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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공덕비’ 시민들은 폭파하자는데 옮겨놓자는 포천시, 도대체 왜?

시민단체 “철거 아닌 이설 결정하는 바람에 해결 안 돼”

이승훈 기자 lsh@vop.co.kr
발행 2020-05-17 16:13:08
수정 2020-05-17 16: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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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논개 생가지를 지나 오른편에 위치한 연못의 정자인 '단아정'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난 1999년 10월 쓴 것으로 알려진 정자 현판이 20년만에 철거됐다. 2019.12.3.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논개 생가지를 지나 오른편에 위치한 연못의 정자인 '단아정'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난 1999년 10월 쓴 것으로 알려진 정자 현판이 20년만에 철거됐다. 2019.12.3.ⓒ뉴스1 
 
충청북도 청주시 청남대에 있던 전두환·노태우 동상이 철거된다. 도는 이들의 이름을 딴 대통령 길도 폐지하고 유품사진 등의 기록도 전시하지 않기로 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걸려 있던 ‘전두환 친필 현판’도 5월 중으로 ‘안중근체’로 교체된다. 지난해 말엔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가 30년 가까이 보관·전시하고 있던 전두환 부부의 물품을 철거했다. 비슷한 시기에 전두환이 직접 쓴 장수군 장계면 주논개 생가지 정자 현판도 철거됐다.

이처럼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전두환 흔적 지우기가 이뤄지고 있다. 전두환이 아무리 ‘전직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5.18 광주학살의 주범이면서 대법원에서 혐의가 확정된 내란·반란 수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기도 포천시 축석고개 삼거리 부근엔 여전히 ‘전두환 공덕비’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해마다 반복되는 “철거하라” 민원으로 포천시가 2018년경에 한차례 철거 또는 이설을 검토한 바 있으나, 무산된 뒤 아무런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당시 시는 시정조정위원회를 거쳐 이설(移設)을 결정하고 950만원 상당의 예산을 편성했으나, 시의회에서 이를 승인하지 않으면서 무산됐다. 이후 이에 대한 논의는 전개되지 않고 답보상태에 놓였다.

17일 오전 포천시 전두환 공덕비 철거를 촉구하는 상징의식의 모습.
17일 오전 포천시 전두환 공덕비 철거를 촉구하는 상징의식의 모습.ⓒ이명원 제공

‘철거’ 요구했는데, ‘이설’ 결정

‘전두환 공덕비’는 지난 1987년 12월 세워졌다. 시민단체가 철거를 요구하며 뜯어내 지금은 사라진 비석 동판엔 “개국 이래 수많은 외침으로부터 굳건히 나라를 지켜온 선열들의 거룩한 얼이 깃든 이 길은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분부로 건설부와 국방부가 시행한 공사로서 ‘호국로’라 명명하시고 글씨를 써 주셨으므로 이 뜻을 후세에 길이 전한다”는 찬양 문구가 적혔다. 불리는 명칭 그대로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공덕비인 셈이다.

또 이 비석엔 전두환의 친필 글씨체로 커다랗게 ‘호국로’(護國路)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 옆엔 ‘대통령 전두환’(大統領 全斗煥)이 적혔다.

포천진보시민네트워크 등 시민사회는 해마다 5월 18일이 다가오면 이를 철거하라고 요구해 왔다. 역사적으로나 법원 판결로나 범죄자로 규명됐음에도, 여전히 반성이 없는 이의 행적을 기려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2018년 5월 17일엔 시민사회가 해당 비석을 흰 천으로 가리고 그 위에 ‘학살자 전두환 죄악 증거비’라고 적힌 현수막을 거는 상징의식을 벌였다. 또 이듬해엔 민중당 포천시위원회가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 씨의 발언인 ‘민주주의 아버지’가 적힌 현수막을 걸고, 붉은 페인트가 묻은 공을 던지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올해도 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시에 해당 비석 철거를 촉구하면서 퍼포먼스를 벌일 예정이다.

하지만 시는 여전히 해당 비석을 철거할 계획이 없다. 지난 13일 경기도 포천시 관련 부서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2018년도에 (공덕비 이설이) 추진했다가 무산된 뒤로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 2018년 9월 포천시는 부시장과 30여 명의 국장급 공무원들로 구성된 시정조정위원회를 개최해 해당 비석을 어떻게 할지 논의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시는 ‘철거’가 아닌 ‘이설’을 결정했다.

그해 9월 7일 열렸던 포천시의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정례회에 참석한 시 관계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에 관련된 학살자라고 해도, 대통령이 지시해서 건설된 비를 일방적인 민원만 갖고 철거하면 되느냐는 민원도 많이 받았다”라며 “대통령 공적을 기리는 동판은 제거됐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진보단체 요구사항도 들어 준 것이고, 또 비석을 왜 없애느냐는 반대급부적인 민원도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에 옮기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시의회에 ‘전두환 공덕비’ 이설 비용으로 950만원을 승인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설 비용은 승인되지 않았다. 이설로는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세화 예산결산특별위원장(더불어민주당 소속)은 그해 9월 12일 열린 포천시의회 본회의에서 “이설은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못하여 끊임없는 민원이 제기될 우려가 있다”며 “시민 여러분께서 주신 소중한 예산을 헛되이 쓰지 않도록 이설 공사를 보류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손세화 포천시 시의원은 지난 2018년 9월 17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전두환 공덕비 철거 또는 이설 여부에 대해 시민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이같은 댓글들이 달렸다.
손세화 포천시 시의원은 지난 2018년 9월 17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전두환 공덕비 철거 또는 이설 여부에 대해 시민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이같은 댓글들이 달렸다.ⓒ손세화 시의원 게시물 갈무리

“포천에 전두환 공덕비, 치욕”
“철거 말고 발파해야”
“흑역사도 역사...이전해 기록해야”
“이전하는 비용도 아까워”

처음부터 이설이 아닌 철거를 주장했던 손세화 시의원은 이후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그해 9월 17일 손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전두환 공덕비 관련 의견수렴을 수렴한다는 게시물을 올렸다. 그러자,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전두환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죄인으로, 그런 자의 공덕비가 포천에 있다는 건 치욕이다. 철거가 아닌 폭파, 해체해야 한다”는 분노 서린 글이 달리는가 하면, “잘못된 역사도 역사다. 논쟁이 있었다는 걸 기록해서 이전해야 한다”는 글도 달렸다.

“철거는 당연히 해야 하고, (전두환이 지은) 도로명도 개명해야 한다”, “돌이라도 던지게 철거하는 과정에 포천시민들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 “발파해야 한다”, “그냥 엎어뜨려 시민들 평상으로 사용하고, 철거비용은 복지 사각지대 있는 분들을 위해 쓰는 게 좋겠다” 등의 글도 달렸다.

또 한 시민은 “5.18 학살의 주범 공덕비가 의견을 청취할 문제인가, 바로 없애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항의하는 글을 달았다.

댓글만으론 철거 쪽이 우세해 보였으나, 15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손 의원은 “그냥 돌덩이에 불과한데 거기에 너무 의미부여하는 것 아니냐, 그런 데에다가 왜 예산을 쓰느냐 등의 항의전화도 많이 온다”고 말했다. 이어 “민주당 내에서도 의견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라며, 2018년 이후 철거 방향으로 관련 논의를 이끌지 못한 이유에 관해 설명했다.

포천시 소흘읍 축석검문소 맞은편에 세워져 있는 '전두환 공덕비'.
포천시 소흘읍 축석검문소 맞은편에 세워져 있는 '전두환 공덕비'.ⓒ민중의소리

“공무원이 대법원판결 따라야지 뭘 따르나?”

전두환 공덕비 철거 및 이전 논의가 전개되지 않는 이유는 포천시가 ‘기계적 중립’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탓으로 보인다.

2018년 9월 7일 개최한 제135회 포천시의회 1차 정례회 기록을 보면, 손세화 시의원이 “950만 원을 들여서 이설하는 것보단 차라리 이런 흑역사는 아예 제거하는 게 낫지 않나”라고 묻자, 시 건설과장은 “시민단체에서 (철거하라고) 민원을 내지만 (또 한편에선) 나이 드신 분들이 민원실에 계속 전화해서 존치해야 한다, 시민단체들 퍼포먼스하는 걸 왜 가만두느냐며 항의한다”며 “(양쪽에서) 이런 민원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이설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이해 부탁드린다”라고 답했다.

또 손 시의원의 지적과 시 건설국장 대답에 미래통합당 소속 송상국 시의원은 “공무원이 공무원 업무 수행하는데, 정치적인 이념을 가지고 해야 되는 건가. 흑역사고 무슨 역사고 정치적인 개념으로 공무원이 일을 한다고 하면 공무원이 할 일이 뭐가 있나. 그 발언 굉장히 부적절하다”라며 거칠게 항의했다. ‘전두환은 맹백한 죄인이고 흑역사’라는 전제가 정치적인 해석이라며, 이를 공무원에게 요구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은 명백한 죄인이다. 전두환은 1997년 4월 17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군사반란죄, 국헌문란죄, 폭동죄, 간접정범죄, 내란죄, 내란목적살인죄, 반란죄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과 2205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그가 풀려날 수 있었던 이유는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해 12월 김영삼 대통령이 퇴임 2개월을 앞두고 ‘국민 화합’이란 이유를 붙여 그를 특별사면했기 때문이다.

이명원 포천진보시민네트워크 대표는 “대법원에서 학살자로 인정 됐는데, 공무원이 대법원의 입장에서 해야지 어떤 입장에서 하란 건가”라고 말했다. 이어 “철거 예산을 올렸어야 했다. 시 집행부에서 이설 예산을 올리는 바람에 해결이 안 되는 상태로 2년이 흐른 것”이라며 “대법원판결이나 역사적 규명으로 이미 결론이 난 것을 기초로 충청북도에서도 청남대에 있는 동상을 철거하기로 한 것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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