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다 모(한국명 문영임), 세월피스링(SPRing) 세계시민연대 미국 인디아나폴리스 대표.
세월호 참사 규명, 평화협정 체결, 조선학교 돕기 등 해외동포로서 하나된 조국을 위해 활동하며 통일 코리아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재미평화활동가. 2020년 11월 5일부터 12월 10일까지 한 달 남짓 2주 자가격리 기간을 감수하고 고국을 방문한 기간 중 11월 25일 AOK한국 이기묘 상임대표와 황해 연백이 고향인 이산가족 1세대 최종대 선생과 강화 교동도를 방문한 소감을 기고한다.


어느 날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꽃가마를 메고 집을 떠나고, 어머니는 울면서 그들을 따라 집을 나가셨다. 울기만 하시는 어머니가 이상했는데 나를 붙잡고 있던 사람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어릴 적 집에는 큰 호랑이가 새끼들과 쉬는 모습의 그림이 걸려 있었고, 안경을 끼신 멋쟁이 아버지의 사진이 걸린 상에는 매일 젯밥이 놓이고 향이 피워졌다.

빨간 줄이 쳐진 두꺼운 공책에는 형제들의 출생에 관한 메모며, 짧은 글들이 남아 있었다. 낡은 표지의 그 노트는 전도용 작은 성경과 함께 다락방에 올라가 한 번씩 들춰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아버지의 기억이다. 술을 드시기만 하면 가족들을 못살게 굴었다는 큰 오빠와 언니의 말끝에는 항상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우리가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술주정과 매타작에 어릴 적부터 도망 다녔다는 오빠와 언니의 추억담은 아버지 기일에 빠지지 않는 웃음거리였다. 그렇게 술에 의지하시던 아버지는 어느 날 버스에서 체포되어 끝내 감옥에서 위염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가족사처럼 전쟁 중에 미군의 흥남 철수를 따라 큰 아들과 함께 피난 오신 후에 돌아가지 못한 고향과 부모형제를 그리워하시며 술을 드셨고, 그 술주정은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을 싸잡아 욕하는 것으로 끝나곤 했단다. 그 버릇이 어느 날 버스 안에서 벌어져 그 자리에서 끌려가서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이 몇 줄 안 되는 아버지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 돌아가시던 때의 아버지 연세에 내가 가까워지면서야 겨우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나는 우리나라 분단에 의해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분단이 원인이 된 뿌리깊은 조국의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집중하게 되었다.

교동도의 은행나무 앞에 선 교동 방문자 일행. 앉아있는 사람이 최종대 선생. [자료사진 - 린다 모]
교동도의 은행나무 앞에 선 교동 방문자 일행. 앉아있는 사람이 최종대 선생. [자료사진 - 린다 모]

AOK(Action One Korea)의 대화방에 올라오는 수많은 활동과 행사들, 회원들 간에 나누는 정치 사안에 대한 나눔들 속에서 최종대 선생의 고향과 가족이야기를 읽었다.

짧은 일정으로 급하게 고국에 들어온 방문기간 동안 코로나 방역수칙에 의한 2주 격리가 끝나갈 무렵, OK한국 이기묘 대표가 최종대 선생을 모시고 고향 연백이 보이는 강화도 교동을 방문하신다는 글을 읽고 동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기묘 대표 또한 아버님께서 살아계셨다면 최종대 선생처럼 자신이 돌아가지 못한 고향의 땅을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었으리라 짐작했다. 또한 국가적인 행사를 위해 만들어 놓은 시설이 아니라 남쪽에서 가장 가깝게 북쪽을 볼 수 있는 장소라는 말에 흥미가 더해졌다.

강화대교를 건너 교동 고속도로를 달렸다. 분단에 대한 한 치의 아쉬움도 없는 듯 바다를 가르는 넓은 고속도로는 발전된 모습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 뉴스에 놀라 해외에서 유가족을 지지하며 동행하는 마음으로 인디애나폴리스(미국 인디아나주, 시카고에서 자동차로 4-5시간 거리의 도시)에서 시민운동을 시작한 나는 우리나라 모든 문제의 원인이 분단과 외세에 의해 막힌 단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최종대 선생을 모시고 나타난 AOK한국 이기묘 대표의 차를 타고 교동에서 바다 건너편 최종대 선생의 고향이 가장 가깝게 보이는 곳에서 내렸다.

연백과 교동 사이의 지도. [사진 - 린다 모]
연백과 교동 사이의 지도. [사진 - 린다 모]

남쪽에서는 가장 북쪽이 가깝다는 강화도 교동 무학리, 무학리에서 바라보면 바다 건너 황해도 연백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각각 수령 천년에 가까운 은행나무가 연백에는 숫나무가, 무학리에는 암나무가 서로 꽃가루를 나누어 무학리 은행나무 밑둥엔 은행이 빼곡하다.

연백이 고향이신 최종대 선생의 이야기는 이 유서 깊은 은행나무에서부터 시작된다. 각각의 나무가 연백과 교동으로 넘나들며 주위의 섬들에도 은행나무를 옮겼다고 한다. 전쟁으로 밑둥이 불탔지만 그곳에서 다시 싹이 나서 나무의 둘레는 보통 나무의 서너배는 넘는다.

오래전에는 이 나무의 지아비 나무가 연백에 있다는 안내문이 있었다는데 왜 삭제되었는지 모르겠다. 통일을 국가사업으로 내세우면서 나라 곳곳에 남아 있어야 할 북쪽과 관계된 이야기와 자취를 지우기에 급급한 정권들의 본심이 부끄럽다.

수년 전보다 더 단단하게 세워졌다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우린 두고 온 고향의 땅을 하루속히 가보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소리쳐 통일을 외쳤다.

은행나무 제사. [사진 - 린다 모]
은행나무 제사. [사진 - 린다 모]

바닷물이 넘어오면 일년 농사를 망치게 되는 천수답, 이전에는 아예 물이 없어서 농사지을 땅이 없었다는 무학리...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 건너 연백에서 일자리를 얻고, 쌀을 얻어 와서 살았다는 무학리 사람들이다.

전쟁으로 급하게 연백에서 교동으로 피난 와서 어린 나이에 술 배달을 하면서 교동 곳곳을 다니셨다는 최종대 선생은 85세의 연세에도 갈 수 없는 눈앞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헤아릴 수도 없이 서울에서 교동을 다니신다며 초행으로 따라간 우리에게 남북 간의 자유왕래, 통일이 얼마나 절실한지 설명해 주기에 지칠 줄을 모르신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옛 천수답. [사진 - 린다 모]
바닷물이 드나들던 옛 천수답. [사진 - 린다 모]
교동에서 주위의 섬들로 배가 다녔던 월선포. [사진 - 린다 모]
교동에서 주위의 섬들로 배가 다녔던 월선포. [사진 - 린다 모]
피난 직후의 교동의 모습을 설명하시는 최종대 선생. [사진 - 린다 모]
피난 직후의 교동의 모습을 설명하시는 최종대 선생. [사진 - 린다 모]

연백에서 급하게 피난 온 사람들이 끝내 돌아가지 못하고 연백으로 돌아가기에 가장 가까운 무학리에서 고향의 시장을 재현한 무학리 대룡시장은 좁은 골목을 따라서 마치 70년 전으로 온 듯한, 시간을 거슬러보는 추억의 가게들이 옹기종기 남아있었다.

최종대 선생이 처음 방을 얻어 사셨다는 집도, 학교도, 술도가도 그대로 기억하시며 들어간 길목에서 만난 최종대 선생의 연백 고향동기인 임용순 선생은 헤어진지 30년만에 조카를 우연히 만났다. 이젠 외삼촌도 조카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버렸지만 그들의 기억과 이야기는 어린 시절 그대로다.

60년 전의 시장풍경. [사진 - 린다 모]
60년 전의 시장풍경. [사진 - 린다 모]
30년만에 만난 조카와 외삼촌. [사진 - 린다 모]
30년만에 만난 조카와 외삼촌. [사진 - 린다 모]

이렇게 한 하늘에서 생사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두 어른의 만남은 순식간에 시장통에 기쁜 소식이 되어 활기를 띄며 금방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축하해 준다. 우리 모두의 깊은 내심에 헤어진 가족이 있다는 것에 대한 애틋함과 미안함, 하루빨리 만나야 한다는 기대감이 연백과 교동을 둘러싼 바다만큼 깊고 넓게 잠재워져 있다.

휴전선으로 분단된 고향... 이렇게 눈으로 보고 듣기도 안타까운 사연을 70여년 세월동안 가슴에 묻고 수없이 교동을 다니셨다는 최종대 선생이 어머님을 못 잊어 얼마 전 작성하셨다는 모친에게 띄우는 편지. 한 줄 한 줄 읽어 볼수록 가슴이 먹먹해진다. 분단으로 생이별을 당해 한 평생 가슴에 멍이 들어있는 가족들의 마음에 작은 위로를 보낸다.

바다 건너 보이는 북녘의 섬들. [사진 - 린다 모]
바다 건너 보이는 북녘의 섬들. [사진 - 린다 모]

 

황해도 연백군 해성면에 계신 어머니께 띄우는 편지

불효자 최종대 올립니다. (황해 연백 이산 1세대)
 


어머니 저 불효자 최종대 인사올립니다.
오늘은 2020년 11월, 가을도 저물어가는 때입니다.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뵌 때가 1953년 정전회담 직전이었으니 68년이나 됩니다.
고향인 황해도 연백군 해성면 무릉리는 전쟁 전 38선 이남이었잖아요.
지금 교동도 무학리에서 서쪽으로 바로 보이는 곳이 해성면 무릉리에요.
38선이 그어졌을 때도 어머니와 같이 살던 고향인데, 휴전선을 그어서 못가게 만들었습니다.
그저 야속하고 죄송합니다.

전쟁이 나고도 저는 어머니 모시고 고향에 살았었지요
그러다가 1952년 정전회담이 진행되던 중이었어요.
고향 하늘엔 미군 폭격기가 포탄을 투하하고 바다에서는 연합군의 함포가 계속 포탄을 쏘는 상황이었으니, 너희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며 할아버지 할머니의 말씀에 따라 아버님과 큰 형님과 저 이렇게 셋이서만 고향 땅 바로 동쪽 교동도로 내려갔지요.

교동도로 피난은 갔지만 피난민은 많고 먹을 것이 없어서 어머니 계신 고향을 여러 번 찾아갔던 일 기억하시지요? 달이 없어 깜깜해진 저녁을 이용해서 배를 띄우고 고향을 찾아갔던 일 말이예요.
어머니는 보자마자 얼마나 배고팠냐며 먹을 것을 챙겨주시며, “여기 더 있다가 누구 눈에 띄면 위험하니 얼른 떠나라”는 할아버지 말씀을 듣고는 무거운 발길을 돌려 나오곤 했었어요.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외세가 자기들 마대로 들어와 우리를 갈라놓은 거잖아요.
우리가 잘못해서 분단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잘못해서 헤어진게 아닙니다.
그러면 헤어진 가족들 만나게 해주어야지요. 왜 제가 어머니를 만날 수 없었단 말인가요?
제가 어째서 할아버지, 할머니, 동생들을 만날 수 없다는 말인가요?
전쟁이 끝나면 곧 만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고향을 지척에 두고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지금도 고향이 보이는 지척인 교동도 무학리를 찾아 갑니다.
고향에 있을 때 연을 날리다 보면 날아가 떨어진 곳이 어딘 줄 아세요?
바로 무학리 산이였어요.
그곳에 가서 고향땅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울다가 돌아가기를 해 왔어요.

어머니,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드릴께요.
교동도 무학리에 1000년 넘은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암나무에요. 지금도 열매가 잔뜩 열려요.
거기 팻말에 뭐라고 써 있는지 아세요? 북에 있는 숫컷 은행나무에서 매년 꽃가루가 날아와 수정을 하니, 은행이 열리게 된다는 것이에요.
어머니, 우리 살던 고향집 뒤에 있던 은행나무가 생각났어요.
그 은행나무도 천년은 된 건데요 바로 그 나무가 숫나무였어요.
나무는 떨어져 있어도 서로 정을 나누고 사네요.
어머니 재미있게 들으셨어요?

교동도에 잠깐 살다가 저는 영등포로 갔어요.
제가 고향의 대동중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 전쟁을 맞았잖아요.
고향은 갈 수 없고 학교는 가야 할 것 같아서 영등포로 왔어요.
지금까지 영등포에서 살고 지냅니다.

교동도에 있는 동안 교동양조장에서 술배달을 하며 지내다 영등포 양평동으로 갔어요.
영등포로 가서 영도중학교 2학년에 다시 들어가 구두닦이도 하고 미군 하우스보이도 하며 영등포공고를 다녔어요.
영등포에서 그렇게 지내는데 아버지와 큰 형님이 찾아와 함께 지냈어요.
지금은 고향에서 함께 내려온 아버지와 큰 형님은 다 돌아가시고, 저와 제 가족들과 살고 있습니다.

북에 계신 어머님과 동생을 만나려고 이산가족 신청을 했으나 아무런 연락을 못 받아 한스럽기만 했죠.
뒤늦게 고향 해성면 소재 이산가족 중에서 어느 누가 상봉했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해 봤지만 연락이 안 닿았어요.
그저 죄송합니다.

어머니 한번이라도 뵐 수 없는 건가요?
단 한번도 연락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하는 채로 살아온 날 들.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어떻게 해서라도 고향의 누구든 단 한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어요.

(2020년 11월 8일 AOK한국 통일공감세미나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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