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황의 스승인 스칸노네 신부와 함께 로마 예수회 본부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스승인 후앙 카를로스 스칸노네 신부와 기념촬영을 했다. 2014년 6월. ⓒ 김근수
김근수 소장은 얼마 전 그의 열 번째 저서 <예수운동 역사와 신학>을 출간했다. 이 책은 신학 인문서로는 이례적으로 2주 만에 재판을 찍었다. 예수 등장부터 요한복음이 나오기까지 예수운동 1세기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그리스도 2천 년 역사에서 공동체가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평등이 실천된 시기는 예수운동 1세기였다"라고 강조한다.
이 말은 예수 등장으로부터 2천 년이 흐른 오늘날 기독교가 이른바 '초대교회'의 정신에서 크게 멀어져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김근수 소장은 한국 그리스도교에 도움을 주려는 의도에서 이 책을 썼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그는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교와 성직자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일까.
"요즘 한국의 교회나 성당에서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즉, 예수운동의 원형을 되살려보자는 것이죠. 이런 움직임에 학문적 근거를 주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1세기 예수운동의 특징은 첫째, 다양성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여러 신학적 흐름이 이때 쓰인 신약성서에 온전히 담겨 있어요. 둘째, 일치입니다. 의견이 달라도 서로 싸우거나 배척하지 않고 같은 공동체에 있으려고 많이 애썼다는 겁니다.
그리고 평등입니다. 1세기 예수운동 공동체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지식인과 평민, 남성과 여성, 주인과 노예의 사회적 차별이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지중해 지역의 그리스 로마 문화에서 이처럼 높은 수준의 평등이 실현된 공동체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늘날 가톨릭이나 개신교는 어떨까요. 직업 종교인과 신도,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가장 크게는 부자가 위세를 떨치고 가난한 사람은 외면당하는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2천 년 전 예수운동의 모습과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자세히 보여줌으로써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해방신학자 김근수는 또 자신의 책에서 "이웃사랑과 원수사랑이라는 아름답고 고귀한 산상수훈 말씀보다 '하느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누가복음 16,13)라는 말이 예수와 성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라고 강조한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어볼 만한 대목인 것 같다.
"원수사랑 이웃사랑을 말한 예수가 왜 정치범으로 죽었을까요. 그건 분명히 예수가 정치범으로 처형될 만한 어떤 행위를 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듯이 가난한 사람 이야기가 곳곳에서 나옵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어요. 또 부자를 비판하고 혼내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을 비판하거나 혼내는 대목은 한 번도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웃사랑 원수사랑은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그 마음에서 하는 이야기인 것이에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제외하고 이웃사랑이나 원수사랑은 말하지 않았거든요. 결국 가난한 사람에 대한 예수의 사랑이 당시 사회질서를 어지럽혔다는 명목의 정치범으로 처형당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예수의 원래 메시지가 뒤로 물러나고 대신 죄의 용서나 화해의 이야기들이 전면에 등장해 버린 것입니다. 현대의 해방신학은 바로 이 부분을 다시 찾아내 가난의 문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제대로 섬긴다면 돈을 버는 과정에서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거나 이용할 수가 없고, 돈을 번 이후에도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내 맘대로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라고 거짓말하며 예수를 배신하고 팔아먹는 종교인도 있습니다. '돈 먼저, 하느님 그다음'을 다짐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리스도교 자체가 하느님보다 돈을 더 섬겨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는, 복음서의 이 부분에 저는 더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김근수 소장은 중남미 엘살바도르에서 저명한 해방신학자 '혼 소브리노' 신부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최초의 아시아인 제자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했던 해방신학을 공부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제가 천주교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신부가 되는 게 자연스러운 진로였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철학과로 진학했습니다. 곧바로 신학대학으로 가는 것보다는 철학을 공부한 다음에 가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철학과에선 서양철학, 그중에서도 독일철학에 관심이 많았어요.
군대를 갔다 와서 1986년 광주가톨릭대에 들어갔습니다. 전주교구 소속 신학생이 되어 본격적으로 신부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게 된 것이지요. 이때가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고, 2학년 때는 6월항쟁이 벌어졌습니다. 정치적 감각이 한창 예민했던 시기에 이같은 역사적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제가 신학을 공부하면서 현실과 연결되는 부분에 관심이 컸던 것 같습니다.
광주가톨릭대를 2년 다닌 후 '신학 공부를 더 깊이 할 기회가 닿아' 독일로 유학을 떠나게 됐습니다. 마인츠 대학교 가톨릭신학과에서 신약성서를 전공했는데, 독일의 성서신학은 가난한 사람에 관해서는 잘 다루지 않는 반면, 성서를 문학 연구의 텍스트로 보는 건 매우 발달했어요. 그래서 독일에서 성서신학을 공부하는 게 학문적 연구에는 큰 도움이 되겠지만, 성서에 많이 나오는 가난한 사람을 연구하는 데는 그렇게 우호적인 환경이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신부가 아닌 신학자의 길을 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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