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밋빛 전망의 조건
여기서 우리는 냉전구조가 뒤엎어지는 키신저의 화해시대를 되돌아봤다. 그 희한한 격변을 이해할 수 없었던 우리 한국은, 그로부터 근 20년 동안 고통을 겪은 다음에야 간신히 군인정치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우리 대한민국은 미국이 건국을 주도한 냉전국가로 출발한 나라다. 그동안 냉전체제가 기른 기득권 세력은 이제 포도넝쿨처럼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그런데 미중화해가 출현하여 새로운 양극 시대를 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동안 우리사회가 이런 글로벌 대변화를 인식하거나 수용할 토양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공이 곧 생존이었다. 거대한 글로벌 변혁에 부합하는 체제 조율은 결코 하루아침에 해결되는 과제가 아니다. 아직도 반공에 매달리는 경직성이 건재한 현실이다.
그러나 이제 냉전은 그리워해도 돌아오지 않는다. 냉전 기득권도 시드는 추세다. 이제 일극 냉전시대는 떠나가고, 미중 양극의 경쟁시대가 열리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세상은 변한다. 바이든과 시진핑은 만날 때마다, 우리에게 신호를 보낸다. ‘우리는 충돌이 아니고 경쟁’한다고 수없이 합창한다. 경쟁에는 협력과 대립이 공존한다. 다윈 같은 진화론자들은 ‘협력성 경쟁’으로 생물의 세계를 설명하지 않는가? 한국을 세 차례 방문한 미 국방장관 로이드 오스티도 ‘한국에 미중 양자택일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정한다. 국익 우선주의자인 키신저는, ‘하나는 친구, 또 하나는 적’이라는 이분법을 버려야 할 구시대 유물로 본다. 사석에서 만난 중국의 고위관료들도 ‘친미, 반미는 전략이 아니다’고 말한다. 이념을 버리고 실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같은 길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경은 이제 시작단계다. 장차 더욱 험난해질 건 명확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외의존도가 세계 최고 수준인 우리 한국이 그들 양대 시장을 중시하고 활용하는 일이 힘들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수많은 서방의 싱크탱크들과 전문가들은 한국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가? 한결같이 장밋빛으로 점친다(저출산 제외). 엊그제도 영국 경제경영연구소가 그런 밝은 전망을 내놨다. 헌팅턴도 시사한 바처럼, 우리 한국은 미중 사이, 동양과 서양 사이에 있는 문화적, 경제적 십자로다. 그들이 한국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들의 동아시아 항해에 필요한 나침판을 조정하기 위해서다.
실제, 미중 갈등이 고조 상태인 최근 2년을 제외하면(이 2년의 좌절을 잘 분석할 필요가 있다), 지난 40여 년 동안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 발전해온 나라에 속한다. 거기에 미중 양대 시장을 향한 우리의 전력 질주가 있다. 한미동맹을 외치는 동시에, 중국시장으로 달려간 것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서방 싱크탱크들은 장밋빛 한국의 미래를 놓고, 두 가지 조건과 한 가지 전제를 제시한다(골드만삭스, WB, IMF, ADB 등). 먼저, 조건은 북한과 중국에 대한 슬기로운 대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경제협력이든, 통일이든, 순조로운 남북한 관계가 한국 발전에 핵심이라고 말한다. 남북 분단은 아킬레스건이다. 더 이상 ‘반공’이 정치 카드여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한반도 통일에 대해서도, 10여 년 전부터 그들은 내다보고 있다. ‘독일식 흡수 방식’이 아닌, ‘홍콩식 대화 방식’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골드만삭스). 최근 중국 외교부는, 북미관계의 본질은 외교 문제라는 것과, 북한문제의 열쇠는 미국이 가지고 있다고 입장을 밝혔다. 반공을 내세운 윤석열 정부와 대립점이기도 하다.
다음은 중국시장 활용이다. 걸림돌은 많다. 기술발전과 ‘혐중’정리, 그리고 외교적 노력 등이다. 신뢰가 없는 시장은 의미가 없다. 최근 우리는 수출 1위 상대국인 중국시장이 위축되자 국내 경기가 식는 현실을 체감 중이다. 중국을 벗어나 ‘시장 다변화’를 주장하던 그 많은 사람들은 아무런 현실적 대안도 내놓지 못했다. 사기를 친 것인가?
이처럼, 남북한 관계와 중국시장, 두 가지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들 과제 못지않게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한미관계다. 세계제국 미국을 통하지 않은 북한, 중국 정책이 가능하겠는가?
헨리 키신저도, 폴 케네디도, 존 나이스 비트도, 또 다른 미국의 석학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한국 외교가 적극적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외교 역량을 준비해야 한다고... 중국시장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들이 조언하는 속뜻은 무엇일까? 백년제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백년제국과 신흥대국을 동시에 설득하라는 것이다. 단순한 반공 외교는 초라할 뿐이다.
지금은 결코 냉전시대가 아니다. 그들의 협력과 교류, 그중에서도 떠들썩한 반도체 전쟁을 보자. 미국은 반도체 산업에서 중국을 견제하면서도 중국시장 접근을 게을리 한 적이 없다. 미국 반도체협회는 ‘반중국’을 외치는 백악관 앞에서 주장한다. ‘중국이 세계 반도체 시장의 30% 이상인데, 우리는 손가락 빨고 있으란 말이냐?’ 앤비디아와 인텔, 마이크론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이 반도체에만 국한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백악관에서 중국과 곧 충돌할 것처럼 불어대는 미국 대외전략의 전통 수법인 ‘미치광이 전략’ 뒤에는 중국 투자에 열을 올리는 월 스트리트가 있음을 잊으면 곤란하다. 미국은 언제나 안전한 꽃놀이패를 추구하는 영리한 나라다. 그것이 미국의 ‘양면전략’이다(한광수 블로그).
이런 미국의 유연한 전략에 비한다면, 지금 우리 사회와 정부에 몰아치는 '혐중' 현상은 무사안일의 징표이자 '금지된 장난'인 셈이다(물론 서방의 '혐중' 공세와 보조를 같이하는 측면도 있다).
'혐중'의 현장 스케치 하나! 지금 우리 매스컴들은 미국경제는 밝고, 중국경제는 흔들린다고 외친다. 정말일까? 올해 미중 양국의 경제성장률을 보자. 미국이 2%, 중국은 5%로 추정된다. 그러면 성장률 1.4%인 한국경제는 뭐라고 해야 하나?
한광수 미래동아시아연구소 이사장 최근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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