과점을 규제하여 완전 경쟁·공정 경쟁 시장 질서를 창출하고자 하고, 동시에 일정 정도의 사회 복지와 함께 노동 시장을 규제하여 노자 관계의 대립과 긴장을 일정하게 완화시키고자 한다.

독일 기독교민주당의 이러한 입장은 (이것은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기독교민주당들 역시 비슷한데), 미국 민주당의 리버럴(liberal)과 매우 흡사하다. 따라서 미국의 리버럴 민주당을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동격으로 놓는 것은 큰 착각이다. 물론 유럽의 사회민주당 중에서도 제3의 길을 채택한 경우 미국 리버럴과 매우 흡사해졌는데, 동시에, 사회민주당과 기독교민주당간의 정책 지향성의 차이가 거의 사라져 버리면서 양측 모두에서 전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지향성이 강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개혁적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민주당 주류, 안철수 신당 주류의 중도주의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에 반해 민주당 내 진보파 그리고 안철수 신당 흐름 내의 진보파들(최장집 교수처럼 노동 중심 진보 정당을 말하는)은 대체로 진보적 자유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그리고 요즘 들어 박근혜 정부뿐만 아니라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개혁적 의원들이 "독일 경제, 독일 기업에서 배우자"는 국회의원 공부를 하고 있다는데, 그 지향성은 대체로 독일의 사회적 시장 경제론(질서 자유주의론)으로 모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의 남경필, 원희룡, 이헌재 의원 등이 독일 경제 모델을 공부하고 있으며, 민주당의 전순옥 의원 등도 마찬가지이다.

또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김두관 전 경상남도지사처럼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당내 경선에 나섰던 이들이 현재 독일에 체류하면서 독일의 경제 모델과 사회적 시장 경제론, 복지 국가를 현장 학습하고 있다고 한다. 다른 한편, 여권 내 경제 민주화론자로서 존경받는 보수 원로인 김종인 박사가 말하는 경제 민주화론 역시 그가 공부한 독일의 질서 자유주의 또는 사회적 시장 경제론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렇듯, 공산주의·사회주의와 자유 시장 자본주의(신자유주의)라는 양극단을 배제한다 하더라도, 경제 민주화론에는 사회민주주의, 진보적 자유주의, 질서 자유주의(건전 자유주의)에 이르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그리고 최장집 교수가 지적했듯이, 경제 민주화 담론이 작년 총선과 대선에서 전면에 떠오르면서 이제 판도라의 상자로부터 다양한 현대 이념들이 유령처럼 뛰쳐나오고 있다.

시장 주도형 경제 민주화냐 국가 주도형 경제 민주화냐

그런데 왜 민주 세력의 기존 가치관이 그렇게 (신)자유주의에 푹 물들어 있었을까? 1990년대 초반 이래 민주 세력 내에서는 정부 주도형 경제보다는 시장 주도형 경제가 바람직하며 특히 투명한 시장, 공정한 시장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담론이 지배해 왔다. '시장 경제에 대한 정부개입은 관치 경제고 박정희식 경제의 유산이다'는 생각에서 박정희식 개발 독재를 해체하자고 했고, 그러려면 '더 많은 시장 논리', '더 강한 시장 규율'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 진보 경제학자들의 시각이었다.

이런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 관점에서, 한국 경제를 시장 주도 경제로, 특히 선진국 중 가장 시장 논리의 힘이 강한 미국식 자본주의로 바꾸어 놓겠다고 한 것이 김대중·노무현 정부였고 민주당이었다. 그런데 2008년 말에 시작된 미국발 세계 금융 위기는 과거 김대중·노무현 민주 정부가 추구했던 '글로벌 스탠더드' 즉 미국식 자본주의를 향한 이른바 '시장 개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더구나 똑같이 시장 논리, 시장 규율 강화의 시각을 가진 것이 보수적 자유주의, 즉 시장 만능주의였고 이명박 정부는 그 생각을 극한까지 추구했다. 민주 세력은 그런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 속에서 시장 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을 계속했고, 그 과정에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민주 세력 내에서 처음으로 부활하게 되었다. 물론 이번에는 박정희 식이 아닌 다른 방식, 다른 형태의 국가 개입주의였다.

몇 년 전부터 민주 세력 내부에서는 두 가지 형태의 다른 국가 개입론이 등장했다. 하나는 복지 국가론이고, 또 하나는 공정 국가론이다. 복지 국가론이란 나처럼 스웨덴식 복지 국가를 만들자는 입장이며 특히 보편적 복지와 노동 민주주의(이것이 경제 민주화의 본질이라고)를 강조한다.

그에 반해 공정 국가론이란 반칙·특권 세력인 재벌을 (그리고 모피아를) 정부가 규제해서 '반칙과 특권이 없는 공정한 시장 질서'를 만드는 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입장에 선 사람들은 복지 국가보다 공정한 시장 질서(이것이 경제 민주화의 본질이라고)를 앞에 내세운다.

작년 말의 선거 운동 기간 내내 문재인 후보는 박근혜 후보에 비하여 경제 민주화-재벌 개혁을 더 강하게 이야기했다. 순환 출자 규제와 지주 회사 규제, 금융-산업 분리 같은 재벌 규제를 놓고 박근혜 후보와 차별화하겠다는 문재인 후보와 진보 진영의 전략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물론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는 경제 민주화와 복지 국가 모두 선거판에서 핵심 쟁점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문재인-안철수 후보만이 아니라 박근혜 후보까지 복지 국가와 경제 민주화를 하겠다고 하는 통에, 미래 비전이나 정책을 가지고는 후보 간 차별화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자 문재인 후보는 정책 대결, 미래 대결이 아닌 인물 대결, 과거 논쟁(박정희-장준하 논쟁)으로 선거판을 끌고 갔는데, 결국 그것이 문재인 후보가 패배한 원인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 문재인 캠프의 근원적 한계였다. 물론 유세의 마지막 단계, 특히 2차 및 3차 TV토론에서 문재인 후보는 국민건강보험과 같은 복지 정책에서 박근혜 후보를 압도했다. 그렇지만 선거일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제시된 차별화된 복지 정책으로는 국민들에게 어필할 시간이 없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장기적 국가 비전의 결여이다. 당시 문재인 후보도 그렇고 현재의 민주당도 그렇고, 그들이 과연 어떤 유형, 어떤 지향성의 복지 국가를 앞으로 10년 뒤, 20년 뒤에 만들어내고자 하는지 장기적인 국가 비전이 분명치 않다. 당시 문재인 후보 쪽은 박근혜 후보가 제시하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즉 적어도 독일 기독교민주당이 만들어낸 독일 수준의 복지 국가를 20년 뒤 한국의 모습으로 제시하면서 차별화했어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향후 5년 뒤만이 아니라 10년 뒤, 20년 뒤에 어떤 나라를 만들겠다는 건지, 어떻게 대다수 서민들이 잘 먹고 잘 사는 나라, 대다수의 개개인들의 생활 속에서 행복과 자유를 느낄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건지에 관한 장기적 국가 비전의 결여는 민주당보다 왼쪽에 있는 여러 진보 정당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정당들 역시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재벌 개혁(재벌 해체)-경제 민주화를 복지 국가에 비해 더 시급하고 우선적인 과제라고 제시하였다.

그런데 과연 생활하는 서민들의 관점에서 볼 때, 순환 출자 규제, 지주 회사 규제, 금융-산업 분리와 같은 재벌 개혁(재벌 해체)-경제 민주화가 기초연금 20만 원, 반값 등록금, 4대 중증 무료 진료와 같은 복지 국가 이슈에 비해 그렇게 시급하고 우선적인 것으로 다가왔을까?

게다가 민주당과 진보 정당들이 제시했던 (지금도 제시하고 있는) 재벌 개혁의 방법과 지향성은 1999년대 말의 김대중 정부가 제시한 재벌 개혁과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과연 서민들이 체험한 과거 민주 정부 시절의 개인적 삶이 행복하고 자유로웠던가? 많은 이들에게 그 시기는 절망의 시절이었다.

많은 이들이 민주 정부가 처음 시행한 이른바 '시장 개혁(구조 개혁)'과 함께 새로 등장한 명예 퇴직, 희망 퇴직, 정리 해고의 희생자들이었다. 회사가 통째로 다른 회사에 매각되고 임금이 삭감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렇게 밀려난 이들의 상당수가 퇴직금으로 통닭집, 피자집, 음식점을 차렸고, 그 중 다수가 파산하여 빈곤층이 되었다. 지금 은행 대출신용카드 대출을 못 막아 전전긍긍하는 신용 불량자 중에도 그런 이들이 많다.

그런데도 문재인 후보와 민주당은–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가난한 신용 불량자들을 짓누르는 부채 탕감을 대선 공약으로 제시하기를 두려워했다. 신용 불량자들의 도덕적 해이 즉 '모럴 해저드(개인의 자기 책임을 강조하는 이 개념은 시장주의-자유주의 이론의 맥락에서 나왔는데)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유에서였다.

민주당은 신용 불량자 개개인의 윤리적-도덕적 결함을 시급하고 우선적인 문제로 보았을 뿐, 왜 그들이 구조적으로 신용 불량자로 전락했는지, 그 구조(시장 주도형 경제)를 만든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책임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 이에 반해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은 가난한 신용 불량자 부채 탕감을 대선 공약으로 제시했고 지금 그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도 민주당과 여러 진보 정당들에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신용 불량자 부채 탕감 정책이 없다.

우리 사회가 1990년대 말부터 상시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대규모 명예 퇴직, 희망 퇴직, 정리 해고 등이 재벌 개혁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문재인과 안철수, 이정희와 심상정 후보 등이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복지 공약 및 노동 공약에 비해서도) 가장 우선적이고 시급한 과제라고 국민들에게 제시한 경제 민주화-재벌 개혁, 또 재벌 해체의 슬로건이 그들을 감동시켰을까?

정의란 무엇인가?

앞에서 나는 민주주의와 자주/통일 등이 삶에 찌든 대다수 생활인들,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선뜻 다가오지 않는 가치라고 말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새로이 떠오른 화두가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그리고 정의는 매우 근본적인 가치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오늘날 자유와 함께 (평등 대신에) 정의 그리고 연대를 궁극적 가치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말 그대로, 정의란 무엇인가? 문재인 후보와 민주당은 '복지보다 더 우선적이며 소중한 가치는 특권과 특혜의 철폐이며, 따라서 정의와 공정·공평의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정부 하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한명숙 씨 역시 마찬가지다. 2010년 6월 지방 선거에서 한명숙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는 시종일관 무상 급식 이슈의 정치적 중요성을 간과하였다.

그런데 2010년 6월의 지방 선거에서 서울을 제외한 지방에서는 전국적으로 무상 급식 이슈(복지 이슈)가 휩쓸었고, 그 덕택에 야권 후보들이 약진하였다. 그에 반해 서울에서 별다른 선거 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한 한명숙 후보는 오세훈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그리고 한명숙은 2012년 4월의 총선을 진두지휘할 때 반복적으로 '복지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특권과 특혜의 철폐이며, 정의와 공정·공평의 회복'이라고 발언하였다.

문재인 후보와 민주당은 (안철수 진영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지난 선거 기간 내내 말로는 복지를 입에 올렸지만, 내심 복지 국가는 그 자체 정의와 공정 구현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정의와 공정·공평의 내용과 실체는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공산주의 등 서로 다른 세계관과 정치경제 사상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실질적 평등(실질적 공평·공정)보다는 형식적, 절차적 평등(절차상의 공정·공평)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자유주의자들은 (여기에 문재인 후보와 민주당, 안철수도 포함되는데) 흔히 '복지보다 더 소중한 것은 공정·공평'이며, '복지 국가보다 더 소중하며 우선적인 것은 특권과 특혜의 철폐'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은 (안철수 신당도 마찬가지) 재벌로 상징되는 특권 세력 해체를 늘 가장 우선시되는 과제로 제시한다.

그렇지만 실질적 자유와 실질적 민주주의, 즉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를 가장 중시하는 사회민주주의의 관점에서는 보편적 복지와 노동 민주주의야말로 정의와 공정·공평이라는 가치/목표를 달성하는 가장 '실질적인' 방법이며, 더구나 재벌의 특권과 특혜를 철폐(완전 경쟁 시장 창출을 위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특권과 특혜를 실질적으로 철폐하여 사회 평등을 이룩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바로 사회민주주의 복지 국가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오직 민주당과 자유주의만이 정의(正義)와 공정(公定)을 대변한다고 하는 것은 억지다. 정말로 중요한 화두는 그 정의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아마도 내 주변에서 흔히 보는 보통의 서민들, 생활하는 개개인들의 직관적 느낌 역시 이와 비슷할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어떻게 복지 국가의 도움 없이도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건가? 그들이 제시하는 최고의 정의·공정성 회복 방안은 '공정한 시장 질서' 원칙의 구현이다. 그리고 공정한 시장 질서 창출을 위해 최우선시 된 과제가 바로 각종 재벌 규제를 통해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는 일이다. 공정한 시장 질서를 경제 민주화의 실체로 이해한다. 그런데 과연 '공정한 시장 질서'가 정의가 보장되는 경제 체제를 창출할 수 있을까?

'공정한 시장 질서'란 시장 경쟁 절차의 공정성(즉 기회의 평등)을 의미할 뿐이다. 즉 공정한 시장 질서 그 자체는 소득 분배의 공정성(즉 결과의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시장이 더 공정해질수록, 즉 더 완전 경쟁 시장 모델에 가까울수록, 성과주의의 확산에 따른 불평등한 소득 분배와 승자와 패자의 빈부 격차 심화는 불가피하다. 공정한 시장 질서는 필연적으로 불평등한 사회, 불공정한 사회를 낳는다.

아무리 공정한 '경쟁적 시장 질서'가 관철되더라도 그 경제는 자본주의적 착취도, 노자 대립 심화도 막을 수 없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1998년 이래 경제 민주화-재벌 개혁이 진행되면서 동시에 도입·확산된 것이 기업에서의 미국식 성과주의 및 개인주의 문화였다. 그것은 기업들에서 살벌한 비인간적 경쟁을 낳았다.

미국식 성과주의와 능력주의는 모두 사람들이 이기적이며 경쟁과 금전적 보수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주된 동인이 된다는 전제 아래 경제적 생산성을 최대한 높이는데 주안점을 주는 원칙이다. 성과주의와 능력주의에 가장 부합하는 경제 이론이 바로 미국에서 발전한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의 한계 생산성 원리이다.

'공정한 시장 질서'의 이름으로 시행된 1998년 이래의 경제 민주화 또는 시장 주도형 경제로의 개혁(시장 개혁) 과정에서 한국 경제에서 임금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투입 노동 대비 낮은 한계 생산성을 보이는 중하층 노동자들에게는 과거보다 낮은 임금을, 높은 한계 생산성을 보이는 고급 관리자와 경영자들, 특히 금융권 직원들과 펀드 매니저들에게는 높은 봉급을 주는 것이 정당하고 정의로운 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저소득 노동자(워킹 푸어)와 고소득 임직원 간의 소득 격차는 과거 박정희 체제에 비해 크게 벌어졌다.

공정한 시장 질서와 자본주의 시장 질서

반칙과 특권이 없으며 누구나가 평등·공평하게 공동체의 규칙을 지키는 공정한 경제, 정의로운 사회를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반칙과 특권의 내용과 실체가 뭐냐는 것이다. 그게 명확해야만 공정·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의 실체와 내용이 분명해진다.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장 질서를 부인하지 않는다. 존 로크나 애덤 스미스, 볼테르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경제의 기축을 이루는 사유 재산권과 시장 경제를 자연스런 상태(자연법)로 보면서 긍정한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 공병호와 복거일 같은 신자유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에 반해 장자크 루소나 카를 마르크스 같은 이들은 사유 재산권의 존재 그 자체가 반칙과 특권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장 경제가 공정하고 공평하게 작동하려면 완전 경쟁이 되어야 한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수요-공급이 완전 경쟁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완전 경쟁 상태가 되어야만 공정·공평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정의와 공정·공평은 주로 경쟁적 시장 질서에 관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세상 모든 인간관계가 경쟁은 아니고, 더구나 경쟁에 시장 경쟁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경쟁보다 협력하여야 할 사안들이 많고, 더구나 경쟁이라 하더라도 수익을 위한 시장 경쟁이 아니라 시장 밖에서의 비영리 목적을 위한 선의의 경쟁도 많다.

달리 말해서, '반칙과 특권이 없는 공정·공평한 정의로운 세상'이라는 테제는 매우 올바르고 정당하지만, 그 자체만으론 내용과 실체가 없는 공허한 말이다. 그런 말은 자유주의 개혁가도 할 수 있고, 공산주의 혁명가도 할 수 있다. 또 사회민주주의 복지 국가론자도 할 수 있다. 마치 복지 국가는 정의 및 공평·공정과 무관한 양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자유주의의 관점을 보여준다.

공정 시장, 공정 경쟁 원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문제들 수없이 많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삶을 찌들게 하는 핵심에는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실질적으로 유린하는 냉혹한 현실인 시장 자본주의가 있다. 자유주의는 결과의 평등(소득의 평등)보다는 기회의 평등(기회 균등)을 더 강조하고 소중하게 여긴다.

그런데, 과연 모든 사람이 시장에서 공정하게 경쟁하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부모로부터 사유 재산권(부와 재산)을 물려받은 이들은 출발점부터 특권을 가지며 따라서 출발점부터 공평하지 않은 반칙 세력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그 자체 공정·공평한 체제가 아니다.

정의로운 경제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 사회처럼 빈부 격차가 심하고 자살률과 비정규직도 세계 최고, 행복도 세계 최하위의 나라를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라고 볼 수는 없다. 또 재벌이 빵집과 순대 사업에 진출하여 영세 자영업자를 몰락시키는 재벌 공화국을 정의로운 경제로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에는 여러 종류의 상벌 체계가 존재한다. 법과 관습은 대표적인 상벌 체계인데, 법이 철저하게 적용된다는 것은 곧 법으로 표현된 '정의'가 관철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벌 범죄의 경우, 재벌 총수들 역시 '법 앞에서의 평등' 원칙에 따라 다른 범죄자들과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처벌하여 구속시키는 것이 당연히 정의로운 나라이다.

그런데 자유 시장도 상벌 체계의 일종이다. 정상적인 자유 시장에서는 좋은 상품을 값싸게 생산하는 기업이 돈을 벌게 되는 반면, 저질 상품을 비싸게 생산하는 기업은 망한다. 시장에서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은 자유 시장이 상을 내린다는 뜻이고, 망한다는 것은 자유 시장이 처벌한다는 뜻이다.

자유 시장 즉 완전 경쟁 시장은 명백한 책임 추궁을 바탕으로 하는 '공정한 보상·처벌 시스템'이다.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자유 시장 그 자체가 훌륭한 상벌 체제라고 말하는 복거일과 공병호, 하이에크와 프리드먼과 같은 시장 자유주의자들은 자유 시장 자본주의가 매우 공정하고 정의롭다고 본다.

그런데 스스로를 '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자'라고 자임하는 공정 시장론자들은 공정한 (즉 완전한) 경쟁적 시장을 회복하는 것이 공정과 정의를 회복하는 핵심적인 방법이며, 따라서 공정한 시장 질서 구축이 복지 국가보다 논리적, 시간적으로 우선시 되는 과제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경쟁적 시장 질서의 회복을 위해서는 재벌 그룹처럼 기업 간 경쟁을 왜곡하는 특권·특혜 세력을 약화 또는 해체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며 가장 중요하다.

물론 공정한 시장 질서를 어디까지로 볼 것이냐를 놓고도 그들 안에서 견해가 엇갈린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 같은 인사들은 공정한 완전 경쟁 시장 창출을 위해서라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필요하며 더구나 (정규직) 노동 운동의 약화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입장은 송영길, 안희정 같은 민주당 386 정치인들 사이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다. 문재인 대선 캠프의 핵심을 이루던 386 참모들 역시 동일한 견해를 수없이 표명하였다. 게다가 이런 관점은 노무현 정부 시기의 정책 노선으로 일관되게 관찰되었다.

이 경우, 자유 시장론과 공정 시장론이 갈라지는 유일한 분기점은 독점과 경제력 집중 즉 재벌에 대한 태도에서 뿐이다. 즉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신자유주의자들)이 독점과 경제력 집중(즉 재벌 그룹의 계열사 확대)이 자유 시장 경쟁의 자연스런 결과이므로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공정 시장 우선론자들은 재벌 그룹을 자유로운 완전 경쟁 시장의 작동을 저해하는 '왜곡 요인'으로 보면서 그것을 제거 또는 축소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재벌 그룹 축소 또는 해체를 통해서만 '합리적인 완전 경쟁 시장' 즉 '공정한 시장'을 만들 수 있고, 그래야만 정의와 공정·공평이 넘치는 공정 사회 또는 공정 국가가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정한 시장 질서 구현 즉 재벌 개혁과 (그리고 그것과 긴밀하게 결합된) 대·중소기업 동반 성장이 복지 국가보다 더 우선적이고 더 중요한 과제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주요 인물로는 정운찬(전 동반성장위원장)과 그리고 김광수(김광수경제연구소장), 그리고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등을 들 수 있다. 장하성 교수 역시 마찬가지로 공정한 시장 질서면 충분하다고 말하는데, 그는 안철수 대선 캠프의 정책총괄이었고 현재 안철수 의원 중심의 싱크탱크인 '정책네트워크 내일'의 소장이다. 그리고 '정책네트워크 내일'의 이사장이 바로 최장집 교수이다. 최장집 교수는 이미-안철수 의원 및 장하성 교수와 함께–자신의 이념인 (진보적) 자유주의를 축으로 하는 정당의 건설에 착수했다.

그에 반해 이병천 강원대학교 교수와 유종일, 김상조, 정태인 같은 이들은 복지 국가와 '동시에' (즉 병렬적으로) 공정한 시장 질서(이것을 경제 민주화라고 그들은 부르는데)가 이룩되어야 한다고 요즘 말한다. 하지만 이들 인사 대부분이 1년 전까지만 해도 복지 국가에 비해 논리적, 시간적으로 더욱 우선적이고 중요한 과제는 경제 민주화(공정한 시장 질서)라고 말했었다. 단지 작년 중반 이후 나 같은 복지 국가론자들과의 논쟁 속에서 입장을 일부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들은 여전히, 장기적으로는 복지 국가와 공정한 시장 질서가 동시에 구축되어야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공정한 시장 질서 구축이 더욱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을 그들은 "선제적 복지로서의 재벌 개혁-경제 민주화"라고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2차적 소득 분배 즉 복지 국가적인 '국가 개입주의' 정책(세금 징수와 사회 복지 재정 지출을 통한 소득의 재분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1차적 소득 분배 즉 '합리적 시장' 경제 속에서의 원천적 소득 분배이며, 이를 위해서는 대기업의 중소기업 하청 단가 삭감과 대리점 수탈(남양유업 사태에서 드러난)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공정한 시장 질서 구축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실은 최장집 교수 역시 이와 인식을 함께 한다. 그는 앞서의 발표문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제 운영과 재벌 중심의 성장이 한편으로 한국을 경제 선진국으로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던 동안, 다른 한편으로 사회 양극화와 사회 해체 효과들, 노동 배제, 최고율의 (하급) 자영업 비율, 노동 인구 절반의 비정규직과 그들에 대한 차별 같은 부정적 결과도 만들어냈다. (…) 한국 민주주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체적 개혁을 요구하고 있고, 그것이 경제 민주화의 내용이 된다"고 말하면서, "국가의 일방적인 재벌 지원에 대한 특혜를 실체적으로 제한하고, 재벌에 대한 법의 지배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공정 시장은 시장 소득 분배를 얼마나 개선하는가?

공정 시장 우선론자들은 2차 분배 즉 정부의 조세 수입 및 복지 예산 지출을 통해 달성되는 공정한 소득 재분배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1차 분배 즉 공정한 시장 질서 수립을 통해 달성되는 원천적 시장 소득 분배의 개선이라고 말한다. 정운찬과 김광수, 김대호 같은 이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으며, 정태인과 이병천, 유철규, 유종일 같은 진보적 경제학자들도 동일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민주당과 여타 진보 정당들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일견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1차 분배를 앞으로 얼마나 개선하여야 할까? 이는 총부가가치 즉 국내 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노동 소득의 몫 즉 노동 소득 분배율을 척도로 가늠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노동 소득 분배율은 1970년 41퍼센트였지만 1980년 51퍼센트, 1990년 59퍼센트로 급격히 개선되었다.

자본 측으로의 소득 분배가 상대적으로 줄고 그 대신 노동하는 서민들에게 더 많은 소득이 분배되었다. 경제 민주화는커녕 정치 민주화조차 달성되지 않은 개발 독재 시절이었는데도 노동 소득 분배율이 빠른 속도로 개선된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당시에 직업 생활을 한 오늘날의 많은 장년층, 노년층이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 주된 이유는 국내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기업 투자 비율이 40퍼센트에 육박할 정도로 기업들이 왕성하게 신규 투자를 늘린 덕택에 노동 시장에서 노동력 부족 현상이 지속되었고 그 결과 종업원 실질 임금이 30년간 계속 올라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1980년대 말부터는 노동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1990년대 초·중반에 노동 소득 분배율이 사상 최고인 63퍼센트까지 상승하였다. 노동 소득 분배율은 그렇지만 1990년대 말 민주 정부가 들어선 이래 오히려 악화된다. 그것은 1998년 직후 58퍼센트 수준으로 곤두박질 쳤으며, 그 이후 지금까지 60퍼센트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그에 반해 선진국의 노동 소득 분배율은 평균 70퍼센트 수준으로 알려져 있고 그만큼 1차 소득 분배(즉 시장 소득 분배)에서 우리보다 더 평등하다. 따라서 우리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의 1차 분배를 달성하려면 노동 소득 분배율을 60퍼센트에서 70퍼센트로 10퍼센트 올려야 하는 과제가 있다.

우리나라의 GDP를 2013년 1300조 원으로 볼 때, 2013년 기준 130조 원의 몫이 종업원 등 일하는 직장인들에게 더 분배되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장대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입장이 있다. 먼저 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를 말하는 이들은 출자 총액 제한제 강화와 금융-산업 분리 강화 등 재벌 개혁을 통해 재벌의 소유 지배 구조를 개혁하고, 동시에 원청-하청 규제와 징벌적 손해 배상제 등을 통해 대·중소기업 간 공정 거래 질서를 만들어 내면 돈 많이 버는 수출 대기업들로부터 그 아래 관련 기업들로의 트리클 다운(Trickle Down)이 원활하게 작동하여 궁극적으로 종업원 등 서민들을 위한 1차 분배가 크게 개선될 것이라고 말한다. 일리가 있으며 일정한 긍정적 효과가 예상된다.

그렇지만 부정적인 효과도 예상된다. 왜냐하면 지난 민주 정부들이 주주 자본주의를 재벌 체제의 대안으로 제시하여 그것을 정착시킨 이래 주식 투자 재테크가 만연하고 있다. 그런 조건에서의 출자 총액 제한제 강화, 금융-산업 분리 강화 등은 주식 투자자들의 힘을 더 크게 하여 오히려 총자본(재벌 가족과 주식 투자자들을 핵심으로 하는)에는 유리하고 총노동에는 불리한 방향으로 1차 분배를 악화시킬 것이다. 그것은 실제 1990년대 말 이래 10년간 민주 정부 하에서 일어난 일이다. 빈부 격차가 그 시기에 과거 독재 정권 시절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심해졌다.

둘째, 대·중소기업 간 공정 거래 정책의 긍정적 효과가 예상되지만, 그 효과를 너무 과장하면 안 된다. 재벌 기업을 포함한 대기업 전체의 연간 순이익 총액이 50~100조 원인 상황에서 제아무리 재벌 개혁과 대·중소 기업 동반 성장 정책을 잘한다 해도 이를 통해 중소기업에 트리클 다운되는 액수는 연 10~20조 원 이상 기대하기 힘들다. 더구나 중소기업, 영세 기업에 만연한 노동권 부재, 노동조합 부재의 상황을 고려할 때, 그 액수가 다 종업원과 직장인의 몫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겨우 이 액수로 130조 원의 격차를 메우겠다고?

자유주의자들은 대·중소기업 간 원청-하청 거래가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규제하면 중소·영세 기업에 유리한 방향의 시장 소득 분배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 이들 기업에서 저임금 착취가 원천적으로 사라질 것처럼 말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치명적 착각이다. 아무리 원청-하청 거래가 공정 거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저임금 착취와 장시간 노동을 민주 공화국이 금지하지 않는 한,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는 신생 하청 기업은 계속 나타날 것이며, 그런 기업이 공개 입찰 하청 계약 경쟁에서 더 유리한 위치에 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따라서 공정 시장 질서를 구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중소·영세 기업에 만연한 저임금 노동 착취를 원천 금지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최저 임금을 높이고 중소·영세 기업 노동자를 포함한 전국적 산업별 노동조합을 구축하며, 전국적 단일 단체 교섭이 법률적으로 유효하도록 민주 공화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총자본과 총노동 간의 원천적 시장 소득 분배(즉 1차 소득 분배)에서 총노동에 유리한 방향의 변화가 달성될 수 있다.

복지 국가 전략 : 생산적 투자와 노동 민주주의, 소득 재분배

2013년 기준 130조 원가량의 1차 소득 분배 개선을 달성하는 방법은 노동 운동이 활성화되고 동시에 생산적 투자가 매우 활발했던 1980년대 말 우리나라의 경험으로부터도 유추할 수 있다. 즉 노동조합과 노동권을 대폭 강화시켜 노동조합의 임금 교섭력을 높임과 동시에 기업들의 신규 투자를 왕성하게 만들어 노동 시장에서 실질 임금이 높아지도록 하는 두 가지 전략을 동시에 구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비정규직 및 파견 노동의 엄격한 규제와 함께 노동 시간의 획기적 단축과 이를 통한 수백만 명의 신규 일자리 창출, 최저 임금 인상 등의 복지 국가적 국가 개입 조치가 필수적이다. 동시에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기업별 노조가 아니라, 비정규직 및 중소기업 노동자를 모두 포함하는 산업별 노동조합을 의무화하는 입법 조치가 필요하며 산업별 단체 교섭의 효력이 모든 사업장과 모든 종업원에 적용되도록 의무화시켜야 한다. 동시에 금융 자본 및 주주 자본주의를 강하게 규제하여 대·중소기업 전체에 있어 왕성한 신규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견인해내야 한다.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권의 대폭 향상(이것을 노동 민주주의라고 부르자)과 함께 기업의 왕성한 생산적 투자(이를 위한 주주 자본주의 억압)를 견인하는 전략은 1950년대 이래 스웨덴과 핀란드 등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추진한 전략이기도 하였다. 130조 원의 시장 소득(원천 소득)을 종업원 등 서민의 몫으로 새로이 분배하는 1차 분배 개선을 위해 오늘날 우리나라에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는 이러한 전반적 기획이다.

또한 동시에 OECD 평균에 비해 10퍼센트 즉 130조 원이 부족한 2차 분배(즉 국가적 복지 재정)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과제 역시 매우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앞으로 130조 원의 세금을 더 거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겨우 오늘날 이탈리아, 스페인 수준의 사회 복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듯 2013년 기준 총 1300조 원의 GDP에서 그 20퍼센트인 도합 260조 원의 막대한 소득을 자본으로부터 노동(서민)에게 이전시키는 소득 분배 혁명을 일거에-수년 내에-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국민들 다수의 정치적 동의로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프로젝트이며, 복지 국가 5개년 계획의 수립을 통해 향후 10년, 20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OECD 평균의 비교적 평등한 소득 분배에 도달할 수 있다.

게다가 OECD 평균을 넘는 스웨덴 수준 복지 국가로 가려면 다시 그것의 두 배, 즉 2013년 기준 500조 원 가량의 1차 및 2차 소득 분배 개선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지금부터 30년에 걸친 단계적 이행이 필요하다.

어떤 가치관, 어떤 세계관의 경제 민주주의인가?

최장집 교수의 말처럼 경제 민주화 화두의 부상은 현대의 다양한 이념적 유령들을 판도라의 상자로부터 뛰쳐나오게 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역시 일종의 경제 민주화론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근간인 사유 재산권이 존재하는 한 경제를 민주주의 즉 '피플'의 지배 하에 놓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 역시 일종의 경제 민주화론이다. 자본과 사유 재산권, 시장 경제를 인정하지만 그것들을 민주 공화국으로 결집된 피플이 적절하게 통제하는 복지 국가를 만들어내지 않는 한, 민주주의가 자본·시장 권력에 의해 유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선진국의 경우 경제 민주주의보다 산업 민주주의라는 말이 많이 쓰인다. 그런데 산업 민주주의 핵심은 바로 노사 관계의 민주화 즉 노동 민주주의이다. 회사 안에서는 기업주 즉 자본에 대항하는 종업원과 노동조합의 권리를 드높이고, 동시에 회사 밖에서는 복지 국가를 만들어 없는 사람들도 부자들에게 주눅 들지 않고 잘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정지한다'는 말이 있다. 참된 경제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회사 안에서도 관철되는 것이다. 종업원의 대표자가 회사 이사회에 이사로 참여할 권리를 법적으로 확보한 독일과 스웨덴의 경우 경제 민주주의가 제대로 발전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경제 민주주의를 이렇듯 산업 민주주의, 노동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사회민주주의이다.

종업원을 대표하는 이사들이 주주(사유 재산권)를 대표하는 이사들과 동등한 숫자로,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이사회에 참여하여 사장 등 경영진을 선출할 권리를 갖는 것을 '종업원 공동 결정제'라고 부른다. 공동 결정제를 경제 민주화의 본질로 보는 세계관이 사회민주주의이다.

그에 반해 현재 우리나라에서 논의되는 경제 민주화론에는 이런 이야기가 아예 없거나, 또는 간혹 있더라도 본론이 아닌 부록에 등장할 뿐이다. 그것은 공정한 시장 질서 구축에 집중하는 자유주의적 경제 민주화이다. 예컨대 프랜차이즈 본사의 횡포에 시달리는 24시간 편의점 제과점 식당 주인의 처지와 입장에는 주목해도, 편의점 식당 제과점 등에서 근무하면서 저임금과 임금 체불, 성희롱 등에 고생하는 알바 대학생 등 종업원의 처지와 입장은 부차적으로 다룬다.

자유주의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는 노동권 신장(그리고 노동권과 긴밀하게 결합된 사회 복지권 강화)이 아니라 경쟁적 시장 질서의 구축이기 때문이다. 경제 민주화, 경제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훌륭하며 앞으로 더 발전시킬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도 경제 민주주의가 곧 재벌 개혁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비아냥거림은 곧 "경제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는 비아냥거림으로 전환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가장 많이 듣던 말이 경제 민주화-재벌 개혁이었는데,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 하에서 대다수 서민들, 가난한 이들의 삶이 더 피폐해졌다.

대다수 국민 개개인의 삶의 현실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일을 해결해주는 경제 민주화, 밥 먹여주는 경제 민주주의만이 국민들의 열렬한 동의와 지지를 받을 것이다. 순환 출자 규제와 금융-산업 분리처럼 직장인·서민들의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고용 안정과 봉급 인상, 비정규직 차별 해소로 직결되는 경제 민주화, 오후 6시에 칼퇴근하고 주말 이틀 쉴 수 있으며, 1년에 한 달의 유급 휴가를 쓸 수 있게끔 하는 경제 민주화, 비정규직으로 또는 중소기업에서 일하더라도 임금이나 여타 처우에서 별다른 차별을 못 느끼고 살 수 있는 경제 민주화, 이런 것을 성취하는 것이 바로 중요한 일상적 삶의 개선 과제들, 즉 개인의 실질적 자유를 위한 과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 민주화는 단지 불공정한 시장 질서를 시정하는 차원을 넘어, 자본주의적 시장 질서 그 자체에 대한 비판과 개혁의 정신을 가질 때만이 가능하다.

3. 어떤 가치관, 어떤 세계관의 복지 국가인가?

복지 국가–프레임의 전쟁이 시작되다


경제 민주화 담론만이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 아니다. 복지 국가 담론 역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이제는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까지도 복지 국가를 외치는 시대가 되었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반값 등록금과 노인 연금 확대, 의료 보험 확대 등을 말하고 있다.

2010년 6월의 지방 선거에서 떠오른 무상 급식 이슈 덕택에 우리나라 진보의 정신 세계 속에 새로운 담론 즉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가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다. 그리고 2012년이 되자 다시 또 다른 차원의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가 등장했다. 즉 경제 민주화 담론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2012년 4월 총선과 12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여당과 야당이 모두 경제 민주화와 복지 국가라는 화두를 내걸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당과 야당은 누가 진짜 경제 민주화, 진짜 복지 국가를 할 것이냐를 놓고 경쟁하고 있다.

물론 경제 민주화와 복지 국가가 그 자체 가장 소중한 궁극적인 가치 또는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여 주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만약 경제 민주화 또는 복지 국가 말고도 다른 수단, 다른 방법으로 국민들의 밥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많은 국민들은 그 길을 택할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흔히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이며, 따라서 경제 성장이 최고의 복지"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경제 민주화와 복지 국가에 진짜, 가짜는 없다. 지난 100년간의 세계 역사는 복지 국가에 여러 가지 유형, 여러 가지 이념적 지향성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학자들은 유럽의 복지 국가에 보수주의 유형(독일), 사회민주주의 유형(스웨덴) 그리고 자유주의 유형(영국)이 있다고 말한다.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같은 앵글로색슨 국가는 영국의 자유주의 유형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핀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같이 사회민주당이 전후 오랜 기간 집권한 북유럽 나라들은 사회민주주의 유형이라고 말한다. 그에 반해 건전 보수 정당(기독교민주당)이 오랜 기간 집권한 독일은 전형적인 보수주의(조합주의) 복지 국가로 분류된다.

최초로 사회 복지 정책을 도입한 100여 년 전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그렸던 세상을 보수주의 복지 국가라고 한다면, 그의 정신을 일정 정도 계승하여 1950년대 라인강의 기적 시기에 독일의 집권 기독교민주당이 그렸던 질서 자유주의(사회적 시장 경제론)의 세상은-요즘 우리말로 옮긴다면–건전 보수 지향성의 경제 민주화와 복지 국가론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상당수 의원 그리고 민주당의 상당수 의원이 포함된 건전 보수주의 세력의 지향성을 '건전 보수' 가치관의 경제 민주화, 복지 국가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기존의 시장 만능주의 입장을 버리고 건전 보수의 입장으로 차츰 선회한다면, 새누리당과 민주당(안철수 신당도 마찬가지) 사이의 이념적, 정책적 차이는 점차 희석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사회 경제 정책에 국한해서일 뿐이며, 남북 문제와 외교 안보의 경우에는 사안이 다르다.)

경제 사상적으로 볼 때 한국의 보수 세력은 분명 스스로를 갱신하고 있다. 시장 만능주의(신자유주의)를 버리고 독일의 질서 자유주의 정도의 건전 보수(또는 중도 우파) 정도로 전환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다. 보수 언론인 조·중·동 중 <중앙일보>의 최근 방향 선회는 이런 맥락에서 주목된다. 손석희 전 성신여자대학교 교수를 JTBC의 보도 담당 사장으로 영입한 것에서 이 점이 보인다.

그런데 이 경우 문제되는 것은 한국의 민주 세력이다. 더 왼쪽으로 이동하지 않는다면 건전 보수주의와의 차이가 더욱 불분명해질 것이고, 따라서 생활인의 관점에서는 굳이 민주 세력을 선택할 이유가 더욱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는 2012년 10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복지 국가 5개년 계획을 시행하겠다고 했다. 문제는 그 내용이다. 문재인 캠프에서 나온 복지 공약과 재원 조달 방안을 보면, 2011년 말 민주당이 발표한 것과 달라진 게 거의 없다. 당시 민주당은 연평균 33조 원의 추가 복지 예산을 마련하여 사회 복지를 늘리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더라도 집권 말기인 2017년에 우리의 복지 수준은 지금의 미국(선진국 최악의 복지를 하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그런 속도라면 미국 수준에 도달하는데 10년이 걸릴 것이다.

물론 '첫 술에 배부르랴'며, 10년 뒤 미국, 20년 뒤 OECD 평균의 복지에 도달하면 되지 않겠냐고 조급증을 달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민주당에는 언젠가 스웨덴 수준의 복지 국가를 하겠다는 의지와 열정이 있는가? 나는 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민주당에는 그럴 의지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없다.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의 복지 국가를 만든 것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었다. 사회민주주의의 세계관과 정치경제학으로 무장한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수십 년간 집요하게 노력하여 만들어낸 성과가 북유럽 복지 국가이다. 그에 반해 민주당에 (그리고 안철수 신당에) 모인 정치인들과 관료들, 지식인들의 거의 모두가 자유주의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자유주의의 프레임 안에서 복지 국가를 만든다? 가능하다. 그게 바로 미국 민주당 리버럴이 생각하는 복지 국가이고 그게 바로 클린턴-오바마 수준의 복지 국가이다. 선진국 최하위의 복지 국가 말이다.

그렇다면 안철수 신당은 나은가? 지난 2012년 11월의 안철수 캠프의 발표를 보면 복지 구상도 그렇고 그 재원 마련을 위한 증세 구상도 마찬가지고, 문재인 캠프보다도 못했다. 특히 충격적인 점은 그 발표 내용들이 2012년 7월 말 발간된 책 <안철수의 생각>(김영사 펴냄)과 달랐다는 것이다. 그 책에서 안철수는 보편적 복지 구상을 제시했고 또한 부자 증세만 아니라 보편적 증세도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후 결성된 안철수 캠프는 그 책과 전혀 다른 공약을 제시하였다. 장하성 교수를 필두로 하는 개혁 자유주의 학자들이 복지-노동 공약 마련에 참여하면서 문재인 캠프보다 더 보수적인 복지-노동 공약이 발표되었다. 복지-노동 공약만 보면 오히려 박근혜 캠프와 더 가까웠다. 당연히 스웨덴 복지 국가 같은 것은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았다.

현재 박근혜 정부는 연평균 27조 원의 추가 복지 예산으로 더 나은 복지를 하려 있다. (안철수 캠프 역시 이런 수준의 추가 복지 예산을 상정했다). 이런 속도라면 향후 13년 뒤에 오늘날 미국 수준 복지에 도달할 것이고, 25년 뒤에야 OECD 평균의 복지에 도달할 것이다. 따라서 복지 정책 하나만 볼 경우, 민주당이 집권하나 (그 경우 20년 소요), 새누리당이 집권하나(그 경우 25년), 큰 차이가 없다.

노인 연금 개혁–어떻게 할 것인가?

박근혜 정부-새누리당이 집권하나, 민주당(또는 안철수 신당)이 집권하나 큰 차이가 없는 대표적인 분야가 노인 연금 정책이다. 박근혜-새누리당은 모든 노인에게 1인당 20만 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고 공약했다. 문재인 캠프(민주당)와 안철수 캠프는 모두 모든 노인에게 1인당 18만 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고 했었다. 선거 공약만 보면 박근혜-새누리당이 더 진보적이었다.

왜 민주당과 안철수 캠프는 노인 기초연금의 확대를 꺼려했을까? 결정적인 걸림돌은 재원 조달이었고, 자칫 재원 조달을 위해 큰 규모의 증세를 해야 하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현재 보편적 복지 원칙이 아닌 선별적 복지 원칙으로(소득 하위 70퍼센트 노인들에게만 지급) 당시 최고 9만2000원 지급했던 기초노령연금은 2012년 4조 원의 중앙정부 예산이 소요되었다. (현재 기초노령연금은 65세 이상으로 지급 기준 이내의 소득 즉 월 소득이 단독 노인인 경우 83만 원 이하, 부부 노인인 경우 월 132만8000원 이하인 경우에 한하여, 소득 인정액에 따라 1인당 최저 2만 원에서 최고 9만6800원을 매월 지급한다.)

물론 박근혜 정부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노인 연금 재원 조달 문제 때문에 공약을 수정하여, (1) 소득 하위 70퍼센트의 노인들 중 국민연금 미가입자에게는 원래대로 월 20만 원을 지급하지만 국민연금 가입자에게는 월 14~20만 원을(가입 기간에 따라) 차등하여 지급하고, (2) 소득 상위 30퍼센트의 노인들에게는 그 중 국민연금 미가입자에게는 월 4만 원만을 지급하고, 국민연금 가입자에게는 월 4~10만 원을(가입 기간에 따라) 지급하는 안을 새로 제시하였다.

나는 연금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노인연금 개혁안의 구체적인 전문적 내용에 대해 왈가불가할 위치에 있지 않다. 그렇지만 분명한 점은, 조세(세금)에 의해 그 재원이 조달되는 기초(노령)연금에 관한 한, 보편주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유한 고소득자에게서는 세금만 걷고 그들에게 동등한 복지 혜택을 주지 않는 선별적 복지의 원칙으로는, 당장은 한정된 재원을 서민 계층에게 집중 투하하여 그들의 복지 혜택을 늘릴 수 있을지라도, 세금은 부담하면서 별다른 복지 혜택은 누리지 못하는 고소득 부유층의 조세 저항에 심해지는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

복지 정책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자산 및 소득 조사를 통해 선별된 소수의 가난한 자들에게만 복지 혜택을 주는 것을 선별주의 복지라고 한다면, 그런 조사를 다 생략한 채 모든 대상자들에게 복지 혜택을 주는 것을 보편주의 복지라고 할 수 있다. 부자건 가난한 자건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무상 급식을 제공하는 것은 보편주의이며, 그렇지 않고 소득 순위 50퍼센트 또는 70퍼센트까지만 무상 급식을 제공하고 그보다 부유한 중·상위 50퍼센트 또는 상위 50퍼센트에게는 급식비를 받는 것(유상 급식)은 선별주의라고 한다. 초·중등 공교육 강화도 보편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학령기 어린이와 청소년이 의무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공교육은 부자와 빈자를 차별하지 않고 동일한 교육의 권리와 의무를 주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복지 정책을 보편주의 원리에 따라 설계할 수는 없다. 원리상 모든 대상자에게 혜택을 제공할 수 없는 분야가 있다. 예컨대 주택 분야의 경우가 그러한데, 고급 호화 주택에 거주하는 고소득자와 초라한 공공 임대 아파트에 거주하는 저소득자에게 동일한 액수의 주거보조 수당을 지급할 수는 없다. 따라서 복지 선진국의 경우에도 주거 수당은 소득 및 자산 조사를 통해 일정 수준 이하인 주민들에게만 그 혜택을 제공한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은 마치 선별주의 복지는 보수의 전유물이고, 보편주의 복지는 진보 의 전유물인 것으로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 많은 경우 오히려 진보가 선별주의 복지를 더 지지한다. 왜냐하면 한정된 복지 예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집중적으로 투여하여 복지혜택을 주는 것이 더 정의롭고 공정·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의 노동당과 노동조합은 1950~60년대에 그 세력이 매우 강했는데도 북유럽 같은 복지 국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자들에게도 혜택을 주는 보편주의 복지 국가보다는 가난한 자들에게 집중적으로 혜택을 주는 선별적 복지 국가를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경우 2000년대 초·중반 민주노동당은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가끔)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선별적 복지 국가에 대한 지향성이었다.

그렇지만 선별주의 원리에 따라 운용되는 복지 국가는 궁극적으로 '최소주의' 또는 '잔여주의' 복지 국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 점은 복지 국가를 혜택(복지)의 차원만이 아니라 기여(복지 재정 즉 조세 및 보험료)의 차원에서도 살펴볼 때 분명해진다.

선별주의 복지의 경우 선별된 가난한 이들만이 복지 혜택을 받는다. 그렇지만 가난한 이들은 대부분 별다른 납세 능력이 없는 저소득층이다. 따라서 그 복지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하는 것은 중간 소득층과 상위 소득층이다. 이 경우 복지 혜택은 거의 받지 못하면서 그 비용 부담은 전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중간 및 상위 소득층의 반발(조세 저항)이 불을 보듯 뻔하다. 더구나 어느 사회건 더 나은 교육을 받고 더 나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중간 및 상위 소득층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이 강하다. 따라서 선별주의 복지를 하는 나라의 정치인들은 절로 복지 예산을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하게 된다.

이에 반해 보편주의 복지의 경우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가 모두 동등한 복지 혜택을 받을 사회적 권리를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보편주의 복지에서 모든 이들은 '평등'하다. 모든 시민 또는 주민은 '필요'에 따라 복지 혜택을 분배받을 권리를 지닌다.

보편주의 복지 국가에서는 저소득층은 적은대로, 중간 및 상위 소득층은 많은대로, 자신의 소득 대비 누진성의 원칙에 따라 더 많은 세금 즉 복지 비용을 분담한다. 즉 보편적 증세(보편 증세)의 원리를 지킨다. 보편주의 복지 국가에서는 모든 시민 또는 주민들이 각자의 세금 지불 능력(즉 소득 및 자산)에 따라 그 비용을 분담한다.

간단히 말해, 보편주의 복지 국가의 기본적인 운용 원리는 "각자는 필요에 따라 분배받고, 각자는 능력에 따라 기여하는" 것이다. 이 원리는 일찍이 루이 드 생시몽 등 초기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우애적 협동조합의 원리로서 정초한 것인데, 보편주의 복지 국가는 우애와 협동의 원리를 개별적 협동조합을 넘어 한 나라 전체(우리 5000만 국민 전체)가 하나의 국가 공동체, 사회 공동체로서 작동하는 것으로 확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지 국가를 향한 '상상력의 정치'-잠정적 유토피아

보편적 복지 국가 운동은 이제 겨우 출발점에 있다. 무상 급식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에서 시작되어 이제 앞으로는 보편적 아동 수당과 기초노령연금 그리고 보편주의 원칙의 주거 복지 및 도시 계획, 그리고 문화­예술-과학의 발전을 위한 공공 인프라의 구축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우리가 OECD 중간 수준의 복지 국가로 가기 위해 OECD 중간 정도의 조세 부담이 불가피하며 이를 위해서 2013년 기준 130조 원의 추가 세수 확보가 필요하다' 말하더라도, 그것은 학술적 논의에 불과하다. 대다수 국민들이 그 주장에 동의하며 폭넓은 복지 국가 지지자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상상력의 정치'가 필요하다.

예컨대 반값 등록금은 하나의 상상력이다. 완전 무상 등록금은 더 큰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이건희 회장을 포함하여 모든 65세 이상 노인에게 동등하게 향후 4년 뒤 1인당 월 50만 원, 10년 뒤 월 100만 원의 기초노령연금을 지급하여 노인들의 삶이 즐거워지는 것을 꿈꾸는 것이, 그 꿈을 국민들이 함께 꾸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복지 국가를 향한 상상력의 정치이다. (실제 스웨덴의 모든 노인들은 2013년 기준 1인당 우리 기준으로 120만 원가량의 기초(노령)연금을–국민 연금 같은 소득 비례 연금을 제외하고라도-동등하게 지급받고 있다.)

더 나아가, 오늘날 스웨덴처럼 모든 노인들에게 온갖 의료·레저 설비가 완비된 저렴한 공립 실버 타운을 제공하고 그리하여 노년 생활이 행복과 자유가 넘치는 모습으로 국민들이 상상하고 꿈꾸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복지 국가 정치의 역할이다.

설령 4년 뒤 월 50만 원, 10년 뒤 100만 원의 기초노령연금에 필요한 추가적 복지 예산이 30조 원(50만 원의 경우)이고, 70조 원(100만 원의 경우)의 추가 예산이 소요될 지라도, 만약 국민들 개개인이 이런 꿈을 공유할 수 있다면, 그들은 그 비용을 십시일반으로 감수할 것이다. 그 복지에 필요한 막대한 복지 예산을 충당하기 위해 단지 부자들만이 아니라 중산층 그리고 저소득층도 자기 소득에 (누진적으로) 비례하여 십시일반으로, 보편적으로, 세금을 납부한다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누진적 조세 부담이란 예를 들어 연간 소득 10억 원이 넘는 이건희 회장 일가 등 최고 소득 가구는 소득의 75퍼센트를 세금(소득세, 자산세 등)으로 납부하는데 반하여 연간 소득 2000만 원이 안 되는 저소득 가구는 소득의 1퍼센트 미만만을 세금으로 내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연소득 1000억 원이 넘는 재벌 가문은 700~800억 원을 세금으로 납부하고, 반면에 연소득 2000만 원가량의 비정규직 청년은 20만 원가량을 세금으로 납부한다. 그렇지만 이건희 회장도, 그리고 비정규직 청년의 노인 부모도 동등하게 월 50만 원(연 600만 원), 월 100만 원(연 1200만 원)의 동등한 기초노령연금 혜택을 받게 하자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는 보편적 증세와 함께 가야 한다

이런 멋진 보편적 복지 국가를 만들기 위해 '부자 증세'부터 먼저 할 건지, 아니면 '보편적 증세'부터 먼저 할 것인지는 방법의 문제, 즉 궁극적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의 문제이다. 물론 여전히 우리 국민들은 부유한 특권층의 탈세와 온갖 조세 감면 혜택에 신물이 난 상태이다. 따라서 향후 몇 년간은 부유층에 대한 과세와 중세에 집중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저소득층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복지를 위한 재원 조달에 적극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그들이 먼저 상당한 복지 혜택을 체험적으로 누린 이후에라도, 즉 노인연금 20~50만 원과 반값 등록금, 무상 보육과 초·중고 무상 교육 등을 체험한 끝에, "이렇게 좋은 복지 혜택을 지금보다 훨씬 더 늘려서 그 좋은 혜택을 모두가 누리겠다는 건데, 나도 미약하나마 조금 세금을 더 납부하겠습니다" 하는 의견이 절로 그들의 입에서 나올 수 있을 때 시행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꿈과 이상(理想)을 갖자

스웨덴식 복지 국가를 이야기하면 흔히 너무 이상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1950년대 당시 미국 정부의 대외원조기관인 국제개발처(USAID)의 내부 보고서에서 "밑 빠진 독"이라고 부를 정도로 경제 개발에 실패한 완전한 무능력자로 알려져 있었다. 1961년 경제 개발에 착수할 당시에는 1인당 소득이 연간 82달러로, 당시 아프리카 가나의 179달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날은 우리의 2012년 1인당 국민소득은 연간 2만4000달러에 달한다.

우리가 제시하는 스웨덴 수준의 복지 국가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만들어낼 수 있다. 지금은 우리의 복지 수준이 OECD 최하위로 멕시코와 비슷하지만, 우리가 전 국민의 뜻을 모아 복지 개발-인간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앞으로 10년, 20년, 30년 뒤를 바라보면서 줄기차게 나아간다면, 10년 후 이탈리아 수준, 30년 후 스웨덴 수준의 복지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복지 국가의 모범으로 알려져 있는 스웨덴의 사회 경제 시스템 역시 평탄한 역사 속에서 구현된 것이 아니다.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홍기빈 지음, 책세상 펴냄)에 나오듯이 그것은 193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거의 반세기 가까운 기간에 온갖 정치경제적 논쟁과 대립 속에서 좌충우돌하며 구축된 것이다.

스웨덴 역시 우리와 비슷하게 재벌 문제와 노동 문제, 복지 등 다양한 경제사회적 문제들에 직면했었으며, 그에 대해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공산주의는 모두 다른 해법을 제시했다. 이런 여러 가치관·세계관들은 스웨덴 복지 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때론 대립하고 때론 협조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 국가 스웨덴은 그 과정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꿈과 이상(理想), 미래 비전의 집약체가 이념이다. 이념의 과잉이 아니라 이념의 빈곤이 오늘날 민주 진보 세력의 위기를 낳는다. 민주당의 패배와 여러 진보 정당들의 혼란은 한 시대가 종말을 고했음을 보여준다. 1980년대 386 세대의 등장과 함께 출현했던 NL(민족 해방)과 PD(민중 민주) 그리고 1990년대 소련의 붕괴와 미국 자본주의의 융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융성한 각종 자유주우의 사조의 종말이요, 그것을 중심으로 하던 정치의 종말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정신과 세계관, 새로운 목표와 가치의 설정은 아직 뚜렷한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런 까닭에 혼란은 무기력은 계속된다. 이제는 새로운 꿈과 이상(理想)에 대해, 새로운 가치와 목표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정승일 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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