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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민족민주운동가들의 어머니였습니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3/10/11 08:43
  • 수정일
    2013/10/11 08:43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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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락호 선생 민주통일장 ‘영결 추도식’ 열려

이창훈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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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0.11 02:3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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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일 한양대학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이락호 선생 민주통일장 '영결 추도식'에서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10일 한양대학병원 장례식장에서 이락호 선생 민주통일장 '영결 추도식'이 열렸다.

이날 추도식에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비롯하여 고인이 몸담았던 사월혁명회, 민가협, 진보연대, 전국여성연대, 추모연대 회원 등 1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진행되었다.

전국여성연대 최진미 집행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추도식은 사월혁명회 한찬욱 사무처장의 '이락호 선생의 약력보고'에 이어, 한국진보연대 오종렬 총회의장, 사월혁명회 정동익 상임의장, 민가협 조순덕 상임의장의 추도사가 진행되었다.

오종렬 총회의장은 “고인은 민족민주운동가들의 어머니였습니다. 모든 것을 걸고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살아오신 일도 높이 평가될 일이거니와 항상 메고 다시는 무거운 가방에는 먹을거리와 손수 만드신 건강식품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면서 “선생은 그 준비한 음식들을 활동가들에게 나눠주면 '잘 먹고 건강해야 민족민주운동을 잘 할 수 있다'고 격려하셨던 것입니다”라며, 고인을 추모했다.

정동익 상임의장은 “선생님은 운동하는 동지들이 기대어 쉴 수 있는 거목 같은 존재이셨습니다”라고 말한 뒤 “선생님께서 건네주신 약 한 첩과 따뜻한 미소는 어떤 웅변이나 설교보다 통일운동하는 일꾼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돼 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조순덕 상임의장은 민가협 장터에 ‘양심수 석방!’이라고 새긴 앞치마를 30벌을 준비해온 일화를 소개하면서, 요양병원에 머무실 때 찾아갔더니 “남의 건강 걱정만 했지 내 건강은 지키지 못해 부끄럽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며, “선생님! '삶' 그 정도면 훌륭했습니다. 참 '귀'하게 사셨습니다”라고 추모했다.

추도사를 마치고 이수진 씨가 나와 조가 ‘심장에 남는 사람’을 불렀다.

호상을 맡은 추모연대 박중기 명예의장은 “어제 홍근수 목사님의 추모제에 이어 오늘 이락호 선생의 추모제를 하고 있으려니 착잡한 심경이다”라고 말한 뒤 “이들이 우리 곁을 떠난 것은 큰 손실이며, 이들의 희생만큼 우리 사회가 진전이 있는지는 곱씹어 볼일이다”며 “선생은 자기는 굶어도 남이 굶는 것은 못 보는 착한 심경의 소유자였고, 마음은 지하수처럼 맑고 투명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선생의 빈자리를 채우는데 더 열심히 나서야 할 것이다”라고 고인을 보내는 심경을 토로했다.

마지막 유족 인사에 나선 장남 김영규 씨는 어머니의 유품 중에 수없이 많은 메모지들과 신문 스크랩을 살펴본 이야기를 꺼내며 “어머니는 참으로 고뇌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자신이 운동이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까를 항상 준비하고 노력하셨던 분이셨다”라고 말한 뒤 “만약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여러분들에게 남기셨을 말을 어머니 대신 전하겠다”며 “지난 77년 동안 여러분과 함께 한 일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들께 서운하게 해드린 것이 있다면 용서하십시오. 제가 다시 태어난다면 또 다시 여러분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이락호 선생이 남기셨을 말을 대신 낭독했다.

추도식을 마친 참가자들은 헌화와 분향의 시간을 가졌다. 고인의 장지는 충남 홍성군 홍성추모공원이다.

 

이락호(李樂護) 선생 주요 약력

1937년 대구 중구 남산동 출생
1957년 대구 원화여고 졸업. 한국사회사업대학(대구대 전신) 공업경제학과 중퇴
1958년 대구 내외방직, 대한방직에서 일하고, 경남 진주로 활동공간을 옮겨 동양염직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였다.
1960년 4.19혁명 후, 7.29 민의원선거 당시 상주, 영주, 안동 등지에서 혁신계 출마자를 도와 선거운동을 하였다. 또한 민족민주청년동맹 경북맹부에서는 홍일점으로 활동하였다.
1961년 대구에서 2대 악법 반대시위를 주도하였다. 5.16쿠데타 후, 혁명재판에서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1964년 1차 인혁당사건으로 연행되어 심한 고초를 받았다.
1974년 2차 인혁당사건으로 연행되어 심한 고초를 받았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연행되어 심한 고초를 받았다.
1990년 아들 김영규도 어머니의 뜻을 이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국세청 점거사건>으로 투옥되었다. 이때 선생은 민가협 회원이 되어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1998년 사월혁명회 공동의장을 맡음
이후 지금까지 민가협 운영위원, 전국여성연대 지도위원, 한국진보연대 고문,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이사 등을 역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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