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과거에 일어났던 평화롭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는 이유는 앞으로의 세계를 평화롭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역사교육의 가장 큰 목적은 세계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세계 각지에서 지역공동체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유럽연합(EU)이 가장 먼저 됐고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ASEAN)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중·일, 동아시아지역에서는 21세기 역사의 큰 흐름인 지역공동체를 이루는 일에 조금 소극적입니다. 지난 20세기의 불행한 역사때문입니다.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또 21세기 동아시아 공동체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이 북과 수교하고 한·중·일만 들어있는 '아세안+3'에서 북도 함께하는 '아세안+4'가 되어야 합니다. 남북의 통일을 일본과 일본 여론이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런 움직임이 전혀 없는 것 같아요. 아주 유감입니다." (고 강만길(姜萬吉, 1933.10.25~2023.6.23) 선생)

"(미국의 정책도 그렇지만) 일본 역시 남북한과 국교를 맺고 재일 한국인·조선인을 제대로 된 외국인으로 취급하지 않는 한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긴 국호를 가진 나라가 생긴지 70년(2018년 기준)이에요. 일본 언론은 처음엔 북선(北鮮)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엔 '기타조센'(北朝鮮)이라고 했습니다.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 같은 역사학자들이 '북선'은 아주 차별적인 표현이라며 항의한 결과 그렇게 바뀐 것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전체 이름을 붙여 '기타조센'이라고 하다가 최근 일본인납치사건이 문제되면서 다시 없어졌어요.  신문사 보도국이 합동회의를 거쳐 '기타조센'으로 통일시켜버렸습니다. 북은 나라가 아니라는 거죠.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나는 이런 일본의 모습에 항상 분노합니다. 그저 '조선'이라고 하면 되지 않나요." (고 강덕상(姜德相, 1931.6.20~2021.6.12) 선생)

2018년 12월 15일 오후 일본 히토츠바시(一橋)대학교 국제연구관 대강의실에서 진행된 고 강만길·강덕상 선생의 생애 마지막 좌담. [사진-강덕상자료센터 영상 갈무리]
2018년 12월 15일 오후 일본 히토츠바시(一橋)대학교 국제연구관 대강의실에서 진행된 고 강만길·강덕상 선생의 생애 마지막 좌담. [사진-강덕상자료센터 영상 갈무리]

'분단시대 사학'과 '시무(時務)의 역사학'을 좌표로 삼아 평생 연구에 매진한 두 역사학자는 지난 2018년 12월 생애 마지막 좌담에서 남북의 화해와 협력, 통일에 대한 강렬한 희구를 밝혔다.

강만길 선생에게서는 약간의 낙관과 기대감이 묻어났으나, 불편한 몸 상태때문에 안대를 착용하고 좌담회에 임한 강덕상 선생은 '변하지 않는 일본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좌담에 앞서 그해 4월과 9월 두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그 사이 6월 싱가포르에서 사상 최초의 북미정상회담이 개최된 상황이었지만 이듬해 결국 '노딜'로 끝난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의 전조를 예감해서일까? 

과거 조선에 대한 식민지 통치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분단을 넘어서려는 남북의 노력에 어깃장을 놓는 일본에 대해서는 '그래서는 미래가 없다'는 묵직한 경고를 보냈다.

고 강만길·강덕상 선생의 좌담은  '한반도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역사연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주제로 지난 2018년 12월 15일 오후 일본 히토츠바시(一橋)대학교 국제연구관 대강의실에서 2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강덕상 선생이 5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재일 조선인 최초로 일본 국립대 교수로 부임한 '히토츠바시대학교'의 '한국학연구센터'와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를 지원하기 위해 지난 2007년 강만길 선생이 설립한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이 공동 주최했으며, 조선여성사 연구의 권위자인 송연옥(宋連玉)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学院)대학 명예교수가 사회를 맡았다.

강덕상 선생의 첫 한국인 제자이자 당시 한국학연구센터 교수로 재직하며 행사를 주관했던 이규수 강덕상자료센터 센터장은 "좌담은 병상에 있던 강덕상 선생의 희망과 요청에 따라 강만길 선생이 일본을 방문해 이루어진 것으로 많은 역사학자들이 방청한 가운데 진행됐으며, 전날엔 강만길 선생의 강연도 열렸다"고 설명했다.

좌담에서 강덕상 선생은 "조선과 일본이 수교를 결정한 강화도조약(1876)이후 벌어진 청일전쟁(1894.7.~1895.4)과 러일전쟁(1904.2~1905)도 모두 '조선전쟁'이고, 갑오농민전쟁과 의병투쟁, 3.1운동은 '조선의 항일전쟁'이며, 1920년 10월부터 1921년 4월까지 대규모 정규군을 간도에 출병시킨 후부터는 본격적인 전투를 벌였다"고 하면서 일본의 역사는 '조선과의 전쟁의 연속'이라는 지론을 재확인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상황은 150년 동안 조선의 상황에 의해 바뀔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의 모퉁이(역사적 전환기)에는 반드시 조선이 있다"는 결론이다.

또 일본이 '전후 민주주의'를 내세워 전전(戰前)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약점을 극복했다고 주장하지만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의 정책에 의해 끌려온 재일 조선인을 '외국인'으로 규정하고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할 때부터 이미 전전으로의 회귀는 시작된 것이라며 "일본에 민주주의는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남북대화와 평화무드를 가장 달가워하지 않고 훼방을 놓는 나라가 일본"이라고 하면서 "근저에서부터 일본이 이같은 역사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신뢰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통일에 이바지하는 역사학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강만길 선생은 "한국의 역사학계, 특히 젊은 역사학자들이 상당히 활발히 움직이고 있고 좋은 업적도 많이 나온다. 특히 남북관계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며, "우리 세대보다는 지금의 젊은 세대가 민족문제나 통일문제에 있어서 훨씬 더 나아지고 있다. 그 점에서는 아주 마음이 편안하다"고 말했다.

역시 좌담에 앞서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이 진행된 당시의 희망적 분위기에서 나온 이야기로 보인다.

남북역사학자협의회에서 "남북 공동으로 국사학 개설을 쓰기로, 남북의 젊은 역사학도들을 서로 교류하도록 합의했는데,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꺼져버렸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개성만월대 공동발굴과 복원사업을 비롯해 좀 더 구체적인 진행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더 컸다.

이에 대해 강덕상 선생은 자신이 초창기부터 참여했던 '조선사연구회'(1959년)에서 이미 1995년 무렵 탈퇴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고 말을 아꼈다.

일본의 전전(군국주의) 회귀 영향이 강하게 불어 그곳에서도 더 이상 남북 문제와 여러 형태로 관련되는 역사적 문제를 다룬 논문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고 하면서 '조선사 연구를 통해 일본사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인식'이 사라져가는데 대한 짙은 아쉬움을 표시했다.

식민지배와 저항이라는 다른 결로 구성되어 있는 한일 근현대사는 어떡하든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은 "일본의 조선 침략 과정이 우리에게는 근대사이고 일본이 지배한 과정이 현대사"라는 강만길 선생의 정의와도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좌담은 '한반도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역사연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주제로 진행됐다. 사진은 좌담 포스터. [사진-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좌담은 '한반도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역사연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주제로 진행됐다. 사진은 좌담 포스터. [사진-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앞선 강덕상 선생의 구술기록에 따르면, 조선사연구회는 와세다(早稻田)대학생 강덕상이 '중국사'에서 '조선사'로 연구 방향을 정한 이후 미야타 세츠코(宮田節子), 권영욱(權寧旭), 그리고 가지무라 히데키 등 학문적 동지를 만난 곳으로 일본내 조선사 연구의 시초이다.

신노 사토루(神農智)라는 일본식 통명을 버리고 강덕상이라는 본명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일본공산당 소속으로 같은 대학 중국연구소 연구원인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郎) 선생이 '조선인이면서 왜 조선사를 공부하지 않느냐? 조선사는 일본의 근대사를 바라보는데 가장 중요한 거울'이라는 말을 들었던게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무렵 조선총독부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만든 우방협회에서 호즈미 신로쿠로(穂積真六郎, 총독부 식산국장·조선전기주식회사 사장), 곤도 겐이치(近藤釼一, 경성일보 편집기자), 시부야 레이지(渋谷礼治, 조선은행 간부) 등을 만나 조선지배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하며 전후 최초로 '조선근대사료연구회'도 만들었다.

연구회가 유명해지자 야마베 겐타로, 박경식, 금병동을 비롯한 연구자들의 참여도 늘어나 2~3년 사이에 조선사연구회가 만들어지게 됐다.

와세다대학 중국연구회의 조선사 연구그룹인 '조선사부회(朝鮮史部会)'에서 출발하여 우방협회 '조선근대사료연구회'를 거쳐 조선사연구회까지 발전한 것. 

강만길 선생은 "지금은 국내에서도 젊은 학자들이 근, 현대사를 많이 연구하지만 상당 기간 활발하지 못했다. 재일 역사학자들이 내놓은 연구성과는 그때 대단히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강만길 선생의 연표에는 1967년 고려대학교 사학과 조교수로 처음 발령을 받고 1970년 반년간 교환교수로 일본을 방문해 처음으로 『역사과학』 등 북의 역사학 동향을 접하게 되었으며, 1978년 8월부터 와세다대학교 파견교수로 1년간 생활하면서 강덕상을 비롯해 박경식(朴慶植), 강재언(姜在彦), 이진희(李進熙), 박종근(朴宗根) 등 재일 역사학자들과 교류를 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후기 상업사에 대한 다수 논문을 발표하다 1980년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에서 해직되기 전인 1978년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을 필두로 『한국민족운동사론』(1985),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1990), 『고쳐 쓴 한국 근·현대사』(1994)를 비롯한 저서를 발표했는데, 이날 좌담에서도 "내가 처음으로 한국 근대사, 한국 현대사를 쓰는데 거기에 재일 역사학자들의 업적이 굉장히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대표적 연구로는 △조선도 근대화 과정을 밟을 수 있는 역사임을 밝힌 자본주의 맹아연구 △좌우합작 독립운동 연구 △식민지근대화론의 반론을 위해 그 시대 민중의 삶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자료를 통해 규명한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 등을 꼽았다.

또 '분단시대'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해방 후 한국사회에서 1945년 8.15 이전을 '일제시대', 그 이후를 '해방 후 시대'라고 했으나 '반드시 통일해야 할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는 의지를 담아 그렇게 명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덕상 선생은 △가지무라가 주장한 '내재적 발전론'을 '화폐론'으로 묶어 증명하려 했지만 내재사관 성립하지 않아 5~6개 논문을 끝으로 그만 두었던 일 △연구주제의 전환을 고민하고 있을 때 여동생이 다니던 민족학교 담임이었던 박경식 선생으로부터 '시무'(時務, 시대의 의무)의 역사인 '강제연행 연구'를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고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을 실증적인 일본의 지배문제로 연구한 일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을 쟁취했다는 시각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독립운동 과정에서 산화한 위인들을 찾던 중 여운형을 발견해 40여 년간 연구한 일에 자신의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고 말했다.

특히 여운형은 항상 민족을 중심에 놓고 싸운 사람이라며, "지금의 분단을 통일로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이 사람을 남북 양쪽이 제대로 평가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강덕상 선생의 『여운형 평전』은 제1권 '조선 3.1독립운동'과 제2권 '상하이 임시정부', 제3권 '중국 국민혁명의 친구로서'에 이어 2019년 '일제 말기 암흑시대의 등불로서'라는 제목의 제4권까지 총 1,688쪽의 대작으로 완간되었다.

좌담에 앞서 도쿄 시내를 걷는 강만길·강덕상 선생. [사진-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좌담에 앞서 도쿄 시내를 걷는 강만길·강덕상 선생. [사진-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오랜 벗으로 두터운 정을 나누었던 두 사람의 만남은 이 때가 마지막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더 이상 오갈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다 강덕상 선생이 2021년 6월 21일 별세하고 강만길 선생마저 2년뒤인 2023년 6월 23일 우리 곁을 떠났다. [사진-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오랜 벗으로 두터운 정을 나누었던 두 사람의 만남은 이 때가 마지막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더 이상 오갈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다 강덕상 선생이 2021년 6월 21일 별세하고 강만길 선생마저 2년뒤인 2023년 6월 23일 우리 곁을 떠났다. [사진-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송연옥 교수는 "만약 두 분에게 항일투쟁을 한 인물과 역사적인 대담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와 하고 싶으냐"는 흥미로운 질문도 던졌다.

강만길 선생은 김원봉을 선택했다. 평생 육탄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 후 귀국해서는 미군정의 경찰책임자에 의해 감옥에 가고, 가족과 함께 북으로 갔으나 거기서도 감옥살이를 했다고 하니 '우리 근현대사를 통해서 가장 억울한 분'이라는 이유이다.

강덕상 선생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상대로 분명히 인식하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 '국내에서 민중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보면서 해방을 준비한 사람', '일본의 지배아래서 49%까지는 양보하더라도 51%는 내 것으로 취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한 여운형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학문의 영역뿐만 아니라 가정사 고민까지 허물없이 나누던 두 역사학자는 좌담에서 민족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거기엔 일본 초대 천황인 진무텐노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알았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는 물론 단군도 전혀 몰랐던 1945년 전 소년 강만길, 한 민족끼리 싸우는 처참한 전쟁을 직접 겪으면서 '왜 이런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고민하던 19살의 대학생 강만길이 있었다.

두살 위인 강덕상은 일본의 태평양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지금의 도쿄 아자부(麻布)의 후루카와쵸(古川町)의 조선인 부락에서 살던, 교육칙어를 전부 암송하는 열렬한 '황국신민'이었다. 

1945년 8월 15일 근로동원에 나갔던 중학교 2학년때 하숙집으로 돌아와 대성통곡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멍한 상태로 '나는 일본인과 다르구나'하는 생각을 처음 했다. 일장기를 반쯤 색칠해 태극기를 만들어서는 만세를 부르는 많은 조선사람들을 보면서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대학에 갈 형편도 안되었기 때문에 선원을 양성하는 상선학교나 수산학교에 가려고 했지만 일본 국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도 할 수 없었다.

와세다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전쟁반대, 원자폭탄을 쓰지말라는 학생운동에 동감해 참가는 했지만 그 와중에도 '조선인'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 무렵 만난 야마베 겐타로는 큰 스승이었다. "조선인인 네가 왜 중국사를 하는가. 조선사는 일본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거울이다"라고 한 지적은 지금도 옳은 말이라고 새기고 있다. 

결국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 되어서야 스스로 '나는 조선인이다. 민족사를 배워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강만길·강덕상 두 역사학자의 좌담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일본이 망각하는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미래를 전망하는 일이다. 

"역시 민족을 되찾는다는 것. 이것은 사상이 아닙니다. 남북으로 나누어지게 한 것은 좌와 우입니다. 이것은 사상입니다. 그 뒤편에는 공통의 민족 체험이 있습니다. 이것을 회복한다는 것.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는 강덕상 선생의 외침을 되새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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