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열 칼럼] 시즌2로 돌아온 '윤석열 정치', 그런데 김건희는요?
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24.01.20. 04:08:29
아이러니, irony. 초기 그리스 희극의 전형적인 인물 에이런(Eiron)에서 유래한 말이다. 약하지만 영악한 에이런은 그 반대의 전형적 인물로 등장하는 강하고 허풍이 센 알라존(alazon)에 번번이 승리한다. 문학적 장치로서 아이러니는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한 것과 반대의 일이 발생했을 때를 말한다. 이를테면 오이디프스가 숙명을 피하려 한 행동들이, 그 비극적 숙명을 완성시키게 되는 것처럼. 언어적 아이러니는 말장난에 가까울 수 있지만, 상황적 아이러니는 인간의 삶 자체에 내재한 불완전성을 폭로해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게도 한다. 영화 <기생충>은 아이러니로 점철된 훌륭한 스릴러 영화였다.
희극이나 비극에서, 등장 인물이 실제 상황과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앞으로 다가올 운명과 반대되는 무언가를 기대할 때, 그걸 지켜보는 관객은 '아이러니'를 느낀다. 관객의 기대와 등장인물의 행동 사이의 괴리가 클수록 아이러니는 더욱 강렬해진다.
정치는 때때로 연극의 무대와 같다. 유권자는 정치인의 행위를 보면서 좋아요를 누르거나, 싫어요를 눌러 극에 개입하는데, 간혹 이 극의 결말을 직감적으로 포착할 때가 있다. 그리하여 아이러니의 '빌드업'은 시작되고 관객은 운명의 소용돌이에 포획된 주인공의 행위를 평가하고 비판하고 걱정하며 이 난감한 현실 정치극의 결말을 숨죽이며 기다린다.
한동훈 비대위인가? 한동훈 선대위인가?
윤석열식 정치가 다시 돌아왔다. 앞선 시즌 1에서 윤석열 정치의 두 축은 비정치의 정치, 그리고 사정 기관이었다. 기성 정치와의 대립 구도를 만들어 여의도 문법을 파괴하는 무규칙 정치에, 검찰과 경찰, 감사원, 국민권익위 등을 총동원한 사정 정국 조성을 통해 정국을 운영해 왔다. 시즌2에서는 윤 대통령의 충직한 부하 출신인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등장한다. '무규칙 정치'에 세련미를 더했고, 문재인 정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 재수사, 문재인의 '전 사위' 비위 수사, 문재인의 배우자 김정숙 씨의 2018년 인도 타지마할 순방 의혹을 새로 들추기 시작했다. 물론 이미 '범죄자'로 규정한 야당 대표에 대한 수사와 재판은 그대로 간다.
문제는 '관객'들이 시즌2에서 결정적으로 달라진 환경을 포착했다는 점이다. 대통령 가족의 비리 의혹이다. 이 정치극의 주인공들은 달라진 여론지형 속에서 익숙한 역할극을 또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극은 절정(4월 총선)을 향해 가면서 긴장감 또한 고조되고 있는 중이다.
두 축 가운데 첫번째, 당의 상황을 보자. 여권 핵심부가 생각하는 '비상'의 의미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 체제가 출범한 직접적 이유는 지난 10월 재보선 패배 여파였고, 본질적 이유는 대통령 주도의 국정 운영이 유권자 기대에 못 미쳤다는 판단 때문이다. 한동훈호(號)가 야심차게 출항한지 20여일이 지난 지금, 배의 방향타는 기대한 목적지를 향하지 않는 것 같다. 비대위 출범 후 한 일이라곤, 한동훈 위원장의 전국 투어와 팬 미팅, 그리고 한동훈 위원장이 셀카 '찍는' 모습이 '찍힌' 액자 구조 같은 기이한 홍보.보도 사진들 뿐이다.
한동훈 위원장의 행보만 놓고 보면 국민의힘은 지금 '비상 상황'이라기보단, 대선 선대위 체제에 더 가깝다. 2012년 박근혜 비대위가 본격 출범하며 한 일은 대통령실의 당무 개입 차단과 정강정책 재정비, 당명 교체와 홍보 전략 수립이었다. 그러나 한동훈 비대위가 한 일은 대통령 가족 '방탄'과, 본인 인지도 쌓기, 그리고 대야 선전포고였다. 그의 첫 일성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릴 때, 곤란하고 싫었던 게 '나중에 뭐가 되고 싶으냐, 장래희망이 뭐냐'라는 학기초마다 반복되던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뭐가 되고 싶은게 없었거든요. 대신, 하고 싶은 게 참 많았습니다."
엄중한 비상 시기에 등판한 한 위원장은 본인이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다"는 개인적 추억을 회상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비록 소수당이지만 대선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하여 대통령을 보유한, 정책의 집행을 맡은 정부여당입니다"라며 자부심을 가지라 주문하고 "무기력 속에 안주하지 맙시다"라고 당의 '동료 시민들'을 독려한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그는 비대위원 섭외해 지도부를 꾸린지 3주만에 비대위원 한명을 마포을에 출마시켰다. 당 개혁의 칼자루를 쥔 사람들을 '공천 예비군'으로 만들어버렸고 비대위는 '공천 징검다리'로 격하됐다. 비상 시국이라며 비대위원들이 '공천 파티'를 하고 있으면, 수도권 험지에서 절치부심 밭을 갈아오던 '동료 당원들'은 잠자코 있을까? 벌써 당 내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비상 상황에서 기대되는 장면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지만, '정치 불신' 여론을 등에 업고 당내 '공정과 상식'을 무시하는 즉흥적 결단들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런 방식은 윤석열 대통령이 해 왔던 전형적인 정치 행태다. 토질이 바뀌었는데 파종법은 그대로다. 그리고 풍년을 기다린다. 윤석열식 '일상 정치'가 한동훈식 '비상 정치'로 대체됐는데, 대중들의 반응은 냉랭하다.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은 전주보다 1%포인트 내린 32%,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와 동일한 36%였다. 반면 한동훈 위원장의 지지율은 지난해 6월 4%로 첫 등장한 이래, 지난주 22%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한동훈의 지지율만 올랐다. 그나마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힘든 게, 확장성의 한계에 갖혀버린 듯한 모습 때문이다. 한동훈의 아이러니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윤 대통령을 대체할 수 있다는 기대감과 그가 결국 대통령의 부하라는 현실 사이의 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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