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창간20주년 특별기획] 코로나 역시 현대문명의 ‘선물’일 뿐

릴레이 기고 ‘코로나 너머’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발행 2020-05-16 17:10:24
수정 2020-05-16 17:10:24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없음
 

편집자 주:2000년 5월 15일 첫걸음을 뗀 민중의소리가 창간 20주년을 맞았습니다. 독자와 후원인들의 성원과 격려로 민중의소리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민주주의를 확장하며 자주평화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한 진보언론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창간 20주년 특별기획으로 각계 원로, 전문가, 신진인사들이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와 한국사회를 조망하는 릴레이 기고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

서구문명이 신세계에 안겨준 최대 선물은 전염병이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발을 디딘 지 불과 40년 만에 탐험가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대부분을 밟고 다닌다. 유럽인의 강제노동제도, 그리고 유럽에서 이입된 새로운 질병과 접촉하면서 원주민은 멸절된다. 흑사병으로 알려진 새로운 역병이 14세기에 아시아로부터 수입되어 이미 기근으로 쇠잔해진 유럽인을 공격했을 때, 전사한 인구수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신대륙에서 죽어갔다.

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이와 똑같은 일이 태평양에서도 벌어졌다. 하와이 같은 청결한 대양에는 병원체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서구인이 옮겨온 온갖 병균에 아메리카의 원주민이 당했던 것처럼 섬의 주민들을 치명적인 재앙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처럼 역병은 인류문명사에서 전쟁, 기근 못지않은 집단 죽음을 몰고왔다. 역병은 단순한 병이 아니라 ‘문명사적 병’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코로나가 그러하다. 코로나 역시 현대문명이 만들어낸 문명사적 병이다.

2
코로나로 인하여 페루 연안에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야행성 프랑크톤이 불을 켜고 도심 주변을 밝히고 있다. 오래 전에 곳곳에 널렸던 반디불이 사라졌다가 맑은 산촌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간의 해변 접근이 단절되자 프랑크톤조차도 이를 알고 해변으로 출몰한 것. 사라졌던 물개와 거북이도 돌아오고 있다. 거북이는 아무데서나 산란하지 않는다. 거북이 역시 회귀본능이 있어서 특정 바닷가 모래밭에 어두운 야음을 틈타서 알을 낳고 부화시킨다. 부화된 새끼들은 다른 동물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용을 쓰면서 바닷가로 달려간다. 그 자체 장엄한 생명의 드라마다.

2020 년 3 월 24 일 페루의 리마에 있는 해변가에 수천 마리의 새들이 모여든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이 사라진 빈 해안은 새들의 차지가 됐다.
2020 년 3 월 24 일 페루의 리마에 있는 해변가에 수천 마리의 새들이 모여든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이 사라진 빈 해안은 새들의 차지가 됐다.ⓒ뉴시스/AP

세계 해안이 통제되면서 바닷가 모래밭 거북이 산란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물개들도 올라와 간만의 휴식을 취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바닷가 모랫사장을 ‘해수욕장’이라 표현한다. 지극히 인간 중심적 표현이다. 여름 한철 쓰자고 만들어진 모랫사장이 아니다. 조개가 살아가고 염색식물이 군락을 이루며 철새가 날아오고 거북이가 산란하는 생명의 공간을 인간들이 잠시 빌리거나 탈취하여 이용할 뿐이다.

인간의 영역과 권한인줄만 알았던 바다가 사실은 생물체가 함께 숨쉬는 공유의 공간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코로나 이후, 바닷가 거북이의 귀환은 우리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려준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거대한 재앙으로 다가와 있지만 인간과 자연의 제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고 포스트 코로나의 문명사적 성찰을 하게하는 적극적 계기가 될 수도 있고, 되어야한다.

코로나 이후 인간의 발길이 끊기며 자연이 회복된 바다
바다가 생물체가 함께 숨쉬는 공유의 공간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문명의 전환은 코로나가 인류에게 던져준 가장 중요한 화두

3
인간의 끊임없는 식탐은 기다려서 잡는 것이 아니라 악착같이 쫓아가서 잡는 싹쓸이 어법으로 바다를 고갈시켰다. 사람에게만 집이 있을까. 물고기도 정든 집을 그리워하고 아늑하여 천적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을 좋아한다. 어느 물고기에나 집이 있으며 선호하는 장소가 있기 마련이다. 고기떼는 숲그늘로 몰려드는 근성이 있다. 물고기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숲을 그리워한다. 동물만이 숲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도 해변이나 섬의 숲그늘로 몸을 숨기고 ‘그늘의 미학’을 즐긴다. 선사시대 인간들이 바위그늘에서 주거처를 마련하였듯이 물고기들도 바위그늘이나 숲그늘을 선호한다. 오늘날의 현대어법이라는 것은 그 집들을 쫓아가면서 싹쓸이하는 어법을 뜻한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이런 글을 소개하고 있다. ‘수륙에서 나는 이익은 공사가 다같이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때없이 잡으면 번성하지 못한다. 지금 백성들이 소년어를 잡기 좋아하는데. 아무리 많이 잡아도 쓸모가 없다’고 했다.

이덕무가 소개한 ‘소년어’란 세글자가 아주 강렬하게 다가온다. ‘소년어’란 단어만큼 인간의 잔인하고도 부도덕한 어린 물고기 남획을 잘 설명한 단어를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촘촘한 그물’을 웅덩이에 넣어서는 안 된다는 문명사적 교훈이다. 거대한 상업적 고기잡이가 아니더라도 빈틈없이 고도로 발달된 그물은 소년어는 물론이고 유아기 단계의 가녀린 물고기까지 싹쓸이로 해치운다.

지난 1세기, 불과 100여년이 채 안 되는 시기에 전 지구적 차원에서 고기들이 급격히 사라졌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소멸 및 급격한 감소의 속도를 늦추지 않고 있다. 물고기가 가장 많이 모여살 뿐더러 종다원성도 풍부한 연근해부터 소멸· 감소하기 시작하여 비교적 머나먼 외해는 물론이고 망망대해에 이르기까지 파장이 미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텅빈 이탈리아 베네치아스의 운하
코로나19 사태로 텅빈 이탈리아 베네치아스의 운하ⓒ뉴시스/AP

4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면 강원도 최북단 고성 거진항이 부른다. 2월 말이면 늘 명태축제가 열린다. 그런데 축제랍시고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는 것이 그 많던 명태들이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 많던 명태는 어디로 갔을까. 2000년부터 급격히 어획량이 줄어 ‘동해명태’를 구경하기 어렵다. 온난화 때문에 사라졌다. 수온 1℃가 높아지면 그에 따라 적어도 수백키로미터의 한계선 이동이 이루어진다. 동해에 난류성 물고기가 대거 출현 중이다.

남극이 녹고 북극이 녹는 중이다. 한반도 남부의 아열대화가 촉진된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표현대로, 지구온난화와 수온상승은 범 인류적인 지구의 재앙이다. 베네치아의 해수면이 높아져 성 마르코 성당이 수시로 물에 잠긴다. 석호 위에 세운 도시이므로 사실상 인간이 바다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재난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서남해안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간척지, 그리고 매립하여 그 위에 세운 도시들이 어떤 운명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린란드가 그야말로 식물이 자라는 녹색의 땅이 되었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다. 툰드라의 빙토 아래 잠들어있던 어떤 바이러스가 표층 위로 출현하여 어떤 재앙을 불러올지 예측 불가이다. 온난화는 단순하게 수온상승과 수면상승만을 뜻하지 않는다. 지각변동과 새로운 병균의 출현을 가능케 할 것이다. 매우 불길한 시나리오들인데 이 모든 것이 인류의 현재 속도와 물량의 자본주의와 연결되어있다.

프란치스코 교종(교황)이 지난 4월 코로나19로 인해 십자가 아래서 홀로 기도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교황)이 지난 4월 코로나19로 인해 십자가 아래서 홀로 기도하고 있다.ⓒ뉴시스/AP

코로나 이후의 인류문명사가 우리가 지금껏 해온 문명의 혜택이라는 것들에 관하여 새로운 생각을 하게 만든다. 미세 프라스틱을 없애려면 비닐봉투도 쓰지 말고 스티로폴을 쓰면 더욱 안된다. 이른바 알갱이화장품을 쓰지 말아야한다. 시장에서 생선을 사면서 비닐봉투가 없다면, 얼마나 불편하고 당황스러울까. 그 불편과 당황을 뛰어넘는 새로운 문명의 전환, 코로나가 인류에게 던져준 가장 중요한 화두가 아닐까.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기자를 응원해주세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