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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살 티벳 스님이 양로원에서 살게 된 슬픈 사연

 

 

 
청전 스님 2013. 07. 22
조회수 618추천수 0
 

 

스물일곱 살 배기 체링 퓐촉 스님의 양로원 거주 사연

 

 

이곳 다람쌀라의 풍광이 좋은 곳에 자리한 티벳 난민 양노원이 있다. 물론 나이 들어 오갈 데가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거주 공동체인데 독일 불자들의 후원으로 운영된다. 최대 151 명이 거주할 수 있는 제법 현대식 장비를 갖춘 양로원이다. 필자가 가끔 들르는 곳인데 거의 무릎 통증, 즉 신경통 약을 처방하러 들른다. 우리나라 비타민 삐콤이 그리 좋은 효과를 보여준다.

 

지난번 티벳 초파일에도 양로원을 들렀는데 아직 한참 젊은 스님이 함께 사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농담으로 스님은 지금 나이가 여든 살인가 아흔 살인가를 물었다. 놀랍게도 앞을 못 보는 게 아닌가. 이야기를 나눈 후에서야 사정이 그랬었구나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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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링 퓐촉 스님, 올 스물일곱 살. 고향은 참도, 2007 년 인도에 망명.

뭐 인도에 사는 모든 티벳 사람은 망명객일진데 이 스님은 참 특이한 내력을 지녔다. 고향땅 참도는 티벳 동부로 중국 사천성과 맞닿는 그 옛날 유명했던 캄빠 게릴라들의 본거지이다. 필자가 1999년 겨울에 은밀히 들어갔다가 공안에게 잡혀 재판 받고 벌금 물고 군용 비행기를 타고 성도로 쫓겨난 곳이라서 나에게 생생히도 각인된 유별난 고을이기도 하다. 지금도 그 지역은 외국인 출입금지 구역이다. 그만큼 민감한 지역이다.

 

티벳 본토에 있는 티벳 사람들의 소원이라면 누구나가 죽기 전에 이곳 달라이 라마를 뵙는 것이다. 그들에게 달라이 라마는 해와 같이 소중하고 달과 같이 보배로운 여의주 보살인 것이다. 망명 54년이 지난 본토의 힘없는 사람들이 최소한의 자기 의지를 나타내는데 마지막 방법으로 분신을 택해왔다. 지난 3년 새에 이 글 쓰는 지금까지 118명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절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혼자서 죽는 비폭력의 마지막 자기표현의 방법으로써 이다.

 

이 스님도 달라이 라마를 보고 자유로운 공부를 하고픈 마음이 있지만 혼자서 감히 인도에까지는 용기가 선뜩 나지 않았다. 주위에서 누가 알도록 “나 인도로 망명 갈 건데 함께 갈사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몇 년을 벼르다가 은근이 뜻을 함께 하는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생사를 같이 하자는 사람이 막상 모여 보니 24명이나 되었다. 젖먹이 어린 아이를 가진 부부도 둘이나 되었다. 문제는 모르게 국경을 넘는 일이다. 합법적으로 여권을 만들어 정식으로 국경을 넘는다는 건 어림도 없다. 우리가 더러 매스컴을 통해 들어 알지만 히말라야 설산을 몰래 넘다가 중국 국경 수비대에 발각되면 무차별 사살인 것이다. 상의 끝에 멀지만 우회작전 즉, 티벳 서쪽 성산 카일라스 수미산을 참배 가는 순례객으로 가장하여 거기서 인도 땅으로 넘자는 뜻을 함께 했다.

 

일부러 겨울이 시작되는 눈 많고 추운 10월을 이동날짜로 잡는다. 알다시피 참도는 티벳 동쪽 끝이며 수미산은 티벳 최극단 서쪽이기에 도로상 거리만 해도 근 4000킬로가 넘는 거리다. 트럭을 한 대 수소문하여 수미산까지는 그런대로 어려움 없이 들어갔다. 그곳 수미산에서 네팔 쪽으로 넘어 올 수 있는 고개가 있고, 좀 험하지만 인도 쪽으로 넘어오는 고개가 있다. 그런데 좀 쉬운 네팔 쪽은 막말로 뜯기는 게 많다. 네팔 국경 군인이나 경찰을 만나면 꼼짝 못하고, 그들 요구를 들어줘야 넘어올 수가 있는 것이다. 즉 뇌물을 줘야 되는데, 만일 고분고분 안했다가는 되돌려 보내질 수도 있는 극한상황까지도 벌어진다.

 

드디어 인도 쪽 고개를 넘는 방법으로 밤에 이동을 시작했다. 다행히도 국경 군인이 눈치채지 않게 인도 쪽 설산고개를 넘기 시작했다. 이 날은 11 월 11 일로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날짜로 남아 있단다. 그런데 이튿날 뜻하지 않는 눈보라 폭풍을 만났다. 처음엔 이게 잘되는 일이라고 생각 했으니 중국 쪽 군인이 따라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행운으로 생각했다. 산악전문용어로 아발란취(Avalanche)라는 눈사태는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얼마나 험한 악천후인지를 모른다. 전문 산악인도 아발란취에서 목숨을 잃기도 하지 않는가. 이런 날씨가 이삼일이 아닌 엿새간이나 이어졌기에 꼼짝 못하고 그 자리에서 그 추위를 이겨내며 잠을 쫒으며 견뎌 냈다. 준비한 옷과 비닐로 몸을 감싸고 마른 음식으로 허기를 면했다. 용케도 어린 아이 둘이 얼어 죽지 않았다. 눈보라가 끝난 뒤 인도 쪽으로 걷고 걸어 설산을 넘는데 성공 했다. 몇 사람만 손발에 동상이 걸린 것 빼고는 천만다행으로 모두 무사히 넘어온 것이었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스물 네 명이 고스란히 망명에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며칠 후 부터 퓐촉 스님의 눈이 침침해오기 시작했다. 다람쌀라에 도착하여 우선 네렌캉(난민 수용소)에서 기거했다. 그 스님은 점점 앞이 안보여 오다가 찬디그라와 델리 큰 도시의 전문 안과 병원에 가서 검진을 했다. 똑같은 결과다. 이미 눈의 안쪽 신경이 다 죽은 것이다.

 

이후 티벳에서 갓 넘어온 사람들의 달라이 라마 단체알현이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하늘같은 달라이 라마, 그러나 앞이 안 보이는 것이다. 감히 우러러 볼 수도 없었던 달라이 라마께서 손수 손을 잡아주실 땐 그저 울기만 했단다. 존자님께서도 이런 상황을 아시고는 절에 있지 말고 바로 이 양노원에 거처하라는 말씀을 따라 지금까지 여기에서 노인들과 함께 살아간다. 사람으로서 가장 답답한 일이란 앞을 못 보는 장님으로 살아가는 것 일게다. 어쩔 건가.

 

그래도 본인은 법이 없는 중국에서보다 존자님 말씀을 직접 자기 귀로 듣는 행운을 기쁘게 알아차리며, 비록 남의 손을 빌려 도움 받지만 법당을 참배하고 왕궁 꼬라(탑돌이)를 할 수 있음에 기쁘게 생각한단다. 하긴 그리 멀지 않던 바로 이 시대에 이 보다 더 심한 신체장애를 극복하며 살다간 헬렌 켈러(1880~1968) 여사를 떠올리며, 우리 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생각해 본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얼마나 축복 받은 생인가, 그 얼마나 환희와 감사의 삶인가를 알아차려야 한다.

 

요즘 쉽게 삶을 포기해버리는 극단의 처사가 너무 많은 게 한국 땅이다. 존재 자체가 얼마나 큰 신비인가.

비록 앞을 못 보지만 체링 퓐촉 스님의 양노원 삶이 법의 희망으로 건강하고 기쁨의 나날이기를 기원한다. 우리에게는 이생을 바탕으로 한 내생이 이어지지 않는가.

 

2013 년 여름 우기 시작에서, 비구 청 전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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