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주목도 높은 사건서
법질서 변화보다 ‘안정’ 추구
법리 중시 ‘사법 보수주의자’
서민에 가혹한 판결도
법관이 내린 판결은 그가 어떤 시각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지 직·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미국 연방대법원 임신중지권 후퇴 사례에서 보듯 최고 법관 한 명의 의견이 그 사회의 시계를 반세기 전으로 돌려놓기도 한다.
윤석열 정부 첫 대법관 후보로 임명제청된 오석준(60·사법연수원 19기) 제주지방법원장은 법원 안팎에서 “법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법 보수주의자”로 통한다. <한겨레>는 오는 29일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오 후보자의 판결 성향을 분석했다. 최고 법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검증은 도덕성 외에 그가 내린 판결에 기초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오 후보자가 1993~2021년 선고한 주요 판결 70건에 대한 정성적 분석 결과 △사법 소극주의 △사법 보수주의 △문언주의 성향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 후보자는 1990년 판사로 임관해 32년간 각급 법원에서 재판을 담당한 정통 법관이다. 대법원 공보관과 제주지방법원장 등 사법행정 업무를 맡기도 했지만, 법관 경력 대부분을 법정에서 보내며 정치·경제적으로 민감한 사건은 물론, 국민 생활과 밀접한 사건을 두루 맡았다.
<한겨레>는 2011년부터 최고 법관인 헌법재판관 판결 성향을 분석해 온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이론적 분석틀에 기초해 오 후보자의 법 해석 관점, 가치관, 사회관 등을 분석했다. 이 분석틀은 헌법적 가치를 바탕으로 과거 판결·결정을 정성 평가해, 법관(재판관) 성향을 △사법 적극주의/소극주의 △사법 진보주의/보수주의 △문언주의/비문언주의 △사회·경제적 약자 및 소수자 권리 신장 여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청문회준비단에서 내세운 오 후보자 주요 판결, 언론보도 검색 등을 통해 확인한 주요 사건 판결을 표본으로 삼아 분석했다. 오 후보자는 판결로 법 질서에 변화를 주기보다 기존 법 질서를 유지(사법 보수주의)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또 기존 대법원 판례가 규정한 법리를 충실히 따르는 경향(사법 소극주의)과 법령 규정을 문언대로 엄격히 해석(문언주의)하는 태도를 보였다. 서울대 법대 출신 5060대 정통 법관들에게 나타나는 정체성을 지닌 셈이다. 그러면서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사건과 난민 인정 판결 등을 통해 사회적 약자 권익 신장에 적극적 성향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주목받은 판결이 있다. 오 후보자는 요금 800원을 횡령한 버스기사 해고는 정당하다고 본 반면, 사건 변호인으로부터 접대 받은 검사(면직)와 성매매를 한 국가정보원 직원(파면) 징계 수위가 가혹하다고 판결했다. 오 후보자는 각 사건별 규정된 징계규정을 근거로 상반된 판결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규정’에만 몰두해 일반 시민에게는 가혹한 잣대를, 엄격한 도덕성과 품위유지 의무가 요구되는 공직자에게는 오히려 느슨한 잣대를 적용했다는 비판이 따른다.
17년간 버스기사로 일한 ㄱ씨는 2010년 버스요금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모두 800원을 횡령한 이유로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노동위원회는 ㄱ씨 해고가 부당하다고 판단했지만, 회사가 불복해 소송을 냈다. 2011년 12월 재판장이었던 오 후보자는 △운전기사들이 받은 수익금을 전액 회사에 납부하리라는 신뢰 △요금 횡령은 해임 외 다른 징계가 없는 점 △요금 횡령시 어떠한 처벌을 받더라도 이의제기하지 않겠다고 ㄱ씨가 서약한 점 등을 해고 판단에 고려했다. ㄱ씨가 횡령한 금액 자체는 적지만 회사와의 신뢰관계가 깨졌고 단체협약 등 징계 규정에 따라 처벌한 것이라 정당하다는 취지였다.
반면 오 후보자는 2013년 2월 자신이 수사하는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로부터 유흥 접대를 받아 면직된 검사가 낸 징계 취소 소송에서는 “처분이 지나치게 무거워 가혹하다”며 면직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ㄴ검사는 2009년 성매매 등이 이뤄지는 유흥주점에서 4차례에 걸쳐 술값 등 85만원 상당의 향응을 수수했다는 이유로 2012년 면직됐다. 재판장이었던 오 후보자는 “비위행위가 가볍지 않다”면서도 “대검찰청 징계기준에 따르면 10만∼100만원 금품·향응수수의 경우 견책부터 정직까지 징계 처분을 할 수 있다. 다만 위법·부당행위 등을 참작해 가중·감경 할 수 있도록 했다. ㄴ검사가 제공받은 향응은 85만원에 불과하고 위법·부당한 행위를 했는지 자료가 없다”며 향응 검사 손을 들어줬다. 대검 징계규정에 비춰 면직 처분이 과중하다는 취지다.
오 후보자는 2011년 6월에도 피감기관으로부터 ‘성접대’를 받아 파면된 국가정보원 직원 ㄷ씨가 국정원장을 상대로 낸 불복 소송에서도 “파면은 가혹하다”고 판결했다. 국정원이 다른 직원의 성매매에 대해서는 품위손상을 이유로 강등 처분한 것에 견줘 ㄷ씨 파면은 과중하다는 이유에서다. 오 후보자 쪽은 “인사청문회에서 이 사건들을 판단한 기준 등에 대해 소상히 설명하겠다”고 했다.
오 후보자는 사회적 주목도가 높은 사건은 ‘사법 보수주의자’ 평판에 걸맞게 ‘법리’를 강조하는 판결 성향을 보였다. 지난해 1월 성추행 의혹 보도를 허위라고 반박했다가 무고 혐의로 기소된 정봉주 전 의원에게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 이익으로’라는 형사법 대원칙을 적용해 무죄 판결했다. 쟁점은 정 전 의원이 성추행을 하고도 허위로 기억에 반하는 언동을 했는지였다. 재판장이었던 오 후보자는 “그러한 내심의 의사가 있었는지 자료가 부족하다”고 했다.
2020년 11월 김성태 전 의원의 ‘딸 케이티(KT) 부정채용’ 사건에서는 1심 무죄를 뒤집고 항소심에서 유죄 판결했다. 오 후보자는 “김 전 의원과 함께 사는 딸에게 취업 기회를 제공한 것은 사회통념상 김 전 의원이 경제적인 이득을 취해 뇌물을 받은 것과 같다”고 판단했다. 2020년 5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별장 성접대’ 당사자인 건설업자 윤중천씨의 특수강간·사기·공갈미수 등 사건 재판에서는 공소시효 법리에 따라 성폭력 관련 혐의는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오 후보자는 판결문에서 “ 결과적으로 피해 여성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해 안타깝다”고 밝혔다.
2012년 6월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SSM) 6곳이 서울 강동구와 송파구를 상대로 낸 영업시간 제한 등 처분 취소 소송에서는 대형마트 쪽 손을 들어줬다. 대형마트 영업을 제한한 지방자치단체 조례가 상위법인 유통산업발전법에 반한다는 법리를 들었다.
오 후보자는 2020년 2월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을 맡았다. 그는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박근혜씨에게 징역 20년과 벌금 180억원을,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징역 18년에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이들의 일부 혐의는 무죄로 봐야 한다며 사건을 돌려보낸 취지를 반영해 내린 판결이다.
오 후보자는 또 같은 해 6월 보수단체에 수십억원을 불법 지원하도록 한 화이트리스트 사건 파기환송심에서도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징역 1년,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 판결 역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일부 혐의 무죄 취지 파기환송 판단을 따른 것이다.
오 후보자는 2011년 7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낸 인물의 친일재산 환수가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앞서 2010년 12월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가에게 도합 32년이 넘는 실형을 선고했던 김세완(1973년 사망) 판사의 행위는 “민족 구성원을 탄압한 친일행위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소설 <감자> 등을 쓴 문인 김동인을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결정한 처분은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신문 연재를 통해 학병·징병·징용을 선전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소설을 썼다는 이유에서다.
오 후보자는 2010년 6월 “태평양전쟁에 강제 동원된 피해자가 받지 못한 임금을 1엔당 2천원으로 환산하는 것은 위헌”이라며 당사자들이 신청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을 받아들였다. 1엔당 2천원이라는 환산비율은 정신적 손해를 고려하지 않았고, 물가·환율 상승에 비춰 적은 금액이라는 취지였다. 다만 헌재는 이후 이같은 환산비율에 대해 합헌 결정했다. 같은 시기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가 숨진 뒤 입양된 가족도 위로금 지급 대상자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오 후보자는 또 2011년 10월 한국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이란인(이슬람교도)과 반정부 시위로 경찰 수배 대상이 된 미얀마인에 대한 난민 인정 등 난민 보호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오 후보자와 함께 일했던 동료 법관들도 그의 사법보수주의 성향을 짚었다. 서울의 한 부장판사는 “사법 보수주의자로 대법원 판례와 법리를 중요하게 여긴다.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판결을 내기보다 법리에 충실한 편”이라고 했다. 오 후보자의 사법연수원 동기인 한 변호사는 “법원 내에서도 전형적인 정통 법관으로 꼽혀왔다. 연수원 시절에도 눈에 띄거나 도드라지는 주장을 내세우기 보다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대법관으로서 사회를 뒤집을 만한 참신한 판결보다 무난하게 법적 안정성에 기여할 수 있는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손현수 기자 boysoo@hani.co.kr 최민영 기자 mymy@hani.co.kr 전광준 기자 ligh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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