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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반도체 판매 제한하라” 미국, 선 넘은 한국 찍어 누르기

미중 패권 갈등 격화 속 거세지는 미국의 압박…윤 대통령의 단호한 선 긋기 필요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5월 20일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시찰을 마친 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연설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2022.05.20.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일정과 맞물려 미국이 또 한 차례 한국을 찍어 눌렀다. 한국 반도체 기업이 중국 내 판매 비중을 늘리지 못하도록 하라고 미국이 한국 정부에 촉구했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미국이 한국 정부를 통해 한국 기업을 통제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윤 대통령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회담에서 무리한 요구에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25일 업계에 따르면,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날 ‘미국, 중국이 마이크론 반도체 판매를 금지할 경우 한국이 부족분을 채우지 말라고 촉구(urge)’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중국이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의 중국 내 판매를 금지할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 내 부족분을 메우지 말 것을 백악관이 한국 대통령실에 요청했다는 내용이다.

마이크론에 대한 중국 조치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지난달 31일 중국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CAC)은 마이크론에 대한 안보 심사에 들어갔다. 당시 CAC는 안보 심사 이유에 대해 “국가 안보를 유지하고, 정보 인프라 보안을 보장하며, 제품 문제로 인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의 마이크론 심사는 미국의 대중 반도체 제재에 대한 보복성 조치로 풀이된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중국의 반도체 생산 기업에 대한 첨단 장비 판매를 금지했다. 지난달에는 미국 내 반도체 투자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골자로 하는 반도체법의 세부조항을 발표해, 보조금을 받는 기업의 중국 내 생산 확대를 제한하는 조건을 달았다. 중국을 반도체 공급망에서 배제하겠다는 의도다.

중국이 징벌적 조치를 할 경우 마이크론 타격이 전망된다. 스마트폰과 PC, 클라우드 서버에 탑재되는 D램을 주력으로 하는 마이크론은 지난해 308억달러(약 41조 1천억원)의 매출 가운데 25%를 중국과 홍콩에서 창출했다.

미국이 한국을 끌어들인 건 중국을 향한 경고로 풀이된다. 중국은 마이크론 반도체가 없어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부터 물량을 채우면 된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세계 D램 시장 점유율은 각각 45%, 28%로 총 73%에 달한다. 마이크론은 23%다. 역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를 공급하지 않으면, 중국은 전자 제품을 만들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미국은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한국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송명섭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전 세계 D램 시장에서 중국 점유율은 1% 수준에 불과하다”며 “미국이 반도체 장비 판매를 제한한 이후 계속 감소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한국 기업과 마이크론이 반도체를 팔지 않으면 중국은 IT 세트 제품을 못 만든다”며 “(미국 요청은) 마이크론 판매를 막으면 한국 기업을 움직여서 아예 공급을 막겠다는 메시지를 중국에 보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중국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전형적인 과학기술 괴롭힘 행태이며, 무역 보호주의 수법”이라면서 “결연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한미 간 역학 관계에 대해서는 “미국은 자신의 패권과 사익을 지키기 위해 강권적으로 디커플링(탈동조화)과 망 단절을 추진하고, 동맹국에 미국의 대중국 억제에 협조하라는 협박까지 불사한다”고 짚었다.

미국 요청을 받아들일 경우 한국 기업 피해가 크다. 삼성전자 중국 상하이 법인의 지난해 매출은 약 30조원으로 대부분 반도체다. SK하이닉스 D램 공장을 운영하는 중국 우시 법인은 10조원 정도다. 중국 판매 제한은 실적 악화로 이어진다. 미래에셋증권 김영건 연구원은 FT 보도 이후 낸 보고서에서 “금일 새벽,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한 미국의 대중 메모리 제재 동참 요구가 주가 측면 변동성을 야기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삼성전자 주가는 전날 0.7%, 이날 2.45% 하락했다. SK하이닉스도 같은 기간 2.13%, 1.95% 떨어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보도 내용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24일(현지시간) 워싱턴DC 인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해 공군 1호기에서 내리고 있다. 2023.04.25. ⓒ뉴시스

“말도 안 되는 일…윤 대통령, 단호히 선 그어야”

보도가 사실이라면, 의아한 지점이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마이크론 부족분을 메우지 못하도록 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부족분을 산정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중국이 한국 기업의 D램 물량을 늘린다고 가정할 때, 해당 물량이 마이크론 판매 금지에 따른 건지, 중국 경기 활성화에 따른 수요 증가 효과인지 구별할 수 없다. 또한, D램 거래는 기업 간 주문 방식으로도 이뤄지지만, 현물시장도 규모가 크다. 중국은 현물시장을 통해 외국으로 우회해 물량을 확보할 수 있다. 가령 대만 유통업자가 한국 기업 물량을 사들여 중국에 넘기는 방식이 가능하다. 현물시장 거래에서 최종 수요처를 확인하려면 미국이 건별로 조사를 해야 한다.

백악관이 대통령실에 ‘촉구’했다는 점도 의문을 남긴다. 한국 기업의 중국 판매를 제한할 근거 규정이 있다면 대통령실에 요청할 이유가 없다. 미국은 규정에 따라 조치하면 될 일이다. 미국이 한국 정부에 보여야 할 태도는 요청이 아니라 양해를 구하는 것이다. 이후 한국 정부가 기업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을 상대로 협상을 벌이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이번 미국 요청은 한국 정부가 미국 이익을 위해 한국 기업의 정상적인 영업 활동을 제한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일반적이지 않다.

중국 반도체 생산 기업에 대한 첨단 장비 판매를 금지할 때 미국은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을 적용했다. 미국 기술을 활용해 생산한 외국 기업 제품도 미국산으로 간주해,수출 시 상무부 허가를 받도록 했다. 이번 미국의 대중 반도체 판매 금지 요청이 FDPR을 근거로 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미국이 한국을 힘으로 누르는 형국이다. 마치 한국 정부를 맘대로 부릴 수 있는 하수인으로 여기는 태도다. 또한, 한국 기업은 한국 정부를 통해 자기 입맛대로 움직일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듯하다. 김양희 대구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FDPR 적용이 안 된다고 하면 중국 판매 여부는 한국 기업이 자율적으로 판단해야 할 영역”이라며 “미국 요청은 한국에 외압을 행사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고 말했다.

실현하기 어렵고, 방식도 뒤틀린 미국 요청을 두고 전문가들은 “무리하다”고 입을 모은다. 송 연구원은 “남의 나라 사기업 매출에 간섭하는 것”이라며 “과한 요구”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미국 요청과 별개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에서 계속 사업하는 건 중국의 기술 추격을 도와는 측면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장기적인 시야에서 전략적인 판단이 필요하다”면서도 “다만, 판단은 한국 기업이 알아서 할 일이지 미국이 관여할 일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오는 26일 바이든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윤 대통령의 단호한 입장 표명이 요구된다. 김 교수는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와 달리 정부가 민간 기업에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게 허용되는 나라가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얘기하고, 선을 지키라고 얘기해야 한다”며 “정부와 기업을 분리하지 않으면 미국에 대해서도 중국에 대해서도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고 경고했다. 송 연구원도 “미국 요청이 사실이라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말도 안 되는 것”이라며 “정부가 사기업에 중국 매출 제한을 요청한다고 하면, 굉장히 보기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의 종속적 외교 기조가 미국의 ‘선 넘는’ 요청을 야기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앞서 발표된 반도체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 한국 기업에 부담을 지우는 조치들이 잇따를 때도 기민하게 대처하거나 강력하게 항의해 성과를 얻어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미 입장이 대치되는 상황에서도 미국을 변호했다. 지난 8일 뉴욕타임스 보도를 통해, 미국 정보기관이 한국 외교·안보 고위 관계자들의 대화를 감청한 정황이 드러나자, 미국조차 도청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 가운데 대통령실은 “도·감청 의혹은 터무니없는 거짓 의혹”이라고 단정 지었다. 나아가 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지원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러시아와 중국을 자극했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전 국립외교원장)는 “한국 기업이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하면, 한국이 조건을 걸어야 하는데 미국에 계속 뒤통수를 맞고 있다”고 짚었다. 이어 “가령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세우면서 적어도 중국 공장 운영이 보장되도록 단서를 달았어야 했다”며 “정부가 중간에서 미국을 상대로 치열하게 협상해야 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일련의 상황을 보면, 미국은 자신들이 원하는 쪽으로 한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길들이기를 하는 것”이라며 “정부는 계속 끌려다녔고,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뒤집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조한무 기자 ” 응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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