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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리의 택시운전사에서 '똘레랑스'의 혁명투사로!

 

 

[노정태의 논객시대] 다시 '가장자리'에서 시작하는 홍세화

노정태 자유기고가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7-05 오후 7:10:57

 

 

1.

한 권의 책을 읽고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까, 아니면 그런 책을 쓰고 삶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 많을까. 독자들이 아무리 '내 인생의 책'을 손에 꼽아봐야, 그것이 저자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견주기란 어려울 것이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면, 책이 만드는 '사람'에 더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것은 독자가 아니라 저자라는 뜻이다.

가령 홍세화가 그렇다. 1995년 그 유명한 책이 출간된 후 그는 지금까지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불리고 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작과비평사 펴냄),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한겨레출판 펴냄),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한겨레출판 펴냄), <빨간 신호등>(한겨레출판 펴냄), <생각의 좌표>(한겨레출판 펴냄) 등 혼자만의 이름을 달고 낸 책이 벌써 다섯 권이며, 9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 사회의 주요 진보 논객으로 손꼽혀왔고, 2011년부터는 진보신당의 당대표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홍세화는 어디까지나 "빠리의 택시운전사"인 바로 그 홍세화인 것이다.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특정한 그 누군가는 어쩌면 홍세화 본인보다 더 유명한 사람일지 모른다. 다소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홍세화'라는 이름의 노래는 없지만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이름의 노래(☞바로듣기)는 존재한다. 무키무키만만수라는 2인조 그룹이 바로 그 책의 제목을 따서 노래를 만들어 불렀던 것이다. 해당 곡에 그런 이름이 붙게 된 것은, 맴버 중 한 사람의 방바닥에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굴러다녔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 격월간지 <말과활> 창간호를 준비 중인 홍세화. ⓒ프레시안(최형락)

요컨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심지어 출간 후 20여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젊은 독자들에게 팔리고 있는 책이다. 그것이 '읽히고' 있다고까지 단정 지을 수야 없겠으나, 인터넷 서점 등을 확인해보면 꾸준히 독자들의 리뷰가 올라오고, 낮지 않은 판매지수가 유지된다. 유난히 순환이 빠르고 유행에 민감한 한국의 문화 시장에서 이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책 힘'이 죽지 않는 것이며, 그만큼 다른 그 누구보다도 그 책의 저자 스스로가 본인의 저작을 끝없이 의식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진보신당의 서울마포당협 당원인 홍세화는 2011년, 진보신당의 당원게시판 '세상사는 이야기'에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며 - 진보신당 당대표 출마의 변"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심지어 이 글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였던가요, 두려운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의미 없는 고통'이라고 말했던 이는. 당원 동지 여러분. 저는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설령 만신창이가 된다고 하더라도 이 척박한 땅에 참된 진보정당의 뿌리를 내리는데 작게나마 기여하고 젊은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다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얻은, 그것 아니었다면 쎄느강변에서 소멸했을 허명에 값하는 의미로서 이미 충분합니다. 동지 여러분이 진보신당의 당원임을 자랑할 수 있는 날을 반드시 오게 하기 위해 오늘과 내일 받을 상처 때문에 뒷걸음질 치지 않겠습니다. (☞바로가기 :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며 - 진보신당 당대표 출마의 변")

홍세화 자신보다 이 사실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에겐 이래저래 '택시운전사'가 따라다닌다"는 것을. 또한 그는 "실제로 나는 나의 정체성에서 택시운전사가 많은 부분 그대로 남아 있기를 기대한다"(<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20쪽)는 소망을 피력한다. 이는 홍세화가 많은 글에서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제시하는,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의 이미지와도 상응하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시작한 기나긴 망명 생활 도중 한 권의 책으로 뜻하지 않게 유명인사의 반열에 올랐고, 이후 고국에 돌아와 본인이 소망하던 대로 진보정치의 일원이 되어 투신할 때, 그가 만든 '택시운전사', 혹은 '척탄병'은 꾸준한 일관성을 유지하며 기대했던 만큼의 효과를 발휘해왔다.

그 택시운전사가 제시한 담론의 무기가 바로 '똘레랑스'였다. 프랑스어로 관용, 용인을 뜻하는 그 개념을 홍세화는 자신의 것으로 전유했고, 프랑스에서 온 신선한 어휘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가 똘레랑스를 말하면서, 또한 '앵똘레랑스'에 대한 결연한 투쟁을 선포하면서, 한국 사회의 담론과 지형도에 새로운 획 하나가 추가되었다.

2.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홍세화 지음, 창비 펴냄). ⓒ창비

1947년, 해방되었지만 아직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건국되기도 전에 태어난 홍세화는, 경기중학교를 나오고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던,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었다. 당시에는 고등학생들도 이른바 '시국'에 관련된 시위를 주도하거나 참여하는 일이 적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1964년과 1965년에 걸쳐 벌어진 박정희 정권의 대일 외교에 대한 반대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홍세화는 "3학년 때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처음으로 경찰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종로경찰서였는데 몇 시간 잡혀 있다가 이른바 훈계 방면으로 나왔"(<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168쪽)던 것이다.

아무튼 고3이었던 그는 영어보다 수학을 더 잘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이과를 지망하고, 서울 공대 금속공학과에 합격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될 첫 번째 사건이 벌어진다.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린 시절 그가 "단물이 다 빠진 멸치를 나의 콩나물국에서 그리고 할아버지의 국에서도 할머니의 국에서도 걸귀처럼 건져 먹었던"(160쪽, 같은 책)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66년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 공대에 입학한 그해, 남이 부러워하는 이른바 KS마크가 되어 남 보란 듯이 교복을 입고 충남 아산군 염치면 대동리, 일명 '황골'이라고 부르는 그곳, 바로 현충사에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되는 그곳에 갔던 날까지는 그랬다. 아버지와 함께 갔던 그곳에서 나는 그 대부를 만났다. 그리고 작은아버지의 말씀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고 또 내 기억 속에도 없는 그 굶주림의 실체를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내 기억에 없는 나 자신이 그 현장에 있었다. (같은 책, 161쪽)

그 '황골'이라 불리는 동네에서, 한국전쟁을 피해 피신 중이던 홍세화의 아버지와 어머니, 홍세화 본인과 그의 동생은 가까스로 몸을 숨기던 중이었다. 하지만 인민군이 들이닥쳤고, 앞서 언급된 "그 대부"의 가족들은 몰살당했으며, 돌도 차지 않았던 홍세화의 동생 역시 "죽는 병이 아닌 병에 걸려 죽었다."(같은 책, 170쪽) 그런 일을 겪은, "옥토끼를 잃은 젊은 나의 어머니는 혼을 뺏겼고 나를 키울 자신도 잃었다."(같은 곳) 결국 조부모의 손에 맡겨진 채 홍세화는 서울에서 자라났고 장성하여 출세의 보증수표인 KS마크를 달게 되었는데, 그 성인식이 끝나자마자 본인이 기억하지 못했고 기억할 수도 없었던 비극적인 역사를 알게 된 것이다. 형인 세화는 살아남았지만, 동생인 민화는 살아보지도 못한 세상을 떠났다. 전쟁 때문이었고, 넓게 보자면, 그 전쟁의 배후에 있는 미국과 소련 때문이었다.

소년 홍세화가 얼마나 '깨어있는' 학생이었는지 지금의 우리가 가진 자료만으로는 다 확인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남들이 시위한다고 할 때 팔짱 끼고 뒤로 물러설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1965년의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이른바 '민족사적 비극'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새겨진 피의 역사였다. 홍세화에게 그 가족사를 가르쳐준 아버지가 어떤 뜻을 품고 있었을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일차적으로 성적표에 찍혀 나오기 시작했다.

어렵게 입학한, 그리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서울 공대였는데 다니기 싫어졌다. 관성에 의해 학교에 가기도 했지만 안 가는 날이 더 많았다. 여지없이 낙제를 했다. 그것은 나의 학창시절 중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불상사였고 또 실패였다. 충격이었다. 다시 잡념을 버리고 공부를 하겠다고 다짐하고 기숙사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물리학, 화학, 수학 등의 과목은 나에게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같은 책, 228쪽)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자퇴서를 내고, "기차를 타고 이리 역에서 내린" 홍세화는 "역 앞에서 어느 여인의 품에 잠깐 안겼다가 마냥 걷고 또 걸어 군산까지 갔다. 다시 군산에서 통통배를 타고 개야도라는 섬에 갔다."(230쪽, 같은 책) 그 섬은 밀물이면 잠기고 썰물이면 길이 드러나 걸어서 드나들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거기서 한 차례의 밀물 때를 보내며 비를 맞고 고뇌하던 그는,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고 "민화야!"라고 소리를 지르다가, 물이 빠지고 다시 육지가 되자 그 섬에서 빠져나왔다.

드디어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갇혀 있던 섬이 다시 육지가 되었다. 나는 해방되었다. 뛰었다. 희열로 젖어 있는 몸으로 뛰었다. 육지였던 곳까지 뛰었다가 다시 섬이었던 곳으로 뛰었다. 신나게 왔다갔다하며 뛰었다. 나는 그가 되고 그는 내가 되었다. 나는 그였고 그는 나였다. 드디어 나는 하나가 되었다. (같은 책, 231쪽)

3.
 

▲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홍세화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짐작건대 이 책을 이미 읽었을 여러분이 기억하는 것과는 퍽 다른 책이다. 이 원고를 쓰기 위해 참으로 오랜만에 책을 손에 쥔 내가 바로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저자 홍세화는 '택시운전사' 이후의 홍세화이다. 이미 그가 프랑스에 오래도록 살다가 한국에 왔다는 것, '똘레랑스'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한국 사회를 비평하기 위한 이론적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것, 순식간에 유명인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평판에 누가 될 만한 오점을 남기지 않은 채 '선비'의 자세를 유지한다는 것 등을, 우리는 알고 있고 홍세화를 그렇게 기억한다.

하지만 이 책이 처음 만들어지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인데, '택시운전사'의 아우라가 너무도 강한 탓에 이제 우리는 그 사실을 잊게 되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은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이른바 '남민전의 투사', '정치 난민' 홍세화의 자전적 에세이로 기획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다.

1995년을 돌이켜보자. 이른바 '민중가요'를 불러왔던, '철의 노동자'를 부르던 그 뜨거운 목소리의 안치환이 '내가 만일'이라는 노래가 담긴, 같은 제목의 네 번째 음반을 내놓았다. 문제는 그 노래를 아무리 열심히 들어봐도 그 속에서 노동과 민중과 투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 무엇이라도 그대 위해 되고 싶어",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아니, 이런 나의 마음을"에는 한없는 서정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고, 대중들의 반응은 뜨거웠지만, 이른바 '운동권'들은 한없이 허탈해했다.(심지어 당시 학생이었던 나도 신문 지면에 이 노래에 대한 찬반 양론이 쏟아졌던 것을 기억한다) 1994년 김일성이 죽었고 1992년 소련이 망했지만, 이토록 빨리 '운동'이 '문화'의 영역으로 쏟아질 줄은, 혹은 '문화'가 '운동'의 영역을 집어삼키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남민전의 투사 홍세화의 자전적 에세이가 창작과비평사라는 이른바 '메이저' 출판사에서 나오게 된 것은 이런 전후 사정을 염두에 두어야 이해 가능하다. 직업적으로 글을 쓰던 사람도 아니었던 그에게 이렇게 큰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안치환은 '내가 만일'로 1995년 '대중가요' 가수로 거듭났다. 박노해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내며 1997년 이른바 '전향', 혹은 '변절'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남민전, 즉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의 일원이었던 홍세화가 '불란서', '빠리'를 자신의 키워드로 제시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일상화된 센세이션의 일부였던 것이다. 거론된 이들과 홍세화를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분위기가 그랬다는 뜻이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홍세화가 이제 투사가 아닌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되었음을 강조하는 책에 더 가깝다. 적어도 처음 쓰일 때에는 그렇게 시작된 책이다. 남민전의 투사 홍세화는 조직 안에서 자신이 이런 일을 했다고 술회한다.

조직 안에서 내가 했던 일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는데 당시의 상황에서는 대단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중에서 애드벌룬을 이용하여 서울 시내에 10만 장의 삐라를 뿌려, 서울 거리를, 그 무거웠던 침묵의 거리를 삐라의 바다로 만들 계획에 참여했던 것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같은 책, 79쪽)

애드벌룬에 삐라를 넣고, 미리 부착해둔 심지에 불을 붙인 채 하늘에 띄우면, 적당한 고도에 올라가 서울 시내에 삐라가 살포될 것이라는 계획이었다. 10킬로그램짜리 애드벌룬을 넘겨받아 접선지로 향하던 홍세화는 공포감에 짓눌렸지만, "그때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곧 소나기가 되어 떨어졌다." 너무도 눈에 잘 띄는 행동을 하고 있던 홍세화는 "조금 전까지 진하게 남아 있던 공포감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희열감이 가슴 가득히 충만해오는 것을 느꼈다. 젖은 몸이 날아갈 듯 가볍고 축복으로 젖는 것 같았다."(같은 곳)

앞서 언급한 홍세화의 개인사적 기술에서, 밀물에 의해 갇힌 섬에서 비를 맞고 썰물을 기다리다 빠져 나온 대목을 떠올려보자. 홍세화는 바로 이 애드벌룬을 운반하다 비를 맞은 사건과, 유년 시절의 비극적 비밀을 알게 된 후 바다 한가운데에서 비를 맞으며 죽은 동생의 이름을 외친 사건을 하나로 꿰어 회고한다. "나는 그가 되었고 그는 내가 되었다. 나는 그였고 그는 나였다. 드디어 나는 하나가 되었다."

독자는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동대문시장에서 두려움에 떨며 애드벌룬을 들고 가던 내가 어떻게 그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었는가를.(같은 책, 231쪽)

4.
 

▲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홍세화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한 성인이 인생의 특정한 시점에 자신의 과거를 회상할 경우, 그것은 반드시 어떤 서사의 형태로 재구성된다. 이것은 왜곡도 아니고 조작도 아니다. 인간 존재의 필연적 조건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지금의 나와 그때의 나, 그리고 내가 바라는 미래의 나까지 연결하는 하나의 큰 서사 속에서 구성하고 파악한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쓰던 홍세화가 바라보던 자기 자신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다. 민족사의 비극을 가족의, 개인의 역사 안에 안고 있었던 청년.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대중들에게 홍세화라는 저자는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기억되게 되었다. 고뇌 끝에 대학을 자퇴하고 같은 대학에 다시 들어갔지만, 학생운동을 하다 제적당하는 등의 고난을 겪던,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거나, 잊혔지만, 지금도 가슴 속 한 구석은 뜨거운 빠리의 망명객. 그러나 이제는 '남조선'의 혁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꼬레'의 '똘레랑스'를 위해 붓을 든 사나이.

이 책의 목적의식이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밀물이 들이닥쳐 섬에 고립된 후 비를 맞고 동생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다가 "나는 그였고 그는 나였다. 드디어 나는 하나가 되었다"는 깨달음에 도달하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시 서울대학교에 들어가 학생운동에 투신하는 그의 자기 서사를 일종의 은유로 이해할 수도 있게 된다.

물론 이 책의 서술은 사실일 것이다. 그렇게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실은 단순한 사실의 총합을 넘어설 것이다.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 죽어간 동생과 자신이 다른 존재가 아님을 깨닫고, 밀물로 인해 고립되었다가 썰물이 빠지면서 다시 세상과의 접점을 찾는 그 이야기는, 눈 밝은 독자에 의해 어떤 메타포로든지 이해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교학과 신입생으로 다시 들어간 홍세화가 한미행정협정에 대해 알고 아연실색하는 장면이 이어진다는 것을 놓고 보면 더욱 그렇다.

남민전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라는 이름에서 이미 잘 드러나듯이, 당시에는 이른바 NL과 PD의 분화가 본격화되기 전이었지만, 어쨌건 '조국통일'과 '독재타도'를 하나의 맥락으로 꿰뚫어 파악하고 있는 조직이었다. 긴급조치 시대에 독재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고자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역사적 평가를 받기 충분할 것이다. 그 구성원 중 29명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판정을 받았고, 검거된 남민전의 투사들 중 대부분은 1988년 이전에 사면 등으로 석방되었다.

물론 조직의 중심에 있던 이재문은 사형을 선고받은 후 감옥에서 사망하였으며, 실제로 사형이 집행된 경우도 있었다. <조국은 하나다> 등으로 유명한 김남주 시인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그 외 많은 이들이 중형을 선고받았다. 남민전 사건 자체는 1978년부터 1979년까지, 서울 강남 일대에서 벌어진 강도 및 절도 사건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수면으로 드러났다. 자금 확보를 위해 범죄를 저지르다 꼬리가 밟혔던 것이다. 결국 유신 말기의 큰 시국 사건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므로 남민전 사건을 기억하는 이에게, 즉 '홍세화'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의 말마따나 "남민전의 전사"를 떠올리는 이들에게,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자아내는 정조는 지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 책을 읽게 될 독자 중 만약 남민전 사건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강도와 절도 등의 혐의로 인구에 회자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그 이미지를 쇄신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5.
 

▲ <빨간 신호등>(홍세화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그가 진보신당의 당대표에 출마하기로 한 후, SNS에서는 한 낯선 이국 여성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씰비"라는 퍼스트 네임으로만 알려진 그 여성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서 홍세화와 미묘한 정서적 울림을 주고받다가, 결국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감정을 서로 확인하는 그런 누군가로 등장한다. 일부 짓궂은 진보신당 관계자 및 네티즌들이 그 이름을 굳이 거론하며 홍세화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8장인 "씰비와 실비"를 읽어보면 그와 같은 접근을 안 하기가 더 어렵다. "씰비를 만나면 나는 평소와 달리 말이 많아졌다. 말친구로 시작된 우리는 대화를 통하여 점점 가까워졌고 이윽고 말친구로 멈출 수 없는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같은 책, 131쪽) 두 사람은 흔히 말하는 '썸남'과 '썸녀'의 관계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과 그 베트남 음식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애호로 화제를 옮겼다. 홍세화는 씰비가 베트남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이 마치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착취를 연상케 한다고 말했다.

역시 내 말은 너무 지나쳤다. 결국 그녀는 넴을 다 먹지 못하고 포크를 내려놓았고 나는 거듭 사과해야만 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그 넴 사건이 있은 뒤 우리 사이가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이었다. 그 며칠 뒤 우산을 같이 쓰고 걷게 되었을 때, 그녀가 자연스럽게 내 팔짱을 끼었다. 나는 흠칫했으나 맥박이 뛰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듯했다. (같은 책, 136쪽)

좋은 로맨스물이다. 하지만 홍세화는 "그녀의 애정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고 또 감당할 자신도 없었"(같은 곳)기에, 두 사람은 실컷 '썸'만 타다가 끝나고 말았다. 빠리에서 택시를 몰며 자신의 지성과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홍세화를 보고 안타까워하던 씰비는, 홍세화가 가르쳐준 '실비'라는 단어를 이용해,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 ""실비를 맞으러 돌아갈 생각은 없어요? 그래도 당신의 나라예요. 지금 돌아가면 안 되나요? 돌아가면 무슈 옹그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잖아요.""(같은 책, 138쪽)

그 절대적인 명령, 하지만 망명객의 신세가 되어 이룰 수 없는 소망이 들려오자 홍세화는 어지럼증을 느끼고 허물어졌다. 그는 씰비의 어깨에 고개를 떨구고 상대의 품에 안겼다. 돌아갈 거야, 돌아갈 거야,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제대로 말을 잇고 있지 못하자, "그녀가 내 입을 막아버렸다."(같은 책, 139쪽) 그리고 8장이 끝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주 훌륭한 로맨스물이다.

사건이 있었던 당시에 기록하였다 해도 이런 종류의 개인적 추억에는 객관적 사실보다는 주관적 해석이 더욱 강한 영향을 미치는 법이다. 하물며 그가 프랑스에 발을 디딘지 얼마 되지 않아서 겪었던, 글을 쓸 당시에도 10년도 더 되었던 일인 다음에야, 이 내용들의 진실성을 따져 묻는 것은 그저 어리석고 할 일 없는 행동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안에 마치 "젊은 느티나무"를 연상케 하는 이 싱그러운 사랑 이야기가 굳이 왜 들어갔어야만 했느냐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 이유를 이미 다 설명했다. 홍세화는 남민전의 투사였고, 남민전은 대중들에게 강도 사건으로 알려진 운동 조직이기도 했다. 물론 그 자체가 정권 차원에서의 조작일 수도 있고, 긴급조치가 발령되던 엄혹한 시대 상황 속에서, 마치 독립군이 군자금 확보를 위해 일본인 지주의 곳간을 터는 것과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대중들에게는 남민전의 이미지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남민전의 투사는 빠리에서 본의 아닌 망명 생활을 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겪고 만다. 그리고 그는 생계를 위해 묵묵히 임대 택시의 핸들을 잡는다. 이른바 '운동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텍스트 중, 이토록 로맨스로서의 완성도가 높으면서, 동시에 소기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글을 또 찾아보기란 어렵다. 한국에는 실비가 내렸고, 씰비는 무슈 옹그의 입을 막아버렸으며, 홍세화는 남민전의 투사가 아닌,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새로운 페르소나를 얻게 되었다.

5.
 

▲ <생각의 좌표>(홍세화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기존과는 다른 '운동권 논리'가 구성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은 홍세화 개인의 고안에서 비롯한 창작물이라기보다는, 소련과 북한이라는 두 개의 구심점을 상실한 채, 이미 형식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어떻게 한국 사회의 기타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다양한 대답의 총합에 가까운 것이다. 이른바 '보수' 진영은 계속 일본과 미국을 모델로 삼아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가면 될 것이지만, '진보'는 사정이 달랐다. 혁명의 화살표가 부러진 곳에서도, 이 완벽하지 않은 세상과 맞서긴 해야 했고, 거기에도 투쟁의 논리와 발전을 향한 모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홍세화는 하필이면 빠리에 살고 있었다. 더욱 결정적이었던 것은, 그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쓸 당시, 본인이 이미 한국에 돌아올 수 있는 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꼬레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 입국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프랑스의 망명허가증이 있었지만, 한국은 다른 남민전 연루자들의 죄를 사면한 상태였다. 그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해외에서 10년의 시간을 더 보내야 했다. 그로 인해 자신의 자녀들이 한국과의 접점을 많이 상실했음을 안타까워하며, 홍세화는 이렇게 말했다.

새삼스럽게 나에 대한 공소시효가 87년인가 88년에 만료되었다는 사실을 98년에 확인해 준 한국 정부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국내의 가족과 친지들은 10년 동안 법대로 처리할 만한 용기를 가진법대로 처리하는 일에 무슨 용기씩이나 필요하겠는가마는법무부 인사를 찾지 못했다. 정치 논리에 종속되어 법에 따른 법적 처리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한국 법무부가 처량할 뿐이다. 아직도 귀국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터에 하릴없고 배부른 소리인 줄 알지만 자식들이 방학 동안만이라도 한국 땅을 자주 밟을 수 있었더라면, 하는 미련을 끝내 지우기 어렵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13쪽)

홍세화는 여기서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만약 그의 망명생활이 1987년 혹은 88년에 끝났다면, 그래서 그가 자유롭게 한국을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여기에 대해 우리는 그 어떤 유의미한 가정이나 추측도 내놓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정말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1995년의 홍세화는 오랜 세월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던 비운의, 하지만 애틋한 빠리의 택시운전사였다. 하지만 1987년의 홍세화는 한창 일해야 할 나이에 타국에서 택시 운전 및 관광 안내 등을 하며 세월을 보낸 한때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다. 80년대 말은 뜨거웠던 운동의 열기가, 비록 대통령 선거에서 큰 좌절을 겪었지만, 아직도 활활 타오르던 시점이었다. 과거의 투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았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90년대는 달랐다. 이른바 중산층이 대폭 늘어나면서 한국인들의 구매력이 높아졌고,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봇물 쏟아지듯 관광객과 유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한 분위기는 이른바 '진보 언론'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어졌다. 프랑스, 특히 파리에 대한 동경의 눈빛을 한껏 머금고 있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도 그렇거니와, 다음 책인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역시, 프랑스의 문화 및 문물에 대한 다양하고 친절한 소개를 담고 있다. 가령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을 상급생들이 골탕 먹이는 행사인 "비쥐타쥬"나, 파리 지하철 노동자들이 만우절을 맞이하여 어떤 역의 이름을 슬쩍 바꿔놓은 행사 등이 <쎄느강은...>의 지면을 채우고 있다. 다음 문단을 보면, 이것이 과연 '진보 논객' 홍세화의 글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될 지경이다. 다소 길게 인용해보자.

두 소녀는 특별한 아이들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대상이 보기 좋아야 하는 사회 환경,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을 뿐이다. 요리도 우선 보기 좋아야 구미를 돋운다. 구운 고기에 야채를 곁들이면서 색깔을 맞춘다. 그래서 요리사는 '접시 위에 맛이라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포도주를 따를 때 잔을 끝까지 채우면 안 된다. 반 정도에서 7분의 4쯤 따라야 한다. 포도주로 포도주잔을 황금 분할하는 것이다. 독자는 이 정도 채운 포도주잔과 꽉 채운 포도주잔을 놓고 한번 비교해 보기 바란다. 촛불 아래에서 비교하면 더욱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곧 먹고 마셔 없어질 대상(오브제)에 대해서도 그렇게 신경을 쓰고 있으니, 사는 집의 내부 장식이나 가구, 입는 옷 그리고 몸의 선(線)에 이르기까지 항상 보는 것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83쪽)

홍세화가 프랑스에서 불필요하게 더 보낸 10여 년의 시간동안, 한국 사회는 그를 배제한 채 민주화와 경제성장의 길을 걷고 있었다. 직선제 쟁취라는 가시적 목표를 달성한 한국 사회는 두툼해진 지갑을 들고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홍세화는 파리에 있었다. 문화와 예술의 도시, 고등학생도 한국의 대학원생보다 철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나라. "무대가 파리였다는 것도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예컨대 '나는 베를린의 택시운전사'나 '나는 도쿄의 택시운전사'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금방 알 수 있다"(같은 책, 6쪽)고 홍세화는 허허롭게 인정한다. 물론 그도 어쩔 수 없이 살게 된 파리를 어느 정도는 사랑했을 것이지만, 파리에 가보지 못한 한국 사람들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맹목적인, 가닿을 수 없는 어딘가를 향한 동경과 사랑이, "빠리의 택시운전사"에게 묘한 낭만적 떨림을 제공했다.

6.

그게 없었더라면 똘레랑스가 오늘날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개념으로 정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독일 유학생이었던 진중권이 그저 '독일식 사민주의'라는 밋밋한 개념을 가져다 쓸 수밖에 없었던 반면, 문학과 예술과 낭만의 도시인 파리에서 온 정치적 개념은 달랐다. 그것은 발음할 때부터 아름다웠고, (얼마나 실질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수용되었는지와는 별개로) 국내에서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홍세화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물론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나에게 부정적인 즐거움만 주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똘레랑스'가 국내에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토론 주제가 되었던 일은 나에게 더없는 즐거움을 주었다. '관용(寬容)'이라는 말이 예전에 비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는 소식도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었고, 국내 어디엔가에 '똘레랑스'라는 이름의 찻집이 생겼다는 얘기조차도 나에겐 즐거움이었다. 글을 쓴 사람에게 그런 일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을 것이다. (같은 책, 7쪽)

'똘레랑스'라는 이름의 찻집이 생겼다. 이보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불러일으킨 반향을 잘 보여주는 사건도 없을 것 같다. 즉 홍세화의 책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는 결코 들어올 수 없는 망명객이라는 사실이 그에게 더 큰 후광을 부여해주었다. 게다가 그가 소개하고 있는 내용들은 이전의 운동권들이 말하던 그런 것들과는 전혀 달랐다. 프랑스인들의 생활, 파업 노동자들과의 자연스러운 연대, 아직도 다 사라지지 않은 인종차별에 대한 단호한 공적 제제. 이 모든 것들은 이전의 운동권들의 그것처럼 구질구질하거나 목숨을 걸거나 울부짖는 것이 아니었다. 아름답고 깔끔했고 울림이 깊었다.
 

▲ 격월간지 <말과활> 창간호를 준비 중인 홍세화. ⓒ프레시안(최형락)


홍세화는 기존의 운동권적 논리에서 한 발 벗어났지만, 여전히 세상을 향해 발언하고 대중들을 설득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두 개의 거울"이 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현재를 살며 한국의 과거를 반추하던 그에게, 그 두 이미지는 서로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고, 대체로 후자가 전자에 비추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홍세화에게 있어서 "프랑스 사회는 내가 바라보기만 할 뿐 들어갈 수 없는 거울"이었고, "고마움과 부러움의 대상은 될지언정 비판 대상이 되지 않는"(<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18쪽)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두 사회를 동시에 보며, 그 중 '내 자식'인 한국을 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국 사회를 바라보기 위해 프랑스 사회를 거울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그가 도입한 최고의 히트상품인 '똘레랑스'에 중대한 수정이 가해졌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초판에 딸린 부록인 "프랑스 사회의 똘레랑스"에는 등장하지 않는, "앵똘레랑스"가 주요 개념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다.

7.

이처럼 두 개의 거울,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과 프랑스 사회라는 거울은 나에게 악역을 맡을 것을 요구한다. 그 위에 외유에는 내강이 전제되어야 하듯이, 똘레랑스의 온화함은 앵똘레랑스에 대한 단호한 앵똘레랑스가 전제되어야 한다. 단호하지 않을 때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일상 속에서 무뎌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악역자의 칼날을 일상적으로 벼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꼭 악역의 칼날로 비쳐지지 않을 것이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20쪽)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위 인용문에서 말하는 '앵똘레랑스'는 대부분의 경우 <조선일보>를 지시한다. 그가 '앵똘레랑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또 다른 예시를 찾아보면 그렇다. <조선일보> 기자 이한우를 상대로, 그가 강준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때 사용한 어구를 그대로 들려주며, "나를 고소하라!"고 외친 칼럼을 설명하는 글에서, 홍세화는 자신이 그런 점잖지 못한 소리를 하게 된 연원에 대해 논한다. 길게 인용해볼 가치가 있다.

나는 <한겨레> 칼럼 '빨간신호등'에 <조선일보> 기자를 향하여 '나를 고소하라!'고 썼다. 스스로 생각해도 도발적인 언사임에 틀림없다. 마조히스트가 아니라면, 그리고 점잖은(?) 사람이라면 함부로 꺼낼 소리가 아니다. 실상 내 성격과도 맞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나와 다른 남의 생각을 다른 그대로 용인하라는 똘레랑스를 무척이나 강조해 왔다. 그러나 똘레랑스가 앵똘레랑스까지 용인해 버리면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즉 똘레랑스의 부드러움은 앵똘레랑스에 대한 단호한 반대를 요구하는 것이다. 근대사상사에서 보더라도 로크나 볼테르, 루소 등 똘레랑스를 강조했던 사람들일수록 앵똘레랑스와 과감하게 싸웠다. <조선일보> 기자는 앵똘레랑스를 부추기는 행위를 저질렀다. 한국 사회에서 사상 검증이란 행위, 즉 '당신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드러내놓고 주장하건, 그와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건, 빨갱이로 몰아가기 위한 행위임이 틀림없고 그것은 앵똘레랑스의 전형이다. 나의 "나를 고소하라!"에는 티끌만큼의 지나침도 없다. (같은 책, 100쪽)

조선일보의 이한우 기자가 최장집 교수를 빨갱이로 몰기 위해 그의 논문을 임의적으로 인용하고, 그 점을 비판하는 강준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것 등은 모두 '똘레랑스'와 거리가 있는 행동이다. 설령 최장집이 진짜 '빨갱이'라 하더라도, 마치 드골이 사르트르를 두고 "그도 프랑스야"라고 관용하였듯이, 그렇게 똘레랑스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조선일보>는 국가기관 등이 아니지만 명백히 사회 권력이므로, "똘레랑스는 개인이 권력에 요구하는 것이지 권력이 개인이나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302쪽)닌 만큼, 한 개인으로서 홍세화는 <조선일보>와 그 구성원인 이한우를 향해 똘레랑스를 요구할 수 있다.
 

▲ <발자국을 포개다>(박노자·이선옥·홍세화·김소연 지음, 꾸리에 펴냄). ⓒ꾸리에

문제는 그 과정에서 그들을 '앵똘레랑스'로 규정짓고 나면, 정치적으로 가능한 선택지가 오직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는 데 있다. "똘레랑스가 앵똘레랑스까지 용인해 버리면 자기모순에 빠지"지만, 그 정의상 똘레랑스라는 것 자체가 권력이 개인에게 허용하는 것이지 개인이 권력에게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즉 일개 개인인 홍세화나 노정태 같은 이에게는, 가령 <조선일보>나 박근혜 정부 같은 권력을 '똘레랑스'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요컨대 그가 말하는 '똘레랑스' 세력이 '앵똘레랑스' 세력의 개과천선을 이끌어내고 그들마저도 똘레랑스로 감싸주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권력이 커야 한다. 이쪽이 저쪽보다 힘이 없고 세력이 약한데, 누가 누구를 관용하고 용인한다는 말인가? '앵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해야 한다'고 홍세화가 외칠 때, 그것은 그가 소개한 본래적 맥락의 똘레랑스와는 다소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힘이 없는 자가 힘이 있는 자를 어떻게 봐주고 참아주고 용납해준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똘레랑스'론이 오직 '똘레랑스'만으로 구성될 때와 달리, '앵똘레랑스'라는 대립항이 끼어들기 시작하면, 이것은 단순한 사회비평의 차원을 넘어서게 된다. 적, 혹은 상대방을 적시하기 위한 개념으로서 앵똘레랑스가 도입되는 것이며, 그 앵똘레랑스 세력을 넘어서 서로가 서로를 똘레랑스할 수 있을만한 여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일종의 투쟁론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똘레랑스 세력도 앵똘레랑스 세력에 대하여는 앵똘레랑스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같은 책, 127쪽)는 결론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회창을 떨어뜨리고, <조선일보>를 끊고, 이문열의 책을 반납하거나 장례식을 치르는 것 등이 바로 그 "앵똘레랑스로 대응"하는 실천의 구체적 내용이 될 것이었다.

8.

이 논리는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거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졌다. 물론 홍세화는 대부분의 진보정당 당원들보다 열성적으로, 그의 표현대로라면 '사병'으로서 진보정당을 홍보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일에 앞장서왔다. 진보정당의 당원 혹은 지지자들 가운데, "가령 추석에 고향을 찾은 기회에 당 선전을 하는 당원은 얼마나 될까?"(같은 책, 233쪽) 같은 질문에 떳떳하게 '나는 한다'고 대답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홍세화는 늘 그렇게 해왔다.

하지만 그가 특정 국면의 특정 갈등들을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의 투쟁'으로 정의한 순간, 많은 것이 기울어졌다. 장 마리 르펜을 떨어뜨리기 위해 "공화국을 지키자"고 외쳤던 프랑스 좌파 청년들의 예를 들어, 그는 이른바 '보수 정당'과 '보수 정치인'의 차이를 구분하고 그 속에서 좀 더 지지되어야 할 누군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 곳곳에 극우-수구 세력이 헤게모니와 물적 토대를 움켜 쥐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혹시 헌법 제1조가 보장하고 있는 공화주의에 대해 천착하지도 않은 채 사회민주주의를 뛰어넘자고 외치면서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신자유주의자라는 점에서 똑같다고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경쟁 대상과 극복 대상을 구분할 줄은 알아야 한다. (같은 책, 253쪽)

당시의 한나라당은 '극복 대상'이지만, 당시의 민주당은 '경쟁 대상'이라는 함의가 깔려있는 이 문장을 읽고, 홍세화를 좋아하지만 진보정당을 지지하지는 않는 수많은 독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그렇지, 나와 내가 지지하는 후보는 '앵똘레랑스'가 아니지. 하지만 저 앵똘레랑스 세력을 끌어내리기 위해 우리는 일단 서로 뭉쳐야 하는 거지. 그런데 그 지지자의 눈에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신자유주의자라는 점에서 똑같다고 부정하고 있는" 누군가가 보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가 똘레랑스고 저들이 앵똘레랑스인데, 똘레랑스인 나를 똘레랑스하지 않는 이 '좌빨'들은, 결국에는 앵똘레랑스 아닐까?
 

▲ <불온한 교사 양성과정>(이상대 ·이계삼· 홍세화 등 지음, 교육공동체벗 펴냄). ⓒ교육공동체벗

앵똘레랑스를 우선 철저하게 앵똘레랑스해야 한다는 홍세화의 논리는, 그의 바람과 달리 영원히 끝나지 않는 앵똘레랑스를 향한 똘레랑스님들의 마니교도적 투쟁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논리적으로 볼 때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 사이에 제3의 개념은 성립할 수가 없다. A와 not A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특정 정당, 혹은 정치세력을 앵똘레랑스라고 지목한다면, 그 순간 제3당이 설 자리 또한 없어진다.

물론 그런 식으로 선거에서 한 번 이길 수는 있지만, '앵똘레랑스 정당'을 지지하는 '앵똘레랑스 국민'들까지 마치 프랑스의 구교도들이 신교도를 학살하듯 앵똘레랑스 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결국 이 영원한 순환 고리는 끝나지 않는다. 척탄병 홍세화는 묵묵히 적진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있었지만, 진보정당의 입장에서 볼 때, 작전장교 홍세화는 "경쟁 대상"인 영원한 우방이 지목하는 목표를 향해 끝없이 아군 병사들을 소모시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9.

두산중공업에 재직 중이던 파업노동자 배달호 씨가 분신자살했다. 2003년 1월 9일의 일이었다. 당시 노무현은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취임하기 전부터, 앵똘레랑스에 맞서기 위해서는 앵똘레랑스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던 홍세화는, 자신이 만들어낸 논리를 그에게 들이대는 한때의 독자들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후회는 크고 비판은 깊었지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후 홍세화의 칼럼의 비판은 전부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향했다.

하지만 "경쟁 대상"들은 진보정당을 자신들은 똘레랑스하겠다고, 진보정당이 지향하는 정치와 공정한 경쟁을 하겠다고 말하며 얻어갔던 지지를, 돌려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세화는 "반민주세력이 득세하는 것보다는 민주 건달들이 득세하는 편이 수백 배 낫다. 역사 진보의 발자취로 보더라도 '민주 건달'들도 한 자리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생각의 좌표>, 235쪽)는 입장을 바꾸지는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8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의 쌍두마차가 된 심상정과 노회찬 두 사람이 모두 의석을 잃었다. 홍세화는 그들이 고배를 마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계급 배반 투표에 있다"고 생각했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끝까지 인식하지 못한 채 그 의식을 계속 고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같은 책, 92쪽)을 그는 힘주어 강조했다.

여기서 우리는 비단 그가 말하는 것처럼 진보정당을 찍지 않는 가난한 사람뿐 아니라, 그런 이들의 존재와 의식의 괴리를 지적하는 홍세화 자신에 대해서도 물음표를 던져볼 수 있다. "한나라당이 변하지 않은 채 주류 정당으로 남고 조중동이 주류 신문으로 남아 있는 한, 사회주의든 사민주의든 그 언저리에도 다다를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에겐 '사민주의 대 사회주의 논쟁'보다 "어떻게 하면 한나라당과 '조중동', 뉴라이트의 영향력을 줄일 것인가"와 같은 물음이 훨씬 더 중요하다"(같은 책, 181쪽)는 논리는 필연적으로 진보정당의 성장을 가로막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진보정당의 입당 원서를 돌리는 평당원이었으며, 2011년이 되자, 아무도 나서지 않는 자리에서 손을 들어 결국 진보신당의 당대표를 역임했다.

10.
 

▲ <임박한 파국>(임민욱·이택광·홍세화 지음, 꾸리에 펴냄). ⓒ꾸리에

존재와 완전히 포개지는 의식이라면, 그 의식에는 의식으로서의 고유성이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의식과 완전히 포개지는 존재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신뿐이다. 모든 제한된 피조물은 제한된 조건 속에서 존재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가령 '무한' 등을 생각할 수는 있지만 스스로의 존재로 구현할 수는 없다. 의식과 존재는 서로를 배반하게 되어 있다. 그 현상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서로를 어떻게 배반하고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면밀하게 관찰해야 할 필요가 생기는 것은 그래서이다.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홍세화의 의식은 한국에 있었고 그의 존재는 파리에 머물렀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후, 뒤늦게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음을 깨닫고 조국에 발을 디뎠을 때, 그의 존재는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사람들은 홍세화의 의식이 계속 파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 입당 원서를 돌리고 당 기관지의 정기구독자를 모으는 홍세화는 실천하고 발로 뛰는 모범적인 진보정당 당원이었지만, 책상 앞에 앉은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똘레랑스와 엥똘레랑스의 끝날 수 없는 전쟁에 참전하라는 홍보 문구를 작성하고 있었다. 남민전의 전사는 파리의 택시운전사가 되었지만, 파리의 택시운전사 역시 삐라를 뿌리기 위해 애드벌룬을 조심스럽게 나르던 그때의 삶을 여전히 살고 있기도 했다.

어떤 모순은 사람과 사람들의 집단을 고양시킨다. 반면 어떤 모순은 반대의 효과를 낳아, 개인과 집단을 몰락시킨다. 홍세화라는 개인이 품고 있던 그 모순은, 결과적으로 볼 때 홍세화라는 한 사람을 한 차원 다른 경지로 드높였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고 감동하는 독자들이 모여 있던 진보정당운동은 그렇지 못했다. 의식과 존재의 분열은 다시 합쳐지면서 새로운 테제를 낳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약 우리가 앵똘레랑스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단 하나의 적을 굳이 꼽자면 바로 그것이다. 의식과 존재의 분열, 갈등, 대립, 모순을 해결하지 않은 채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어하는 나 자신,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 말이다. 그렇게 썰물이 빠진 자리에서 어쩌면 우리는, 젊은 날의 홍세화가 그러하였듯이, 향후의 고난과 시련을 짊어지고 갈 수 있게 해줄 자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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