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기사 제목을 보면 말의 정신까지 찾을 겨를이 없다. 소통조차 어렵다. 국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면서 뜻 모를 외국어를 그대로 쓴 언론도 문제지만, 영어사전에도 없는 표어를 남발하는 공공기관의 책임도 크다. 국민 세금으로 벌인 사업인데, 국민들이 알기 힘든 말로 참여를 독려하는 경우도 많았다.
2019년 서울시 공공언어사용 실태 결과, 200개의 보도자료 중에서 외국어 남용으로 볼 수 있는 용어는 총 685개로, 조사 대상 전체 용어의 83%였다. 2020년 문화체육관광부는 외국어 표현 3500개를 선정해 국민들의 이해 정도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 60% 이상이 이해하는 단어는 30.8%였다. 70세 이상은 6.9%만 이해했다.
[백기완] 빈 땅에 콩을 심듯 한 글자, 한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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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선생님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원고지와 안경 |
ⓒ 김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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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선발 이야기>의 맨 첫 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백기완 선생님은 '글쓴이의 한마디'에 순우리말로 책을 펴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이 이야기엔 한자어와 영어를 한마디도 안 쓴 까닭이 있다. 그 옛날 글을 모르던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 니나(민중)들은 제 뜻을 내둘(표현)할 때 먼 나라 사람들의 낱말을 썼을까. 마띵쇠(결코) 안 썼으니 나도 그 뜻을 따른 것뿐이니 우리 낱말이라 어렵다고 하지 마시고 찬찬히 한 글자 한 글자 빈 땅에 콩을 심듯 새겨서 읽어주시면 어떨까요.
민중들의 정서와 사상이 우리말(토박이말)과 함께 사라지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 있다. 이런 백 선생님은 스무 살이던 1951년에 부산 중앙일보에 "한국이 나은 수재 '매시간 영어단어 백자를 암송'"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났을 정도로 '영어 천재'였다. 이 때문에 '해외유학장려회'의 제1호 유학생으로 권유를 받기도 했지만, 거절했다.
그 뒤 서울 남산 및 후암동 산기슭에 천막을 쳐놓고 도시빈민운동을 벌이면서 '달동네 새뜸(소식)'이라는 소식지를 만들어 배포했다. 당시 '하꼬방'이 아니라 '달동네'라는 표현을 썼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새내기' '달동네' '모꼬지' '동아리' 등과 같은 우리말을 널리 퍼트린 공로를 인정받아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이 주관한 올해의 '우리말 으뜸 지킴이'로 선정되기도 했다.
최근 국립국어원이 만드는 새말은 백 선생님이 펴낸 '버선발 이야기'처럼 순도 100%의 토박이말이나 우리 고유어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적어도 공공언어는 국민들이 소통할 수 있는 어휘를 사용해야 한다는 취지다. 위에서 예로 들었던 공공기관과 언론매체의 외국어 표현을 국립국어원이 다듬은 '새말'로 한번 바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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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라면 우리말을 지키려고 일제 탄압에 맞섰던 구국의 결단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국립국어원이나 전국국어문화원연합회, 한글문화연대 등이 공무원과 기자들을 대신해 우리말을 다듬고 있다. 각 기관 누리집에 들어가서 확인할 약간의 시간과 품만 들이면 된다. 외국어를 배척하자는 게 아니라 최소화하면서 되도록 우리말로 고쳐 쓰자는 것이다.
'우리말 천태만상' 기획에 들어가며 백기완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린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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