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러시아에 경제제재를 가했을 때, 많은 이들은 석유와 가스공급 부족에 대해 걱정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세계 곡물 생산의 14%, 수출의 29%를 차지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됐다. 뒤이어 두 나라가 옥수수 수출의 17%, 밀 생산의 34%를 담당하며, 러시아가 세계 밀 수출 1위 국가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올해 곡물 시장에 경제제재로 막힌 러시아산과 함께 우크라이나산 곡물도 찾아보기 힘들다. 우크라이나산 곡물 90%가 흑해 항구를 통해 수출되는데 흑해 항구가 밀집된 크림반도와 돈바스지역이 전장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 제한이 장기화하면 중동과 아프리카는 물론 유럽의 일부 나라들까지 타격이 불가피하다. 밀 수입량의 80%를 우크라이나에 의존하는 레바논과 시리아, 리비아 등은 굶주림의 공포에 떨고 있는 상황이다. 러시아에 전체 밀 소비량의 60%를 의존하는 터키는 지난 3월 식량 물가가 70%나 올랐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부터 전체 밀 수입량의 80%를 의존하는 이집트도 비상이 걸렸다.
결국, 경제제재와 전쟁의 악영향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들 특히 식량자급률이 낮은 국가들에 식량 위기로 이어졌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식량 위기가 현실화하자 세계 인구 1/3에 해당하는 중국과 인도는 위기 상황을 대비해 식량 비축을 시작했다. 중국과 인도의 이런 식량 보호주의는 식량 위기를 가속화 한다.
미국의 비열한 제 살길 찾기
세계 식량 위기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않고, 러시아에 대한 제재도 계속할까?
미국이 식량 위기를 외면하는 데는 제 살길을 이미 마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호주 잡지 내셔널 리뷰(National Review)에 따르면 카길, 듀폰, 몬산토 등 미국의 다국적 농업회사가 우크라이나 농지의 28%를 사들였다. 젤렌스키 정부가 매각한 이 1,670만 헥타르는 그리스와 네덜란드를 합친 것과 맞먹는 크기이다.
우크라이나는 본래 민간부문의 농장 소유가 금지돼왔다. 그런데 2016년 외국인을 포함한 민간 투자자가 대규모 농지를 사들일 수 있도록 법의 빗장을 풀어 버렸다. 이어 IMF(국제투자금융)는 최근 우크라이나에 미국의 다국적 농업회사들의 원활한 곡물 생산을 위해 GMO(유전자 조작 작물) 재배 허용을 압박하고 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GMO라도) ‘농업생산을 늘려야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의존을 줄일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결국, 우크라이나 농지를 사들인 미국은 곡물 공급망 확보를 통해 식량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계산이다. 자신이 추진한 러시아제재와 전쟁 지속으로 세계가 처한 식량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잇속만 채우겠다는 것으로 읽힌다.
식량자급률 19.3%, 한국은 왜 천하태평일까?
라면 한 봉지는 14%, 국수 한 그릇 가격은 40%가 올랐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장기화하고 미국의 러시아제재가 계속되는 한 곡물 가격은 계속 오를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한국은 세계 7위의 곡물 수입국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2020년 기준 19.3%에 불과하다. 쉽게 말해 ‘하루 3끼 식사 중 2끼 이상은 국내산이 아닌 수입산’이라는 얘기다. 충분한 양의 곡물과 식량자원을 확보하는 것은 과거에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코로나 대유행 이전만 해도 곡물 확보와 관련해 ‘심각한 위기’라는 인식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2022년 현재,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연초부터 쉼 없이 치솟은 달러 환율, 고공행진 중인 원유가와 비료 가격, 농작물 생산원가 폭증, 코로나19 재확산과 일부 국가·지역의 봉쇄, 국제 운송가 급등이 겹치며 심각해진 공급망 훼손, 기존 농업국들의 빨라진 산업화와 라니냐 등 이상 기온이 불러온 경작지 축소 같은 이유들로 2022년 국제 곡물·식량 시장의 가격은 급등했고, 공급 부족이 현실화했다. 여기에 밀과 옥수수 등 주요 곡물의 세계 최대 생산지이자 수출국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곡물 수출이 제한되면서 국제 곡물 가격 폭등세에 기름을 끼얹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윤석열 정부는 “쌀값 인상이 물가 인상요인”이라는 한심한 소리만 되풀이하며, 식량 위기에 무대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식량주권을 회복할 대책을 찾는 것은 고사하고, 비료값 지원예산을 삭감하는 등 기존에 실시하던 농업 지원책마저 폐기해 버렸다.
식량대란은 요소수대란이나 시멘트대란 등에 비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21세기에 설마 먹을 것이 없어 걱정하겠냐는 안일함도 용납되어선 안 된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 식량주권 회복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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