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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없다면 삶은 무의미 해진다.

박한표  | 등록:2024-05-23 07:59:10 | 최종:2024-05-23 14:41:1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죽음이 없다면 삶은 무의미 해진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5월 21일)

어제에 이어 죽음에 관한 화두를 이어간다.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바로 삶이 진짜 귀중하다는 가치를 깨우쳐 주는 것이다. 삶은 우리에게 ‘드물게’ 누릴 수 있는 자원이다. 그러나 더욱 더 다정한 언어로 채워야 하는 귀한 시간이다. 죽음의 자연스러움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얻는 가장 큰 의미는 우리에게 두 번째 기회는 없다는 깨달음일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는가? 멍청한 일에 기웃거리고, 세상이 주입한 생각에 휩쓸리면서 말이다. 죽음을 대면하는 일은 지금 나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가, 정말로 나의 유한한 시간을 쓸 만한 일인가를 스스로 묻게 한다.

죽음이 없다면 삶은 무의미 해진다. 죽음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날 수 있는 거다. 몇 백 년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살 만큼 살았으면 교체되어야 한다. 어제에 이어 웰 다잉(Well-dying) 이야기를 이어간다. 웰 다잉하면,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영웅 헤라클레스의 ’맞이하는’ 죽음이 소환된다. 그가 죽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헤라클레스의 아내 데이라네이나는 트라키스에 도착하는 즉시 ‘네소스의 피’가 묻은 옷자락을 잘라 청동 솥에다 보관해 두었다. “의심이 마음의 젤로스(질투)를 튀겨낸다”는 말이 있다. 반면, 헤라클레스는 활쏘기 시합의 상으로 내걸렸던 아름다운 이올레를 잊지 못하고, 오이칼리아를 쳐들어가 활쏘기 시합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자의 상품으로 내걸렸던 이올레 넘겨주기를 거절한 에우리토스를 격파하고, 전리품으로 공주 이올레를 데리고 오다 가, 제우스 신전에 들러 제사를 올리게 된다. 그 때 헤라클레스는 아내 데이아네이라에게 자신의 예복을 부탁한다. 사자 가죽을 걸치고 제사를 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라클레스의 아내는 이올레를 질투하여, ‘네소스의 피’가 묻은 옷 조각을 헤라클레스의 예복 안에 꿰매어 넣었다.

헤라클레스는 아내가 보낸 그 예복을 입자마자, 정체모를 고통을 느꼈다. 고통이 어찌나 격심한지 난생처음으로 신전 바닥에 쓰러지기까지 했다. 제우스 신관들은 이 영웅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면서 그를 배에 태워 트라키스로 모셨다. 헤라클레스가 트라키스로 돌아오자, 아내 데이아네이라는 자신이 오해를 하여 남편을 죽게 한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다.

그러나 헤라클레스는 그냥 죽음을 기다리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웰-다잉(Well-dying)의 모습을 보여준다. 헤라클레스는 장작더미에 올라 불타 죽는 것으로 ‘떠밀리는’ 죽음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준비한다. 즉, 산 채로 자신을 화장시키는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장작을 쌓게 하고는 몸소 직접 그 위로 올라가서 이렇게 말한다. “이 장작 더미 밑에는 내가 쌓아놓은 불쏘시개가 있다. 그러나 내가 그대들에게 불질러줄 것을 청하여도, 그대들은 불을 지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나를 모르는 사람이 이곳을 지나게 되면, 내가 쓰던 이 활을 주고, 그 대가로 불을 질러달라고 부탁해라.” 아들 힐라스에게는 이올레를 아내로 삼으라고 유언했다. 한 이방인이 나타나자, 신관들이 헤라클레스의 뜻을 전하자, 헤라클레스가 누구인지 모르니까, 별 어려움 없이 불방망이를 장작더미 밑에 던지고, 헤라클레스의 활을 받아가지고 사라졌다.

올림포스 신들은 헤라클레스가 땅 위의 삶을 마감하는 광경을 슬프게 내려보고 있었다. 그 때, 제우스는 헤라클레스를 올림포스로 불러들인다. 그래서 헤라클레스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지만, 죽지 않는 신이 되어 올림포스로 올라 간 영웅이 된다. 그리고 헤라와도 화해하고, 헤라의 딸 헤베와 결혼을 허락한다. 독일 시인 쉴러의 시 한 대목을 인용한다.

(..)
지상에서 어둡고 무거운 고통을 죽음에다 버리고,
천상의 빛을 향하여 비상했다.
(...)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은 크게 다음과 같이 세 가지이다.
-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순간
- 육체가 실제로 소멸하는 순간
-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순간

세 번째 경험하는 죽음을 위해 최근에 ‘e-죽음 산업’이 생겨났다. 고인이 인간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순간을 막기 위해, 고인의 개인적 데이터를 수집하여, 그가 사라진 뒤에 그를 대신하는 아바타를 만든다. ‘e-죽음 산업’의 등장은 인간의 데이터를 실리콘 속에 영구히 보존함으로써 인간성의 일부를 구해낼 방법을 찾고 있다. ‘특이점’ 신봉자들은 인류 모두가 나중에 클라우드 속에서 살 것이라고 민든다. ‘특이점’ 이야기는  레이 커즈와일이 한 이야기이다. 인간이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거의 조금도 발전하지 못하는 동안 컴퓨터는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발전한다는 거다. 그런 성장은 거의 틀림없이 ‘특이점’을 요구한다. 즉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인간을 말고 당기면서 더 높은 존재 수준으로 끌어올릴 가까운 장래의 어느 시점 말이다. 그 ‘특이점’이 오면, 그러니까 우리를 지금의 우리로 만든 거대한 고립인 죽음이 살해될 수 있다는 거다.

그러나 남겨진 사람들이 가진 고인에 대한 기억은 컴퓨터가 제공하는 소위 추억이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컴퓨터는 기억 능력이 전혀 없다.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은 불러오는 것뿐이다. 실제 우리의 뇌가 하는 기억은 나뉘고 변형된다. 우리는 지금 알고 있는 것에 비추어 과거를 편집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바꾸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억은 정지된 파일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그들 자체의 모습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 방식으로 그들을 기억한다. 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박찬일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죽음에 대한 한 연구 / 박찬일

죽은 지 1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2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3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4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5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6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7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불행의 원인, 일상의 쾌락이 아닌 불쾌함의 원인인 두려움과 허영 그리고 무절제한 욕망이란 병을 고치기 위한  네가지 치료법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신을 두려워 하지 마라
▪ 죽음을 걱정하지 마라
▪ 선한 것은 얻기 쉬운 것이다.
▪ 최악의 상황은 견딜 만하다.

이 중 두 번째 치료법인 “죽음을  걱정하지 마라”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사실 살아 있지 않은 상태인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가 죽는다면,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더 이상 없어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을 1인칭 죽음, 2인칭 죽음 그리고 3인칭 죽음으로 나누어 볼 때, 1인칭 죽음은 죽은 후에는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 자신이 죽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아파하는 것은 2인칭 죽음이다. 사랑하는 2인칭의 죽음으로, 그의 부재(不在)가 주는 슬픔 때문이다. 3인칭으로 죽은 그(그녀의) 죽음은 나, 1인칭에게 직접적인 슬픔을 안겨주지 않는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지 않으면 고귀한 쾌락을 즐기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죽음 그 자체를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라고 했다. 죽음은 모르는 게 약이라는 거다. 살아있는 동안 죽음을 고민하는 행위 자체를 하지 말라는 거다.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 죽음은 오지 않고, 죽음이 오면 우린 존재하지 않으니까.

에피쿠로스는 사후 세계를 믿지 않았다. 그에 의하면, 죽음이 인간에게 가장 악한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고민과 집착이 인간 삶의 질과 행복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은 죽은 후에 다른 형태로 변화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의 모든 형태가 파괴되면, 영혼은 흩어지고 이전에 소유했던 능력을 상실한다.” 당시 대부분의 아테네인들은 영혼불멸설을 믿었다.

그는 사후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죽음을 걱정하지 않았다.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특징은 ‘자기보존 능력’이 있다. 생물은 시간이라는 우주의 최후 심판자 앞에서 ‘있음(有)’에서 ‘없음(無)’의 상태로 변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 우리는 그 ‘없음’을 의식하며 ‘지금-여기의 있음’을  만끽하여야 한다. 죽음이 없다면, 살아있음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내가 ‘지금-여기’에 살아 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필요조건이다. 만약 우리가 영원히 안 죽고 산다면, 지금-여기에 살아있음이 중요하겠는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제3막 1장에서 햄릿이 하는 독백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이 독백은 삶과 죽음 가운데서 갈팡질팡했던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인간 답게 살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죽어야 할 운명인 인간이라면, 우리에게 붙잡아야 할 지푸라기는 ‘지금 살아 있는’ 이 시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물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삶을 살아낼 방식을 구하기 위해, 잘 살아야 하는 근거를 얻기 위해서이다.

이 문제는 미국 예일대학에서 17년간 연속 최고의 명강의로 꼽히는 셸리 케이건의 <<죽음 수업(Death)>>이 잘 말해준다. 사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죽는다. 이 사실이 우리 삶을 어떻게 흔드는지 질문하면서, 이 책은 노화를 몸으로 자각하고 시간의 흐름을 서서히 인지하면서 짓눌리게 되는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준다. 죽음의 상태를 규정하는 자세가 살아 있는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물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삶을 살아낼 방식을 구하기 위해, 잘 살아야 하는 근거를 얻기 위해서이다. 죽으면 끝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이 시간을 잘 누리면 된다. 마음껏 사는 거다.

박한표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박사를 받고 국내에 들어와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문화원장을 하다가 와인을 공부하였습니다. 경희대 관광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며, 또한 와인 및 글로벌 매너에 관심을 갖고 전국 여러 기관에서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인문운동가를 꿈꿉니다. 그리고 NGO단체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다 그만두고, 지금은 인문운동에 매진한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마을 활동가로 변신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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